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정신을 모방하듯 언제나 ‘더 빠르고 더 높고 더 멀리 가는 것’만이 지상 최고의 목표라고 여겼던 내게 베이징에서의 한 때는 의구심만 불어나는 시기가 있었다.
물가가 저렴할 것이라는 편견과 다르게 서울에서의 물가와 다를 바 없는 현지 물가에 놀랐고, 저녁 8시만 되면 모든 식당과 레스토랑, 커피숍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영업을 마쳤을 때, 한 여름에도 뜨거운 물을 마시는 것이 좋다는 사람들과 편의점 냉장고에 들어있는 콜라조차 미지근하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그 당혹스러움이란 글로 표현이 안 될 정도였다.
오직 그 것 뿐일까. 창구마다 잡담을 나누는 직원들이 그득하게 앉아 있어도, 단 두 개의 창구에서만 느린 업무를 진행하고 있는 은행 직원들의 사고방식과 버스 정류장에서 긴 줄을 서는 필자 앞에 버젓이 새치기 하는 중년 부인의 뒷 태를 하염없이 바라만 봐야 할 때는 이것이 진정 문화 강국이라는 중국의 모습인지, 그것이 아니라면 단순한 문화 차이일 뿐인 것인지 의문을 가질 때가 많았다.
또, 폐쇄된 회의실에서 회의 도중 흡연을 하거나, 환자들이 가득한 병원 복도에서 조차 흡연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임산부가 탑승하고 있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흡연하는 배가 불룩한 중년 남자의 그릇된 배짱을 마주할 때는 나조차도 어찌할 수 없을 만큼 혈압이 치솟았음을 고백한다.
이처럼 글로 다 못 써내려 갈 만큼 많은 사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이징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이곳이 다른 어떤 곳보다 자유롭고 편안한 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긴 시간 베이징런(北京人)으로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기 이전, 필자는 서울 여의도에서 4년간 직장인 ‘코스프레’를 하며 20대 후반을 보냈다. 그리고 그 대가로 회사로부터 건내 받은 퇴직금 몇 푼을 기반으로 현지에서의 ‘무작정 살아보기’를 시작했다. 그 후 수 년째 베이징에서의 삶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이곳은 내게 여행보다, 생활에 가까운 동네였을 것이다.
그 몇 년을 보내는 동안 필자가 배웠던, ‘사치스럽지 않게, 그러나 품격있게’ 베이징런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가르쳐 준 그 곳을 소개한다.
◇ 여유로운 한 때를 즐기기에 안성맞춤
– ‘웨이밍후(未名湖)’
지난해 5월, 잠시 베이징으로 출장을 왔던 옛 회사 동기를 집으로 초대해 맛있는 저녁을 대접한 뒤, 시원한 커피 한 캔을 들고 오랜 수다를 나눴던 곳이다.
웨이밍후(未名湖), ‘이름 없는 호수’라는 뜻의 인공호수는 사시사철 변하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차마 그 이름을 누구도 명명할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필자의 집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는 웨이밍후는 인근의 위엔밍위엔의 부속정원으로, 베이징 대학 캠퍼스 서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혹자들은 이름 없는 호수의 전설에 대해, 중국 최고의 대학으로 불리는 베이징대를 거쳐 간 수 많은 지식인들이 명성보다 내실을 쌓으며 살아가길 기원하는 뜻에서 웨이밍후로 남았다는 설을 전하기도 한다.
대학 내에 자리한 호수에 대해 많은 이들이 극찬하는 이유는 인구 2천 500만의 대도시 베이징에서 웨이밍후만큼 도시인들의 접근성이 좋으면서, 편안하게 자연을 누릴 수 있는 곳이 없는 탓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주말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수 많은 관광객들의 인파에 휩쓸릴 우려가 있다. 혹, 호수의 진가를 느끼기 위해 방문을 예정 중인 여행객들이라면 주말을 피해 방문하는 것이 좋다.
타원형 모양의 호수 중앙에는 200여평의 인공 섬이 있고, 호수 바깥쪽으로는 수 백 그루의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특히 요즘처럼 따뜻한 봄 바람이 불어오는 날에는 편안한 운동화를 신고 웨이밍후를 둘러싼 산책로를 걸으며 사색을 즐기기에 더 할 나위 없이 좋다.
호수 주변에 조성된 산책로를 걷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약 40여분. 이 시간을 더 조용히 즐기기 위해서는 주말 오전, 오후를 피하고, 평일 오전을 이용해 호수 안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산책로를 따라 들어가는 것이 좋다. 산책로 안쪽으로 자동차가 출입을 금지한 조용한 곳은 언제 찾아가도 오직 자연이 선사하는 물소리, 바람 소리만 그득해 잠시 쉬어가기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베이징런들은 호수를 둘러싼 벚꽃과 개나리 사이 네모진 바위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거나, 책을 읽고, 음악을 듣거나 낮잠을 자는 이들이 상당하다.
이들의 모습을 보며, 간혹 한국에서 일분 일초를 다투며 바쁜 일상을 보냈던 한 때가 오버랩 되는대, 그 때마다 이 순간 호수 주변을 걸으며 사색할 수 있는 시간 자체가 내 인생 최고의 행복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사실 웨이밍후의 모습은 사시사철 조금씩 변한다는 점에서 그 매력이 배가 된다. 봄에는 꽃놀이를, 여름에는 화창한 나무들로 둘러 쌓인 씩씩한 남성적 모습을, 그리고 가을에는 한적하고 외로운 낙엽이 지는 모습으로, 겨울에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노는 스케이트장으로 변신한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수 많은 사람들이 웨이밍후의 변한 모습을 즐기기 위해 이곳을 찾곤 한다. 그리고 이곳을 찾는 베이징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필자가 그토록 감사하게 여기는 ‘삶의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이들의 풍모가 흠씬 느껴진다.
확실히 비싼 옷들을 걸치지 않았지만, 그들 나름의 삶의 여유를 즐기는 모습이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탓에 호수와 함께 어우러진 이들의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웨이밍후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눈부신 아름다움 탓에 이름조차 명명할 수 없었다는 그 뜻의 진짜 이유를 이제 조금씩 알아 가는 것 같다. 아마도 이곳을 찾은 사람들과 호수가 함께 빚어낸 고요하고 편안한 장면이 그 아름다움이 진가가 아닐까.
✈ 찾아가는 방법
·open : 365일 무휴, 입장료 없음
·metro : 베이징 지하철 4호선 ‘베이징대동문(北京大學東門)’ 하차 후 대학 동문 경비실에 신분증을 맡긴 뒤 캠퍼스에 진입할 수 있음. 규모가 제법 큰 캠퍼스 구경을 위해 동문 앞 사설 자전거 대여소에서 1시간에 20위안을 지불한 뒤 자전거 대여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