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1] 빈 국립 오페라 하우스. 도심 중심에 있으며, 오페라를 즐기려는 관광객들의 핵심 코스이다.
5년 전, 국내 도보 여행을 하다가 한 직원과 친분이 생겼다. 누가 봐도 한국인이었는데, 태생이 오스트리아라고 했다. 그 당시만 해도 내게 오스트리아는 변방 국가라서 아무 정보가 없다 보니, 그녀를 특이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런 이국적임(?)에 이끌려 관심이 갔지만, 그녀는 곧 오스트리아로 떠났다. 그때만 해도 난 유럽 여행을 가본 적도 없을뿐더러 내 평생 오스트리아에 족적을 남길 거란 상상도 못 했다. 세월이 지나서 난 유럽 여행 중이었고, 체코 브르노 지역을 머물던 중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바로 가까이에 빈이 있으니 놀러 오라며… 구글 지도로 확인해 보니 진짜였다. 심지어 열차로 2시간 거리. 사실 다음 여행 나라는 다른 곳이었다. 찰나의 선택이 탁월한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괜한 사심이 동해서일까. 빈을 검색하면서 내 소중한 영화 타이틀과 마주했다.
[사진 2] 영화 비포 선라이즈 포스터.
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 1996년에 개봉했으니, 벌써 20년째다. 20대의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영구 보존된 이 영화를 현장에서 추적해 봤다. 이 영화의 주 무대가 바로 오스트리아 빈이기 때문이다. 영화 -비포-시리즈의 서막을 알리는 영화(그 이후 <비포 선셋>(2004)과 <비포 미드나잇>(2013)으로 이어짐). 20년이 지나 박제가 되었을 법한 그 온기를 박박 긁어 느껴보려고 영화 속 레코드 가게에 들렀다. 알트&누 ALT&NEU. 영어로 표현하면 Old&New이다. 아직도 수많은 LP판이 수북이 쌓여 있으며, 이제는 관광객보다는 음악 골수 팬들이 이 가게를 찾는다. 극 중 남녀 주인공은 이 레코드 가게에서 스멀스멀 사랑을 꽃피우기 시작한다. 상대를 쳐다보는 장면이 교차 편집되면서 시작되는 장소. 아주 달곰한 시점에서 등장한 가게인 만큼 놓치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이 장면을 최고로 꼽기도 한다. 이 레코드 가게의 영업시간은 생각보다 짧다. 평일은 13시부터 18시까지며, 토요일은 10시에서 2시간 동안만 영업한다. 일요일은 휴무인데, 그 사실을 모르고, 왠지 일요일에 가야 낭만적일 거란 생각에 찾아갔다가 1차 허탕을 치고 왔던 기억이 난다.
[사진 3] 알트&누 ALT&NEU 레코드숍 앞.
[사진 4] 오래된 LP판이 많은 레코스숍 안.
[사진 5] 영화 속 레코드숍 장면.
비엔나커피의 존재가 의심스러웠다. 카페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90년대, 그 시절 카페에 가면 먹을 수 있었던 비엔나커피. 좀 더 화려한(?) 음료를 원한다면, 웨하스 과자와 우산 장식으로 여심을 자극했던 파르페. 아무튼 그 시절의 비엔나커피의 잔상은 거의 남지 않았지만, 그 비엔나커피의 중심에 왔다. 이 영화를 보면서 다시금 비엔나커피의 동경이 진했다. 빈은 카페의 도시다.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빈은 카페에 둘러싸인 도시다’라고 했을 정도로 빈 중심가에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커피전문점이 1,200여 개나 성업 중이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140년 역사의 카페 챈트랄이다. 그다음으로 유명한 카페가 바로 ‘카페 슈페를’ Cafe Sperl이다. 다시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꺼내본다. 두 연인의 손가락 전화 씬으로 유명한 장면이 바로 이 카페에서 이뤄졌다. 이 카페는 영화 이전부터 유명했다. 1880년에 오픈해서 135년이 흐른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20년이 지났지만, 영화 속 인테리어는 지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소파의 시트도 그대로인데, 그리 낡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만큼 관리가 철저했다고 결론을 지을 수밖에 없다. 내부 인테리어는 클래식하며 고풍적이다. 내가 고른 메뉴는 빈 고유의 커피인 멜랑지 Melange 커피. 여기서 잠깐, 비엔나커피는 카페 아메리카노 위에 휘핑크림을 올려 만드는 메뉴이다. 그런데 빈에는 정작 비엔나커피가 없다. 비엔나커피의 본래 이름은 아인슈패너 커피 Einspanner Coffee이다. 마차에서 내리기 힘들었던 옛 마부들이 한 손으로는 고삐를 잡고, 한 손으로는 설탕과 생크림을 듬뿍 얹은 커피를 마신 것이 오늘날 비엔나커피의 시초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진 6] 카페 슈페를 앞.
[사진 7] 카페 슈페를 카페 안.
[사진 8] 카페 슈페를 카페 안.
[사진 9] 영화 속 카페 슈페를 장면.
[사진 10] 영화 속 카페 슈페를 장면.
빈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인 케른트너 거리 Kerntner Strasse에 당도했다. 이미 난 에단 호크로 빙의한 상태(자아도취)였고, 줄리 델피로 ‘강제 빙의’될 그녀를 만날 시간이 다가왔다. 걷는 동안 온갖 해피엔딩 시나리오들이 떠올라, 첨삭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거리를 걷는 내내, 고전과 현대가 교차하는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으며, 이 모든 것도 내 해피엔딩 시나리오에 포함됐다. 이게 뭐라고. 그저 상상만으로도 이미 아드레날린이 충분히 분출됐다. 저만치에서 웅장한 그 무언가가 눈에 들어온다. 슈테판 대성당 Stephan Cathedral. 걸어오면서 그렸던 로맨스는 사라지고 눈앞에 우뚝 솟은 대성당 기운이 밀려 들어왔다. 그 와중에 그녀가 시선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내가 이미 이 성당에 영혼을 맡긴 표정을 인지하곤, 그녀는 인사와 함께 이 성당을 소개했다. 빈의 상징이며, 세계적인 음악가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을 거행했던 곳이라고 설명하는데… 결혼식이라… 나도 그녀와 여기서 결혼식을? 허풍과 자의식의 무한 팽배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물론 그 감정은 그녀와 만나는 내내 드러나지 않았고, 내가 쓴 시나리오는 오픈 결말을 지으며 다음 편을 기약해야 했다.
[사진 11] 케른트너 거리.
[사진 12] 케른트너 거리.
[사진 13] 슈테판 대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