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 착착 잘 맞는 여행 파트너를 만나는 것은 큰 행운 중에 하나다.
여행의 목적의식이 분명한 사람과 비교해 보면 나는 매우 무책임한 게으름뱅이일 수 있다.
여행지를 결정하고 난 후 가장 어려운 질문은 “거기 가서 뭐해?”라는 식의 질문이다.
나도 모른다. 거기에서 뭘 하게 될지.
일단 시작은 “뭘 먹으러 거기에 갈까?”로 시작하고, 이후 숙소를 예약한 후 나머지 것들은 대개 즉흥적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돌아온 이후에 “거기에서 뭐 했어?” 와 다르게 “거기 가서 뭐해?” 식의 질문은 내게 “어…… 그게…….”하는 답만 무한 반복하게 할 뿐이다. 그러다 보면 “그럴 걸 뭘 거기까지 가?”하는 반응이 나오게 되고 순서에 맞게 “그럼 말아.”로 귀결된다.
나와 죽이 잘 맞는 여행 파트너는 “일단 가 보고.”로 오케이 결정을 내는 대범한(?) 사람이 맞다.
나도 많은 사람이 열광하는 평양냉면을 좋아한다. 평양냉면 마니아들이 그렇듯 특정 식당을 딱 짚어서 이 집의 냉면을 좋아한다고까지는 아니지만 나는 간이 슴슴하고, 메밀 향을 구수하게 느낄 수 있고, 쫄깃한 식감을 가진, 후루룩 입에 넣어 오물거리며 씹을 수 있는 개운한 물냉면을 좋아한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말이겠다. 입안에서 다른 맛이나 식감에서 거슬리는 것도 싫어서 냉면을 먹을 때는 다른 반찬을 먹지도 않는다. 반찬이나 다른 음식들은 냉면 한 그릇을 다 먹고 난 다음에 입가심처럼 먹는다. 이것이 내가 냉면을 먹는 방식이다.
안타깝게도 비빔 냉면을 선택해서 먹는 경우는 거의 없다. 비빔 국수도 별로 안 좋아하고, 비빔 라면도 안 좋아한다. 비빔밥은 양념장을 거의 안 넣고 먹는다. 그렇다. 나는 맛이 강한 빨간 양념을 안 좋아한다. 매운탕도 안 좋아한다. 더 솔직히 말하면 고추장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다. 말해 놓고 보니 편식쟁이 같은데 편식쟁이는 아니다. 빨간 양념이 칠갑 된 음식을 안 좋아하지만, 그것을 배척하는 사람은 아니므로 기꺼이 이번 속초 여행의 주제는 동태 회무침이 올려진 ‘함흥냉면’이었다.
그런데 어머나! 숙소를 잡고 보니 가려고 했던 함흥냉면 집이 바로 숙소 건너 편에 있네.
이러면 기분이 엄청나게 째진다. 뜻밖에 행운이 차라락!
적어도 예약도 안 되는 식당에서 밥을 먹기 위해 땡볕에서 자리가 나길 기다릴 일이 없다는 점.
굳이 아침잠을 포기하지 않아도 오픈 시간에 맞춰서 바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특혜가 내게 주어졌다는 엄청난 행운. 이번 속초 여행은 확실히 의외의 뭔가가 짠! 하고 즐거운 반전을 줄 것이라는 기대가 생겼다.
물기가 없는 빡빡한 냉면에 골고루 양념을 묻혀서 비벼내는 건 나름 힘이 든다. 손가락에 쥐가 나는 줄 알았다. 찬 육수를 조금 부으면 좀 더 부들부들한 느낌으로 비빌 수는 있겠으나 나는 빨간 양념을 골고루 묻혀 먹는 비빔 냉면을 먹을 것이므로 손가락에 힘을 더 주고 박력 있게 빡빡 면을 비벼댄다. 생각보다 질기지 않은 면과 달짝한 양념 옷을 입은 냉면회는 감칠맛을 내며 입안에서 착착 감기는 맛이 있는데 진한 맛이기는 하나 자극적이지 않은 양념은 부담스럽지 않고 괜찮았다. 반 정도는 비빔 냉면으로 먹고 반 정도는 찬 육수를 부어 물냉면처럼 먹었는데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빡빡한 비빔 냉면이 나아 보였고 비빔 냉면에 육수를 부어 두 가지 맛의 냉면을 즐길 수 있다는 뭇 사람들의 말은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것으로 결론 내기로 한다.
속초로 떠난 나의 함흥냉면 기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실패라고는 할 수 없다. 비록 함흥 냉면 맛있네! 하며 감동을 하진 못했지만 나쁘진 않았다. 정말로 나쁘지 않았다. 비빔 냉면은 그대로 맛이 있었다. 맛있게 잘 먹었다. 그런데 평양냉면이 좋아, 함흥냉면이 좋아라고 묻는다면 나는 역시 평양냉면이 좋다고 말할 것이다. 속초에서 먹는 빨간 양념이 된 비빔 냉면은 맛은 있었지만 메뉴 선택권이 주어진 상황에서라면 나의 선택은 여전히 슴슴하고 맑은 국물이 있는 평양냉면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행의 재미라는 것은 참으로 예상하지 못한 데서 온다.
분명 함흥냉면이 주제였고, 냉면도 맛있게 먹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속초를 다녀온 후 기억에 가장 남는 것은 계획에도 없었고, 기대도 없었던 ‘씨앗 호떡’이었다.
숙소의 위치가 얼마나 기막히게 좋았는지 가고자 했던 냉면 집은 길 건너에 바로 있고, 걸어서 갈 수 있는 위치에 해변도 있었고, 차로 10여 분 거리에는 속초 중앙 시장이 있었는데 유명한 닭강정이며, 씨앗 호떡을 살 수 있다. 속초에서 유명한 닭강정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고, 닭강정의 유명세를 업고 나타난 것 같은 새우 강정은 복통과 설사를 안겨 주었다. 그리고 문제의 씨앗 호떡.
호떡을 좋아한다. 한 입 베어 물면 주르륵 흐르는 흑설탕 시럽, 바삭하게 구워진 외피. 이런 걸 좋아하는데 속초의 씨앗 호떡은 내가 좋아하는 요소가 하나도 없다. 이승기가 반한 맛이라고 난리를 피워도 그다지 눈이 안 가는 음식이었다. 구운 찹쌀 반죽 안에 해바라기 씨가 잔뜩 든 호떡이 맛이 있어 봤자라고 생각했는데 왜 내가 간 그 날은 하필이면 줄을 선 사람도 많은 편이 아니었고, 가격은 천 원밖에 안 했고, 군것질거리가 필요하기도 했고 해서 딱 한 개만 사서 나누어 먹자 했는데 이런.
한입 물고 ‘이거 뭐야?’ 한 생각이 들었다가 손안에서 점점 작아지는 호떡이 아쉬울 정도였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굳이 시장에 또 들러서 호떡을 일곱 개나 살 정도였다.
왜 싸구려 호떡 따위에서 짜고, 달고, 고소한 맛이 질서 있게 순서대로 착착 느껴지냔 말이다.
길거리 간식이라면 그 이름에 맞게 자극적인 맛으로 굵고 짧게 한 방에 끝내는 단순한 맛이 나야 하는 게 맞지 않느냔 말이다. 왜 천 원짜리 간식 주제에 은은하고 섬세하게 입안을 간지럽게 하는 맛으로 요염함을 뽐내는가 말이다.
보기에는 굉장히 단순하다. 반죽을 노릇노릇하게 굽는다. 일반 호떡보다는 살짝 부풀려진 듯 통통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잘 구워진 빵은 반으로 갈려지고 그 안은 해바라기 씨가 채워진다. 그리곤 종이컵에 담겨서 손님의 손으로 옮겨지면 끝이다.
그런데 이 별것 아닌 것 같은 호떡이 ‘단짠’의 공식을 아주 절묘하게 보여준다는 게 맛의 핵심이다.
호떡 겉면에 뭔가 반짝거리는 게 묻어 있어서 당연히 설탕이겠거니 했는데 설탕이 아니라 소량의 소금이다. 그러니까 먹는 사람은 호떡을 물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입술에 소량의 소금을 묻히게 되는데 이게 묘미다. 이렇게 묻는 소량의 소금은 반죽 안에 들어 있는 설탕의 단맛과 만나면서 단맛을 증가시킨다. 반죽 안에 든 설탕의 양은 정말 적은 양이어서 설탕이 들어 있는지 찾지 않으면 모를 정도다. 특히 일반적으로 흑설탕 시럽이 주르륵 흐를 정도의 설탕량이 익숙한 사람이라면 설탕이 들어 있지 않다고 생각할 정도인데 소량의 소금으로 이미 짠맛을 느낀 사람은 있는 듯 없는 듯한 설탕의 단맛을 대번에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그 정도가 기가 막히게 요염하다. 짠듯하게 달고, 단듯하게 짜다. 그리고 이후에 느낄 수 있는 해바라기 씨의 고소함과 바작바작한 식감. 그 식감을 감싸 안고 있는 쫄깃한 구운 찹쌀 빵의 식감까지. 이런 것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오는 게 아니라 질서정연하게 순서대로 하나하나 느껴지는데 이것이야말로 유레카를 외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꼼꼼하게 세운 계획에 따라 움직였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격의 행운.
사실 중앙 시장에 간 것은 저녁을 먹기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였는데 말이다.
나는 닭강정을 먹게 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어서 닭강정 계의 슈퍼스타인 만석 닭강정은 무슨 맛일까 싶었지만(그래서 중앙 시장으로 가긴 했지만) 정작 만석 닭강정은 굳이 시장 안까지 들어가서 살 필요도 없었다. (시장 안이 아니고서라도 속초 시내에 닭강정 판매점은 많다)단지 저녁을 먹기에는 모호한 시간을 좀 때워 보고자 들어간 시장에서 얻어걸린 씨앗 호떡의 기묘하게 질서정연한 맛의 퍼포먼스.
거기 가서 뭘 하면 돼? 하는 질문에 계획하고 기대했던 것들은 어차피 기대에 미치지 못해 실망할 때가 많으니 여행 중에 우연히 마주치게 될 행운을 믿어보라는 얘기를 차마 다른 사람들에게 할 수는 없지만(그러면 뭔가 무책임한 사람 같다.) 혹시 여행 준비를 엑셀 시트를 여는 것부터 시작하는 당신에게 여행이라는 것이 어차피 일상을 벗어난 시간과 사건을 즐기는 일인 만큼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주어진 시간을 가볍고, 자유롭게 하라는 얘기를 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