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 소설에서는 도시에서의 고독한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본 노르웨이의 숲은 장엄하고 눈부시다. 자전거를 타고 내려와 플롬에 도착한 후 가만히 서서 노르웨이의 숲과 피오르를 동시에 바라봤다. 나의 첫인상 플롬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자전거를 해당 장소에 정차해놓고 사람들과 인사를 한 이후, 마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산간의 작은 평지’라는 의미를 지닌 플롬은 아울란 피오르와 플롬 계곡의 산에 둘러싸여, 풍요로운 자연 혜택을 받고 있다.
[사진 001] 이곳에 플롬행 크루즈들이 들어온다.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기차가 정차하는 곳에 대부분 시설이 몰려있어서 반경 1km도 안 되는 지점에 있는 건물들의 위치 파악만 잘해놓으면 된다. 레저 스포츠의 도시인 만큼 곳곳에 카약, 작은 고무보트를 말하는 피오르 사파리 등을 즐길 수 있다. 기차의 종착역에는 2005년에 세워진 플롬 열차 길을 건설하는 노동자의 희생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그만큼 많은 건설 노동자들이 이 열차에 자신을 바쳤다는 방증이다. 역사 앞에 플롬 열차 건설노동자들을 기리는 조형물이 서 있다. 그 옆에는 당시 플롬 열차 건설을 지지했던 이 지역 시장 크리스텐센의 흉상도 세워져 있다.
[사진 002] 크리스텐센의 흉상
일단, 갈색빛 관광안내소에 들렀다. 몇몇 젊은 여행객들이 다음 일정을 의논하기 위해 먼저 와 있었고, 멕시코 청년과 나도 이곳 정보를 얻으러 들어갔다. 난 이미 숙소를 예약한 상태이고, 어디를 갈지 대략 정한 상황이라 관광 안내소 건물을 스캔하였다. 한쪽은 레스토랑이 문을 열었고, 다른 한쪽은 기념품 숍이 있었다. 가죽 및 동물의 모피로 된 관광상품이 즐비했다. 가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다시 나와서 마트 Coop에서 해먹을 식자재를 구입하고, 벤치에 앉아서 멍하니 피오르를 바라보고 있는데, 대형 크루즈가 정박하러 왔다. 이곳은 피오르 여행을 필수코스라고 할 수 있는 구드방겐행 크루즈가 하루에 몇 번 출항한다. 마을 한곳에 서 있는 작은 열차는 전시물이 아닌 관광버스라고 한다. 플롬 협곡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면서 플롬의 다른 지역을 약 45분 동안 안내한다고 한다. 작은 마을이지만 나의 3일을 채워 줄 만한 놀 거리는 충분했다.
[사진 003] 플롬 관광안내소
여행을 준비하면서 플롬 호스텔을 검색했더니 한곳이 레이더에 걸렸다. 플롬에 도착해서 관광 안내소 옆 도시 지도를 봐도 그곳 하나였다. 나중에 플롬 안쪽을 둘러보니 또 다른 호스텔이 보이긴 했다. 기차역에서 산 쪽으로 나 있는 플롬 강을 따라 걷다가 다리마저 건너면 그곳에 숙소의 간판이 보인다. 그곳은 호스텔뿐만 아니라 캠핑장이 있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숙소이다. 넓은 공간과 자연으로 인테리어한 곳인 만큼 호스텔 지역 안에서도 휴식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건물도 마음에 들고, 내부도 깨끗하며, 샤워실과 부엌은 따로 분리되어 바로 옆에 있는 건물에서 이용하면 된다.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는 부엌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으며, 북유럽다운 가구들로 채워져 있다. 노르웨이 작가 뭉크의 사진이 화룡점정. 단점이라고 한다면, 샤워는 유료인데, 10크로나를 투입하면 10분 동안 물이 나온다. 본의 아니게 10분 안에 씻는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 물론 추가 지급하면 계속 사용이 가능하다. 내가 묵었던 곳은 4인실이며 1박에 310크로네(한화 약 45,000원)이며, 1, 2, 4, 8인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카약 레포츠를 원하면, 호스텔 리셉션에서 시간에 맞게 신청하면 된다.
[사진 004] 플롬 호스텔 안내소
[사진 005] 수용인원 마다 여러 채의 숙소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배정된 방에 들어갔는데, 내부에 사람의 흔적이 없이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내가 누울 목이 좋은 침대를 선점한 후 샤워를 하려고 준비하는 순간, 한 명이 들어왔다. 20대로 보이는 여성 여행객이 들어왔고, 우리는 서로 인사를 하며 서로의 간단한 신상을 대화로 교환했다. 영국에서 온 케리라는 친구이며, 직업은 페인터이다. 유럽은 건물을 새로 짓거나 인테리어를 싹 바꾸기보다는 최대한 그 상태로 보존하고 색을 칠해 리모델링하는 문화가 발달하여 있다. 내가 살았던 아일랜드도 페인트공이 생각보다 많았다. 아일랜드는 주로 동유럽 사람들이 넘어와 이 일에 많이 종사했다. 페인트공 직업이 흔하고, 한국처럼 직업에 대한 편견이 상대적으로 적다. 20대 여성이 페인트공 일을 한다고 해서 사실 ‘왜 그 일을 하지?’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그녀는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이후 서로 이곳에 온 이유와 서로 좋아하는 것들, 그리고 서로의 나라에 대해 아는 것들을 탈탈 털어냈다. 대화를 마치고 정적이 흐를 때 즈음, 각자 하고자 하는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난 샤워를 하러 나왔다.
[사진 006] 노르웨이 대표작가 뭉크의 작품이 걸려 있는 부엌
샤워한 후 다시 마을을 둘러보러 나오는데, 호스텔 앞에는 로컬 푸드 체험을 하는 노점이 있었다. 시식도 하지만 주로 로컬에서 나는 고기로 음식을 만들어 파는 곳이다. 마침 출출하던 차에, 그곳에 서서 관계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먹고 싶은 고기(소고기, 양고기, 염소고기 등)를 고르면 바로 옆에 있는 그릴에 구워 즉석에서 제공한다. 내 기억으로는 우리 돈으로 약 20,000원 정도 지급하고 먹은 로컬 비프였다.
[사진 007] 노르웨이 로컬푸드 체험장에 몰린 관광객들
[사진 008] 로컬 고기와 빵으로 차려진 음식
플롬에는 세계적으로 유서 깊은 호텔이 있다. 프레타임 호텔 Fretheim hotel은 19세기 말 스위스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노르웨이의 유명 시인 페르 시블레 도서관이 있다.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한 시인이지만 그의 생전 소지품과 함께 작품집, 그와 호텔에 얽힌 일화 등을 접해 보는 것도 색다른 추억이 될 듯하다.
[사진009] 프레타임 호텔
산간지대로 들어가면 여러 하이킹 코스도 있으며, 산기슭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폭포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숙소 리셉션에 가서 2~3시간 정도 트레킹할 수 있는 코스를 문의했더니 브레케포센 Brekkefossen에 가는 방법을 가르쳐 줬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플롬에는 트레킹 코스가 열 군데가 있었다. 관광안내소에서 트레킹 코스가 담긴 지도를 받아보고 본인의 컨디션에 맞는 코스를 선정하면 된다. 브레케포센은 플롬에서 가장 운치가 좋은 폭포다. 이곳까지 가는 방법은 관광 열차와 도보가 있는데, 열차는 주로 어르신이나 아이가 있는 가족들이 승차해 이동했다. 도보 이동을 결정한 후 여정을 떠났다. 가는 길은 간단했다. 호스텔에서 나와 자동차가 나가는 도로로 걷다 보면, 이정표가 하나 나오는데, ‘Brekke’ 방향으로 틀면 된다. 이정표로부터 0.5km를 걸어보자. 걷다 보니 관광 열차가 보인다. 약속이나 한 듯, 서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사진 010] 브레케포센으로 가는 관광열차
도로를 걷다가 산으로 들어가는 브레케포센 표시판이 보이는데, 빨갛게 뿌려진 라카가 날 섬뜩하게 했다. 한낮인데도 으스스했다. 여기부터는 좀 가파른 길이다. 길도 완전히 정리된 것이 아니고, 빗물이 좀 젖어 있어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다리에 힘주며 올라갔다. 반대편에서 내려오는 관광객들에게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하냐고 물어봤더니, 대부분 거의 다 왔다며 날 동정 같은 위로를 했다. 오르면서 중간중간에는 방생하는 양과 염소들이 날 막기도 하며 반기기도 했다. 여기서 잠깐. 염소는 관광과 더불어 플롬 마을 사람들의 주요 수입원이다. 갈색을 띤 염소 치즈는 달콤하고 촉감이 좋아 여러 요리에 들어간다. 토마토 샐러드, 구운 연어 요리에는 물론 피자에도 빠지지 않는다. 흑염소 스테이크는 플롬 지역에서 선보이는 특선 메뉴다. 허브를 많이 써 누린내가 나지 않고 와인으로 오랜 시간 재워 육질이 부드럽다. 드디어 정상이 아닌 폭포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이미 와 있는 청년들은 이곳에 텐트를 치고 광합성을 즐기고 있었다. 숨어 있던 폭포는 흘린 땀을 바로 식힐 만큼의 물보라를 쳤다. 물보라 속에서 수줍듯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말이 필요 없는 이곳의 백미는 탁 트인 플롬 마을 전경이다. 피오르가 펼쳐진 플롬 마을을 보고 엄지를 치켜들지 않는 이는 없었다.
[사진 011] 브레케포센 폭포 앞에서
[사진 012] 가파른 길을 오른 후의 탁 트인 풍경
사실 내가 플롬을 가고 싶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노르웨이의 괜찮은 수제 맥주 펍을 찾다가 플롬에 정점이 찍힌 것이다. 바이킹 저택 같은 건물 내에서 플롬 협곡의 물을 사용해 직접 만든 맥주를 맛볼 수 있는 특권. 맥주는 8종류이며, 내부 장식도 바이킹 양식으로 분위기가 좋다. 좀 어둡긴 하지만, 술 마시고 조용히 이야기하기에는 적절한 조도인 듯하다. 1층은 펍이고, 2층은 레스토랑이며, 펍과 레스토랑뿐만 아니라 숙박 시설까지 갖춰진 곳이다. 피오르와 가까운 곳에 있어서 경치를 안주 삼아 마시는 데는 안성맞춤이다. 플롬 마을 안쪽에 양조장이 있다고 했는데, 일정상 못 가본 게 아쉽다. 물론 개인이 방문하려면 미리 연락을 해야 했는데, 다른 양조장 접선 때문에 에기르 브뤼게리 Ægir Bryggeri에 소홀했었다. 하지만 이 펍에서도 바 Bar 뒤쪽에 있는 탱크에서 제조하는 신선한 맥주를 바로 마실 수 있다. 바 앞쪽에는 맥주에 사용한 몰트와 홉이 진열되어 있다. 탭 비어로 마실 수도 있고, 병맥주도 판매하는데, 판매대에 직원에게 문의하면 된다. 나는 특별하게 마시고 싶다는 계획이 있어서 병맥주 2병을 사고 나왔다. 1병에 55크로네(한화 약 8,000원)이고, 직접 펍에서 마시면 1잔에 60크로네이다. 펍은 일요일에는 운영하지 않는다. 참고로 노르웨이는 일요일에 마트에서 술을 판매하지 않는다. 유럽은 나라마다 술 판매에 대한 규정들이 다르지만, 반드시 존재한다.
[사진 013] 플롬스브리가 Flamsbrygga의 정문. 호텔, 레스토랑, 수제 맥주펍을 운영한다.
[사진 014] Ægir Bryggeri 브루어리펍 내부 모습.
노르웨이에 입국하고 면세점에서 보드카를 골랐다. 특정한 한가지 브랜드보다 여러 가지 술이 샘플로 묶인 세트를 구입했다. 그리고 여행 중 내 몸이 필요로 할 때마다 꺼내 마셨는데, 플롬의 피오르 해안을 마주하니 차갑게 마시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원래 북유럽의 보드카는 차게 마시는 게 정설이니까…. 바로 숙소에 가서 남은 병을 들고 해안 안에 퐁당 넣어 홀로 여백의 풍류를 즐겼다.
[사진 015] 샘플 노르웨이 보드카를 차갑게 마시려 했다.
Norsk Aquavit. 아콰비트 Aquavit는 ‘생명의 물’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로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사람들이 즐겨 먹는 술이다. 우리나라의 소주와 비슷한 맛을 내며 감자를 주재료로 쓴 증류주다. 15세기 초에는 의약품으로 쓰였고 곡물로 만들다가 18세기에 감자가 유럽으로 들어오면서 감자로 아콰비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북유럽에 어느 나라를 가도, 아콰비트 Aquavit란 술이 있으며, 거기에 명칭을 좀 바꿔서 제조, 판매하고 있다. 알코올 도수는 보통 45도 이상이며, 달면서도 매운맛이 난다. 주로 무색의 투명한 색을 띠고 있고 옅은 노란색을 띤 것도 있다.
[사진 016] 대자연을 바라보며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의 취기가 돌 때쯤 복귀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가는 방법은 올 때와 같다. 플롬에서 뮈르달까지 열차를 타고 내려서, 오슬로행 기차를 기다려서 타면 된다. 역시나 이번에도 밤에 4시간 30분을 기다려야 한다. 조금이라도 저렴한 야간열차를 이용하다 보니, 이런 고생은 이제 고생 같지도 않다. 대신 내게는 술이 있기에… 저녁 7시 45분에 뮈르달행 열차를 타고 약 55분이 지난 저녁 8시 40분에 도착했다. 물론 돌아가는 길에도 중간에 여신이 춤추는 폭포에 5분 정도 정차하여 짧은 공연을 관람했다. 이번에는 “5분간 정차할 테니 사진촬영을 하시기 바랍니다.”라는 한국어 방송이 나왔다.
[사진 017] 뮈르달 역의 야경
문제의 4시간 30분. 이번에는 맥주병을 뮈르달 시냇물에 담갔다. 그리고 모자란 식수는 옆에 약수처럼 떨어지는 곳에서 받았다. 그렇게 바위에 앉아서 맥주가 차가워지는 걸 기다리는 중에 저 위쪽에서 현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염소를 끌고 내가 있는 곳으로 오고 있다. 플롬으로 갈 때와는 달리, 오슬로행 열차를 기다리는 지금은 함께 지내는 동료가 없던 차에 호기심이 생겨 얼른 달려 올라갔다. 염소와 아저씨들 모두 선한 인상으로 나를 환대했고, 오히려 나보고 뭐 하고 있느냐까지 했다. 저 멀리 가보지도 않은 한국에서 온 사람이 낯선 뮈르달 시냇가에 혼자 앉아서 맥주 마실 준비를 하고 있으니, 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좀 이상해 보일 듯했다. 내가 같이 한잔하자고 권했으나, 얼른 가봐야 한다며, 오히려 나보고 염소를 몰아보라고 제안했다. 어설프게 워~워 하며 염소를 모는 행동이 어설펐는지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아줬다. 여행의 마침표는 여기서 화룡점정이 찍혔다.
[사진 018] 뮈르달 역 근처로 내려가 차가운 시내에 맥주를 담갔다.
[사진 019] 내게 염소를 몰아보라는 뮈르달 청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