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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지의 취향, 나의 취향

고든 램지가 카스 광고에 나왔다고?

고든 램지. 미슐랭 스타를 총 16개나 받은 영국의 스타 요리사이자 ‘헬스 키친’이라는 요리사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그는 조금이라도 맛없는 음식에는 지독한 독설을 퍼붓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그가 광고를 찍었다. ‘블러디 프레쉬 (bloody fresh)’ 한 카스 맥주를 마시며 외친다.

“이모, 카스!”

© 오비맥주

© 오비맥주

이 광고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카스 광고의 3단 논법]
1. 고든 램지는 세계적인 요리사이며 미식가이다.
2. 고든 램지는 카스 맥주를 좋아한다.
3. 미식가는 카스 맥주를 좋아한다.
(‘그래서 카스는 맛있는 맥주이다’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덧붙여 그는 자극적이거나 기름진 한국 음식의 맛을 개운하게 씻어주는데 딱 좋은 맥주는 카스 같은 깔끔한 맥주이며, 오히려 맛이 풍부한 맥주는 한국 음식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도 남긴다. 카스 맥주의 맛만 칭찬한 것이 아니라 한국 음식과의 궁합까지도 살뜰하게 챙겨준다.

사진제공: https://pixabay.com/en/spicy-chicken-che-mack-669639/

고든 램지가 한국 음식에 대해서 뭘 알겠어? 광고에 등장한 삼겹살과 치맥을 한식의 전부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에 그는 ‘본격 연예 한밤’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해 시장에서 산 낙지를 먹으며 ‘나이스’를 연발하며 화답한다. 외국인이 혐오하는 한국 음식의 대표로 꼽히는 꿈틀거리는 산 낙지까지 즐기는 고든 램지라니, 생각보다 한국 음식을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 방문 중 열렸던 ‘카스 미디어간담회’에서는 한식이 ‘발효와 숙성의 음식이라는 점이 흥미롭다’라면서 ‘뉴욕에서 오픈한 한식당 꽃 (Cote)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정말 한국 맥주와 한국 음식은 천생연분이라는 그의 의견에 고개를 절로 끄덕일 수밖에 없다.

고든 램지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p/BboSrw9lEYv/?taken-by=gordongram

 

© 연합뉴스

그런데, 도대체 한국 맥주가 맛있는지 아닌지, 이 모든 논쟁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대동강 맥주보다도 맛없는 한국 맥주

분단 이후, 한국은 반도가 아닌 섬나라가 되었다. 육로로 이동할 수 있는 외국이 단 한 곳도 없기 때문이다. 그 섬나라의 국민이 처음으로 외국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28년 전, 1989년 1월 1일이다.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겠지만,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출국금지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던 나라가 한국이었다. 바야흐로 풍문으로만 듣던 외국의 문물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할 수 있게 되자 다양한 분야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90년대 초 거리는 팝송이 넘쳐났으며, 인스턴트커피의 원조 국가인 한국에서 ‘원두커피’라는 생경한 음료가 대중화되었다. 그 와중에 외국에서 한국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맛의 맥주를 접하고 온 이들을 중심으로 ‘한국 맥주는 밍밍하고 맛없다’와 같은 평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다소 주변부에 머무르던 이런 주장들에 불을 지핀 기사가 있었으니, ‘화끈한 음식, 따분한 맥주 (Fiery food, boring beer)’라는 2012년 영국 이코노미스트의 기사이다. 이 기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한국 맥주는 북한의 대동강 맥주보다도 맛이 없다’는 문장이다. 세상에, 아직도 북한이 남한보다 더 나은 것이 있다는 말인가? 북한의 맥주가 한국의 맥주보다 맛있다는 주장이 다른 나라도 아닌 미국의 형제뻘인 영국 기자의 입에서 나왔다니, 놀랄 노자가 아닐 수 없다. 한국 맥주는 맛있는가? 의 논쟁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오비 맥주와 같은 대기업이 아무리 한국 맥주의 기술력과 우수성을 강조하며 반박해도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결국에는 이코노미스트의 기자와 (우연히도) 같은 영국인, 그것도 연예인급 인기를 지닌 요리사인 고든 램지의 입을 빌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 바로 새로운 카스 광고인 것으로 보인다. 의외로 한국 음식도 잘 아는 듯한 이 스타 요리사는 ‘카스 맥주는 맛있다’를 연발하며 특히나 한국 음식에는 카스 맥주가 좋은 궁합이라고 선언한다. 그렇다. 그의 이 말 한마디는 선언이자 카스 맥주 맛에 대한 인증이 되었다. 한국 맥주는 맛있다는 인증.

그런데 이 맥주 광고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재미있다. 믿었던 램지마저 돈에 매수되었다며 충격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래, 역시 카스 맥주가 그렇게 형편없는 것은 아니었어’라며 램지의 의견에 ‘수줍은 동의 내지는 환호’를 보내는 사람도 있다. 고든 램지는 원래 카스와 같은 ‘아메리칸 페일 라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며 그가 20여 가지 다양한 맥주를 맛보고는 대부분 그 쓴맛을 견디지 못하고 뱉어버렸다는 그의 맥주 취향에 대한 기사를 인용하기도 한다. 결국 결론은 다음과 같이 모아진다: 한없이 주관적인 것이 인간의 입맛이다. 고든 램지 같은 요리사도 맥주 취향은 소박하기 그지없다. 그러니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자!

그러나, 입맛은 과연 주관적일까?

우리는 일상적으로 맛을 평가한다. 낯선 장소에 도착하면 으레 인터넷으로 맛집을 검색하곤 한다. ‘주관적인 개인의 취향’임에도 불구하고 음식점에 대해 어느 누군가가 내린 평가가 내 입맛에 맞는 음식점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식당의 맛을 단 세 개의 별로 평가하는 ‘미슐랭 가이드’는 한낱 맛집 소개 책으로는 과도하다 싶은 관심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다. 미디어는 음식을 만들고 평가하는 내용으로 넘쳐난다. 여러 참가자의 음식 솜씨나 음식 맛을 전문가 집단이나 대중이 평가하고 ‘우열을 가려’ 우승자를 뽑는 프로그램도 많다. 그렇다면 우승자의 음식은 패자의 음식보다 맛있을까? 맛에 대한 취향이 정말 온전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이라면 이런 평가가 가능한 것인가? 극단적인 비유를 들자면, 한 끼에 30만 원 하는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의 음식과 맥도널드의 햄버거에는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개개인의 취향, 선택의 차이만이 있는 것이다.

당신은 이 의견에 동의하는가?

와인의 맛을 둘러싼 우리의 인식은 우리가 맛에 대한 취향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신의 물방울’ 같은 만화를 통해서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와인의 이름은 물론 생산 연도까지 척척 맞추는 그야말로 만화 같은 소믈리에의 존재를 접하고 나면, 비록 나같이 입맛이 섬세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별 의미가 없겠지만 절대 미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상상도 하지 못할 값비싼 와인도 그 비용을 낼 만한 가치가 있는 상품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맛을 느끼는지에 대한 최근의 연구 결과들은 ‘정말 미각이란 믿을 만한 감각인가’에 대해 많은 의문을 던진다. 사람들은 같은 와인이라도 비싼 가격표를 붙여 놓으면 더 맛있는 와인이라고 느끼며, 심지어 화이트 와인에 붉은 색소를 섞어주면 레드 와인의 맛을 느낀다는 과학적인 연구 결과들은 ‘절대 미각’은 허구에 가까운 것이며 우리의 입맛은 실제 혀로 느끼는 미각보다도 시각적인 정보나 분위기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와인 업계에는 여전히 와인 맛 평가의 신과 같은 존재가 있다. 로버트 파커라는 인물이다. 그는 서로 다른 와인에 직접 비교할 수 있는 숫자로 된 점수를 매긴다. 적어도 72점을 받은 와인과 92점을 받은 와인은 ‘의미 있는 맛의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아니, 같은 와인도 상황에 따라 화이트 와인으로도, 레드 와인으로도 느낄 수 있는 것이 인간의 혀인데, 그의 혀는 어째서 특정 와인에 70점이라는 낙인을 찍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일까? 결국 우리는 ‘입맛은 부정확한 감각이며, 따라서 입맛은 절대적인 기준을 세우기는 어려운 개인의 취향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여전히 ‘맛의 전문가’의 평가를 무시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 기자와 고든 램지의 이야기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맥주의 본고장 중 하나인 영국 출신의 기자가 한국의 맥주를 평가 절하했다. 그는 맥주 전문 기자도 아니다. 맥주에 관한 어떤 전문적인 교육도 받은 바 없다. 그냥 한국 주재 영국 기자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의 기사는 큰 반향을 일으켰고, 한국의 대기업은 곧바로 반박에 나섰다. ‘한국 맥주도 국제적인 상을 많이 받았으며 설비와 기술도 최상이다’와 같은 해명을 내놓았다. 아니, 일개 영국인의 입맛이 뭐가 대수라고 대기업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그저 개인의 취향일 뿐인데 말이다. 그리고 지금 그 대기업 중 하나인 오비 맥주, 아니 오비 맥주의 최대주주인 다국적 주류 기업 AB 인베브는 또 다른 영국인인 고든 램지를 끌어들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솔직히 말해보자. 과연 카스 광고가 고든 램지라는 한 인간의 개인적 맥주 취향 고백이라면, 왜 우리는 이 광고에 술렁일까? 맛은 온전히 주관의 영역인데 왜 AB 인베브는 그를 카스 맥주 홍보의 적임자로 점 찍었을까?

진정한 주관, 나만의 취향

‘한국 맥주는 대동강 맥주보다 맛이 없다.’

아무리 맥주의 본고장인 영국 출신 기자의 기사라 하더라도 그의 의견에 공감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아무도 그의 기사에 주목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의 기사가 나오기 몇 년 전인 2009년에도 비슷한 취지의 기사가 실렸지만 그다지 큰 반응은 없었다. 하지만 2012년의 기사는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었다. 이것이 단지 북한의 맥주와 남한의 맥주를 비교하는 자극적인 수사 때문일까? 아마도 그뿐만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그 내용과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이 그 내용을 공론화할 수 있을 만큼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일개 유학생이, 아니면 외국 여행을 많이 다녀왔던 사람이 같은 내용을 말하는 것은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맥주의 본고장에서 온 영국인’이 ‘한국 맥주는 맛없다’는 인식을 공유했을 때야 우리는 비로소 그 ‘전문가 아닌 전문가’의 입을 빌려 자신의 취향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지금의 고든 램지 또한 마찬가지이다. 수십 년간 별 탈 없이 맛있게 먹어왔던 한국 맥주를 느닷없이 맛없다며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막연한 거부감이나 자신의 취향이 무시당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던 사람들의 마음을 정확히 대변해 주는 ‘전문가’가 고든 램지이다. 그의 입을 빌려서야 비로소 한국 맥주도 맛있고, 개인의 취향이니 존중해 달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인베브, 오비 맥주는 그런 우리의 욕구를 정확히 긁어주었을 따름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의 입으로 직접 말하지 못하고, 아니 말해도 별 소용이 없고, 전문가 혹은 외국인의 입을 빌렸을 때만 우리의 맥주가 맛있다, 혹은 맛없다는 취향을 말하는 것일까?

이것이 우리가 가진 취향의 허구성이다. 처음 와인을 마셔보는 사람에게는 취향이 없다. 대개는 누군가의 추천을 받아 마시기 마련이다. 로버트 파커의 별점도 참고한다. 와인을 마시고 또 마셔보았을 때 내가 좋아하는 와인을 정확히 알 수 있다. 그때야 누군가의 의견에 흔들리지 않고 그 의견을 참고할 수 있는 나만의 와인 취향, 즉 주관적 취향이 탄생한다. 우리는 과연 그런 주관적 취향을 가질 만큼 충분히 다양한 맥주를 마셔 보았는가? 대체로 아니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다양한 수제 맥주와 수입 맥주를 접할 수 있지만, 이코노미스트의 기사가 나왔을 2012년만 해도 외국에서 몇 년은 살아봤어야 이 맥주도 마셔보고 저 맥주도 마셔볼 수 있었다. 그러니 이코노미스트의 기자는 우리 입장에서는 적어도 수십 가지의 영국 맥주는 마셔보았을 ‘준전문가’였던 것이다. 나는 정말 보졸레 누보가 맛있었고, 나에게는 최고의 와인이었더라도 실은 프랑스에서는 보졸레 누보는 싸구려 와인라는 기사에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 매일 와인을 물처럼 마시는 프랑스인에 비교해 턱없이 적은 종류의 와인을 마셔봤을 텐데 무슨 자신감으로 나의 와인 취향을 운운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한국의 수제 맥주는 이제 시작이다. 한때 맥주의 불모지로 여겨졌던 미국의 수제 맥주의 점유율은 12.3%로 증가했다. 한국의 수제 맥주 점유율은 여전히 0.5% 내외이다 (2015년 기준). 불합리한 세금 체계로 인해 카스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세금을 내야 하는 수제 맥주의 현실은 수제 맥주에 대한 접근성을 크게 떨어트린다. 그 때문에 아직도 한국은 서로 다른 스타일의 맥주를 마음껏 섭렵해 볼 수 있는 환경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아이피에이가 좋아’ ‘나는 한국 맥주가 최고야’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맥주라는 거대한 코끼리의 다리만을 만져보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그리고 그 ‘맥주 코끼리’의 전부를 보았을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왜 어느 누구는 ‘맥주는 아이피에이야’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한국 맥주가 최고야’라는 하는지 저마다의 이유를 이해 할 수 있지 않을까?

맛에 대한 취향은 주관적이다. 그러나 그 취향은 우선 많은 경험이 바탕이 되었을 때에만 주관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영국의 기자, 혹은 고든 램지라는 영국 요리사의 입을 빌려야만 자신 있게 표현할 수 있는 취향은 ‘그들의 취향’이지 ‘나의 취향’은 아니다. 오롯이 자신의 경험과 주관에서 나오는 것만이 나의 취향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의 맥주 취향은 마치 처음 방문하는 지역의 맛집을 검색하듯 나와 비슷한 취향일 것 같은 전문가의 의견을 참고하는 정도의 단계에 가까울 것 같다. 만약 다양한 맥주를 섭렵하고 난 후에도 ‘한국 맥주가 가장 맛있다’고 느껴진다면, 이코노미스트 기자의 한국 맥주에 대한 평가나 고든 램지의 카스 광고 출연을 신경 쓸 이유가 있을지 모르겠다. 취향의 무게는 명성의 크기가 아니라 내가 들인 노력과 시간의 크기 만큼이니까 말이다.

 

참고문헌

  • 카스 광고’ 고든 램지가 먹은 ‘소고기 타르타르’는? … “한국인 술 많이 마셔”, 국제신문, 이민재
  • 고든램지 “카스가 한식에 가장 잘 어울리는 완벽한 맥주라는 게 셰프로서 솔직한 평가, 뉴시스, 김종민
  • Beer with Gordon Ramsey, Word of Mouth blog, the Guardian
  • Fiery food, boring beer, the economist, Daniel Tudor
  • National beer sales & production data, Brewers Association
  • 국내 크래프트 맥주시장의 현황과 전망, 산업기술리서치센터, 배효근
Tags:
음미하다

술에 대해 비슷한 추억을 가진 생물학자와 일러스트 작가가 만나 맥주에 대한 다양한 지식과 삶의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는 글과 그림으로 풀어가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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