밀레니엄이란 말도 고전이 되어 버렸다. YⅡK라고도 했다. 심지어 지금의 미성년자들은 이 단어를 낯설어한다. 당시 활동한 3인조 남성 그룹 YⅡK를 아느냐고 묻는 건 아재를 인정하는 첩경이다. ‘밀레니엄 둥이’들이 곧 성인을 맞이한다. 그만큼 오래전 이야기다. 다가오는 2000년을 마냥 바라보기에는 힘든 숫자다. 각종 이벤트가 불을 뿜었다. 런던도 2000년 밀레니엄을 맞이하는 이벤트를 준비했다.
『밀레니엄 프로젝트』는 밀레니엄 브리지와 테이트 모던 갤러리, 런던 아이(밀레니엄 휠), 밀레니엄 돔, 밀레니엄 빌리지 등으로 이뤄진 대규모 건축 사업이다. 밀레니엄 프로젝트의 사업 중 하나인 밀레니엄 브리지 건설은 1998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2000년 6월 10일에 오픈하였다. 하지만 심한 흔들림으로 이틀 만에 출입을 통제하고 2002년에 다시 개통하였다. 흔들림은 여전했다. 일종의 모험이라 생각하고 걸었다. 철근과 알루미늄으로 제작된 보행자 전용 다리다. 시작과 끝은 세인트 폴 대성당과 테이트 모던이 맡았다. 타워 브리지를 보고 이 다리를 건너서 그런지, 생각보다 초라해 보였다. 디자인에 치중한 다리라고 하는데, 단순하다기 보다는 웅장함이 모자란 느낌이 앞섰다. 디자인과 안전의 문제를 안고 있지만, 이 사업은 성공적인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뭐지? 다리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템스강 남쪽 서더크 Southwark 지역의 개발을 자극하고 있다. 개발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곧이 바라볼 수 없는 부분이다.
세인트 폴 성당에서 밀레니엄 브리지를 건너면 다소 투박한 붉은 벽돌 건물이 보인다. 건물 중앙에 긴 굴뚝같이 보이는 형상이 가장 먼저 눈에 띄지만, 이름처럼 ‘모던’해 보이지 않았다. 부동산 시장에 나온 공장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곳은 현대 미술의 상징으로 재탄생한 미술관이다. 테이트 모던 Tate Modern은 2000년 5월에 개관했다. 1994년 그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뱅크사이드 발전소를 현대미술을 위한 새로운 미술관으로 개조한다고 발표하였고, 이듬해에 헤르조그와 드뮤론 Herzog & De Meuron이 새로운 미술관의 설계를 맡게 됐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들이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 두 건축가만이 유일하게 건물을 허물지 않고 리모델링하자고 제안했었다. 옛것을 함부로 부수지 않고 고이 보존하는 걸 중요하게 여기는 영국인들의 국민성을 잘 파악한 현명한 선택이었다. 우리나라의 건축시정과는 사뭇 달랐다. 역시 개발을 반대하고 기존 환경을 보수하자는 입장에서는 런던의 이 기획에 더 애정이 간다. 기존의 외형은 그대로 보존하고, 발전소 내부만 완전히 개조하였다. 숨 멎은 발전소는 런던의 생기를 공급하는 곳으로 탈바꿈했다.
여행객과 로컬들이 비율이 비슷했다. 처음 여기 들어왔을 때, 동선이 엉망이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료로 진행하는 행사가 있지만, 3층 특별전은 유료로 입장이 가능한데, 그것도 모르고 들어가다가 머쓱해졌다. 그다음 해에 가서는 동선의 융통성이 생겼다. 하지만 다른 서비스가 추가되었다. 현대카드 소지자는 유료 전시관의 무료입장이 가능하다. 본인 명의의 현대카드와 여권만 있으면 인포메이션에서 티켓을 출력해 준다. 회원용 클럽 라운지도 생겼다. 북적이는 공용 공간과는 다르게 이곳에서는 편하게 커피도 마시면서 쉴 수 있다. 비 현대카드 소지자인 난 상대적 박탈감이 돋았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많은데, 타국에서도 느낄 줄이야. 반대로 보면, 현대카드가 이런 문화마케팅을 전방위적으로 잘 하는 셈이다. 단념은 빠를수록 좋다. 관람하고 쉬는 패턴이 자연스러워지고, 갤러리 이용 팁도 많이 수집했다. 피카소의 그림 앞에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뒤섞였고, 로비와 미술관 내 카페의 좌석은 만원이다. 미술관이라기보다는 복합문화휴식공간의 개념이 강했다. 작품 관람의 충성도보다는 쉬러 오는 관객들의 비율이 꽤 높다. 전시관은 여러 공간 중에 하나로 인식될 정도다.
휴식과 관람을 마쳤다. 테이트 모던을 나서는 목적은 이미 설정했다. 미술관 앞은 한 가수의 거리공연 준비로 다소 어수선하다. 자신만 보고 가라는 무언의 눈빛과 마주했다. 준비가 늦어져 내 갈 길을 택했다. 다시 강을 건너야 하는데 다른 다리를 선택했다. 밀레니엄 브리지 옆에 있는 블랙 플라이어 다리 Blackfriars Bridge. 서울의 한강, 더블린의 리피강, 런던의 템스강. 모두 수도를 가로질러 부담감을 안고 흐르는 강이다. 다리를 도보로 건너기 알맞은 강은 리피강이고, 템스강 정도면 카메라를 노리개 삼아 완주하기 좋다. 한강은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벌어주는 도보 코스다. 동명의 지하철역도 있다. 지척에 가려던 펍이 보였다. 찾기 쉬운 곳이고,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펍 중에 하나라서 수많은 맥덕들이 찾는다. 1905년 건축가 H. Fuller-Clark과 Henry Poole에 의해 지어졌고, 삼각형 형태의 특이한 펍이다. 건물 자체가 유서 깊고, 내부 인테리어도 중후한 맛이 난다. 펍 안에서 쉬이 볼 수 있는 수도사들. 블랙 플라이어 Black friar는 도미니칸 수도사들을 일컫는 말인데, 가톨릭 도미니스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검은 옷을 입은 데서 생겨났다고 한다. 펍 자체의 역사가 있다 보니, 손님들의 연령대도 높고, 이를 환대하는 직원들의 서비스도 연륜이 넘친다. 퇴근 시간이 되면, 화이트칼라들의 해우소 역할을 한다. 내가 선택한 맥주는 둠바 Doombar. 이 맥주를 생산하는 Sharp’s Brewery는 1994년 영국의 지역 양조 회사이다. Doom Bar bitter (4.0% abv)는 이 양조장의 전체 매출의 90%를 차지하는 대표적인 맥주다. 이 맥주를 한 곳에서 앉아 마시기 어려운 곳이다. 돌아볼 곳이 많고, 사진에 담을 만한 배경도 풍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