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들이기 버거웠다. 거대한 장관을 내 눈에 담기에는 아직 낯설다. 바이킹 민족인 만큼 자연경관도 웅장하다. 송네 피오르. 세계에서 가장 길고 깊은 피오르. 3일 동안 이곳에 발을 담가본다.
[사진 001] 마음 놓고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
노르웨이의 서부 지역은 특이한 지형이다. 약 100만 년 전에 빙하에 침식되어 형성된 해안선이 총 길이가 무려 20,000km나 된다. 이를 피오르 Fjord라고 한다. 피오르는 노르웨이어로 ‘내륙부로 깊이 들어간 만’이란 뜻이며, 말 그래도 빙하가 침식하면서 생긴 U자 혹은 V자형 계곡이다. 연안의 양쪽 벽이 가파르고, 연안 자체가 가늘고 길게 뻗어있다. 쉽게 말해, 빙하기 때 북유럽은 두꺼운 빙하로 덮여 있다가 세월이 지나며 빙하가 녹아 깨지면서 그 무게로 강바닥을 깎는다. 깎인 정도는 내륙 안쪽으로 갈수록 깊고, 바다와 인접한 곳일수록 침식력이 약해서 얕아지는데, 이 공간에 바닷물이 흘러들어 갔다. 이렇게 형성된 빙하 호수가 피오르다. 노르웨이에는 5대 피오르라고 불리는 관광지가 있는데, 예이랑게르 피오르, 노르 피오르, 송네 피오로, 하르당게르 피오르, 뤼세 피오르가 그것이다.
[사진 002] 피오르는 내륙쪽에서 바다쪽으로 갈수록 경사가 완만하다.
23:23. 거의 자정에 출발하는 열차. 이미 23시가 되었지만, 백야로 밖은 환하다. 온종일 오슬로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피로까지 등에 업은 채 오슬로 중앙역에 도착했다. 플롬은 어떤 도시인가. 도시이지만 세계적인 명성과는 달리 뜻밖에 작은 마을이다. 전체 인구라고 해 봐야 고작 500여 명이 전부다. 그런데도 플롬이 세계적인 여행지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는 것은 이곳이 피오르 여행의 대표적인 출발지이기 때문이다. 늘 여행자들로 붐비는 기차역,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페리 보트와 크루즈 선박, 가파른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 등은 작은 마을 플롬을 더욱 빛나게 한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이곳 플롬을 가리켜 `노르웨이 피오르의 심장` 또는 `아름다운 진주`라고 부른다. 피오르 여행의 가장 아름다운 출발지인 플롬. 이 마을이 오늘날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데는 플롬 철도의 영향이 매우 크다. 노르웨이 특유의 아름답고 웅대한 자연미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플롬 철도여행은 이미 오래전부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 여행 가운데 하나로 손꼽혀 왔다. 플롬에 도착하려면 뮈르달 Myrdal 역을 거쳐야 한다. 왜냐하면, 플롬으로 바로 가는 열차는 없기에, 베르겐행 열차를 타고 뮈르달 역에서 내려 플롬행 열차를 기다려야 한다. 오슬로~뮈르달의 열차는 여행 전 인터넷 예매를 통해 구매했으며, 편도 768크로네(한화 약 110,000원)이다. 현장에서 구매하면 900크로네 정도 되는 듯하다. 무인 매표소에서 예약번호를 입력하고 티켓을 받아 열차에 올라탔다. 야간열차다 보니, 이미 한 청년이 앉아서 잠을 청하고 있다. 나도 곧 저런 모습이겠지만, 최대한 눈을 부릅뜨고 창밖 풍경을 스캔하리라 다짐한다. 열차는 23:23에 출발하여 뮈르달에 04:37에 도착한다. 그리고 뮈르달에서 플롬으로 가는 열차는 09:39에 도착하니, 도착하고 5시간은 내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때 피로를 풀 것이라 계획하며 열차 좌석에 몸을 밀착했다.
[사진 003] 뮈르달역으로 가는 열차 안. 이미 골아떨어진 청년.
자정 무렵에 출발한 열차는 예상시간인 새벽 4:37에 도착했다. 백야를 처음 경험한 나로서는 어리둥절했다. 잠을 안 자고 창밖에 펼쳐진 노르웨이의 웅장한 자연을 만끽하려고 했으나, 피로에 짓눌러 잠이 들고 말았다. 혹 뮈르달에서 내리지 못할까 봐 맞춰놓은 휴대폰 알람에 깨고는 주위를 살펴봤는데, 동튼 아침인 거라. 하루가 지났지만, 어둠을 경험하지 못하는 진귀한 상황. 잠이 덜 깨서 이곳에 KTX인지 산악열차인지조차 헷갈렸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계속 잤으면, 베르겐까지 계속해서 갈 뻔했다. 물론 베르겐은 한국의 부산과도 같은 노르웨이의 제2 도시이긴 하지만, 여행이 계획과는 달리 틀어지면 멘탈에 무리가 올지 몰라서 말이다. 무사히 뮈르달 역에 도착했다. 866.8 Moh. 뮈르달 표시판 옆에 붙은 저 숫자는 무얼 의미하는 걸까? 설마 866.8m 고지라는 뜻? 물론 산속에 위치한 기차역이긴 한데… 가늠이 가질 않았다. 그리고 함께 내린 일행을 파악했다. 야간열차라 그런지 이곳에 내리는 일행은 나 포함 4명. 저 앞에 있는 청년 2명과 내 옆 벤치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멕시코 청년 1명, 이렇게 남자 4명만 덩그러니 기차역을 지키게 됐다. 멕시코 청년은 이런 기차 노숙이 익숙한지 이미 벤치에 몸을 뉘어 새우잠을 청하고 있었다. 이곳은 역장도 없으며, 기념품 가게와 카페도 문을 닫았다. 난 일단 왔으니, 뮈르달이 어떤 곳인지 알고 싶어 기차역 산장을 벗어났다. 나오길 잘했다는 건, 산장을 나오자마자 몸이 반응했다. 초여름이었는데도, 지금 뮈르달은 영하의 기운이 맴돌고 있다. 저 멀리 산 정상은 눈으로 얼어 있다. 기차역과 멀어지면서, 대자연을 홀로 품게 되었다. 기차역 주변에는 실제로 사는 주민의 집과 나와 같이 새벽에 열차를 대기하는 관광객들이 묵고 갈 수 있는 민박집 몇 채가 있을 뿐, 나머지는 있는 그대로다. 아무도 없는 저 시냇가에 추위를 잊고 손을 담가 물을 마셨다. (플롬행 열차를 기다리는) 5시간을 채우기에는 조금 역부족이었지만, 가만히 뇌를 쉬게 해주는 경험을 만끽해서 뮈르달이 특별했다.
[사진 004] 뮈르달 역.
[사진 005] 뮈르달 역을 벗어나면 작은 마을에 가까워진다.
드디어 열차가 도착할 시간이다. 맞은편에 있었던 청년 2명은 근처 숙소에서 자고 온 듯하고, 멕시코 청년은 출발 1시간 전에 일어나 나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코펜하겐에서 요리를 배우는 학생인데, 모처럼 시간을 내서 북유럽 투어 중이라고 한다. 한정된 대화 주제와 언어적인 한계로 인해, ‘어색-대화’의 리듬을 적절히 타는 순간, 기차 도착을 알리는 경고음이 울렸다. 이 열차는 9시 39분에 출발하여 플롬에 약 1시간 후인 10시 35분에 도착한다. 열차 안은 마치 탄광을 체험하는 듯한 아우라였다. 열차 안은 전체적으로 목재로 제작되었으며, 조금 불편할 것 같은 구식 스펀지 좌석에 조금 놀랐다, 이 열차는 자율좌석제라 선착순으로 자리를 맡으면 된다. 뭐 새벽에 타는 이는 4명밖에 없어서 그런 치열함은 없었다.
[사진 006] 플롬으로 가는 열차 안. 클래식한 구조의 열차.
먼저 이 플롬 열차 Flamsbana에 대해 알아보자. 1923년부터 건설이 시작되어 약 20년간의 난공사 끝에 완공되었다. 산악에 철길을 설치하는 공사인데도, 첨단 장비 없이 노동자들이 목숨 바쳐 공사를 했다고 한다. 나무로 설치한 터널을 보면, 그 투박함이 보인다. 뮈르달에서 플롬까지 총 11개 역과 20개의 터널이 있으며, 표고 차는 863m이고 최대 경사는 최대 55도에 이른다. 뮈르달 역 표시판에 적힌 866.8 Moh가 결국 863m 지점이었다. 최고속도가 시속 40km여서, 전체 거리가 20.2km인데도 운행 소요시간은 약 1시간이다. 열차가 지나는 플롬스달렌 Flamsdalen 계곡은 구불구불하고 험준한 산악지형과 깊은 협곡이 이어져 있어 천천히 운행할 수밖에 없고, 관광객들은 대부분 창문에 매달려 풍경을 눈 혹은 카메라에 담기 바쁘다. 이 산악열차는 5월부터 9월까지만 운행(하루 9~10회)하며, 겨울에는 안전상 운행하지 않는다.
[사진 007] 밖에서 바라본 플롬열차
열차는 서서히 출발했다. 가까스로 움직이는 듯한 소음에 순간 긴장했다. 이제 계속해서 내리막길로 내려가야 하기 때문에 브레이크도 적절히 가동한다. 열차가 출발하고 얼마 안 있어 역무원이 티켓을 검사하러 돌아다녔다. 나는 소지하고 있던 티켓을 넘겨줬지만, 맞은편에 앉아 있던 멕시코 청년은 현장에서 티켓을 구매하려고 값을 물었다. 생각보다 비싸서 그런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힘겹게 지갑에 손을 꺼낸다. 뭐 어쩌겠냐. 낼 건 내야지. 3분 후 Vatnahalsen 역에서 정차했다. 여기서 낯익은 손님들이 플랫폼에서 기다린다. 한국인 아줌마들… 오랜만에 만난 한국인 여행객이었는데, 참 부산스럽다. 내가 있는 칸으로 들어오진 않았다. 다행스럽게…
[사진 008] 뜻밖에 마주한 한국인 관광객들.
자리가 많이 남아서 양쪽의 창문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며, 산악지대를 탐닉했다. 공식 없이 굽이굽이 흐르는 협곡의 물줄기들, 누가 아무렇게나 꽂아 놓은 것 같지만 잘 정리된 나무들… 속력이 붙진 않았지만, 아찔한 계곡을 타고 내려가는 열차가 마치 롤러코스터 마냥 전율이 넘쳤다. 그렇게 내려온 지 20분가량이 지나, 난 신세계를 만났다. 엄청난 굉음을 내며 흐르는 대형 자연 폭포가 내 눈앞에서 자랑스럽게 시연을 보이는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열차는 그곳에서 정차했다. 바로 안내방송이 흐른다. 때론 열차 안에 한국어로 안내방송을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열차에 탄 관광객들에 따라 그때그때 다른지 내가 탈 때는 한국어 방송이 없었다. 아까 대거 한국 아주머니들이 탄 걸 봤는데… 아무튼 방송을 들어보니 이 폭포 앞에서 10분 정도 정차할 것이며, 그동안 관광객들은 폭포를 감상하라고 공지한다.
[사진 009] 열차가 멈추고, 우리는 위대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효스포센역 Kjosfossen Station은 뮈르달에서 4.4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곳으로 93m 높이의 웅장한 폭포 효스포센 Kjosfossen으로 유명하다. 이 광경은 스쳐 지나가기에 아까운 노르웨이의 관광자원이라, 아예 이곳을 정차 지역으로 지정하고 약 5~10분 동안 폭포를 감상하는 관광 코스가 되었다. 엄청난 물보라 때문에 옷에 물이 젖어도 그 웅장함에 화도 낼 수 없다. 평소 여행지 앞에서 사진 찍는 것을 꺼렸지만, 이곳은 다르다. 얼른 옆 사람에게 부탁하여 폭포를 배경 삼아 사진 한 컷을 남겼다. 그리고… 어디선가 음악이 퍼져 나온다. 뉴에이지 음악처럼 현장 분위기를 묘하게 만들었다. 갑자기 관광객들이 한곳을 손가락으로 지정한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폭포의 오른편에서 붉은 색 옷을 입은 여인이 나와 춤을 춘다. 노르웨이 목동들의 전설 속 요정인 훌드라 Huldra를 재현하는 춤 공연이 펼쳐진다. 순간 난데없이 저 여인의 안위가 궁금했다. 매번 열차가 도착할 때마다 저렇게 나와 춤을 추는 것도 신기했고, 어디서 거주하는지도 의문이 들었다. 허술하게 지은 돌로 된 집에서 사는 것인지…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여인은 노르웨이 무용과 여대생들이 아르바이트로 하는 일이라고 한다.
[사진 010] 효스포센 Kjosfossen 폭포 앞.
다시 안내방송이 나오고, 관광객들은 일사불란하게 열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아까부터 내 앞에 있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고등학교 선생님과 학생들이 여행 온 모양새였는데, 몇 번 눈이 마주쳐서 눈인사하다가 그 선생님 같은 분이 나와 멕시코 청년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본인은 사이클링 레포츠 안전요원인데, 혹시 관심 있으면 같이 자전거를 타지 않겠냐는 거다. 순간 우리는 얼마냐고 물었는데, 웃으며 “FREE!”라고 대답한다. 재차 물어봐도 같은 대답이었다. 오늘 신청자 중 못 온 친구들이 많아서 어차피 자전거가 많이 남기에 제안한 것이라고 부연설명을 했다. 그래서 멕시코 청년(생각해 보니 이름도 잊었다. 자꾸 멕시코 청년이라고 할 수밖에)과 나는 플롬에서 내리지 않고, 도착 시간 20분 전인 Berekvam이란 역에 내렸다. 고등학생들과 멕시코 청년과 함께 나는 내게 맞는 자전거와 안전모 등을 챙겨서 간단한 교육을 받은 후 줄줄이 내려갔다. 내리막길이어서 페달을 밟을 수고도 거의 없었다. 저 에메랄드색 바지 입은 애가 어젯밤 함께 기차역에서 노숙했던 멕시코 청년이다. 그렇게 삼삼오오 내려가다가 사진도 찍으면서 내려가는데, 또 진귀한 장면이 포착됐다. 실제 양치는 소년과 양들을 마주하게 됐다. 생각보다 양치기 소년은 잘생겼다. 그렇게 자전거를 타고 플롬에 도착했다.
[사진 011] 사이클링 레포츠 요원의 추천으로 열차에서 내려 사이클로 갈아탔다.
[사진 012] 열차 내내 함께 했던 멕시코 청년
[사진 013] 다이내믹하게 내려오면서 인증샷
[사진 014] 실제로 처음 본 양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