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제주 여행을 계획하고 난 이후 들었던 말들을 정리해 보면 세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기상 악화로 비행기 연착이 자주 일어난다.
여행 가서 있는 동안 내내 흐리고 비만 왔어.
혹시 고사리 체험할 거면 장비는 다 빌려줄게.
4월 중순에서 5월 초 제주에는 유난히 비가 많이 오는데 이를 두고 ‘고사리 장마’라고 한단다.
그리고 유독 습한 이때 고사리가 쑥쑥 잘도 올라오니 실제 고사리가 무리 지어 있는 곳을 지나기라도 하면 신선하고 알싸한 생고사리 향이 축축한 흙냄새와 함께 올라와 이때의 제주는 고사리가 지천인 것만은 확실하다.
재미있는 것은 고사리가 많은 곳에는 경고문이 붙기도 한단다. 고사리를 채취하는 사람들이 땅만 보고 깊은 숲으로 들어가서 길을 잃는 경우가 생겨서 그렇다고 하니 고사리 홀러들도 꽤 많은가 보다. 그래서 일부는 각자 호루라기를 갖고 다니기도 한다고.
4월 중순에서 5월 초는 상춘객이라는 이름으로 여행 다니기는 딱 좋은 시기인데 한반도 대표 여행지인 제주 날씨가 이러하다니 기가 찰 노릇이겠지만 제주는 그 이름만으로도 육지와는 다른 이국적인 정서가 물씬 느껴지는데 육지에서는 들어 본 적이 없는 ‘고사리 장마’라는 말을 듣는 순간 확실히 제주는 제주만의 독특한 환경과 문화를 가지고 있는 곳이구나 싶었다.
제주는 굉장히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제주에 대해 가장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올레길’이었고, 최근에는 아주 감각적이고 예술적인 이주민들의 삶이 이슈가 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로,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제 삶을 찾아 떠나는 유토피아 같은 공간으로 제주는 변화하고 있는 듯하다.
내게는 한 20년 전만 해도 제주는 그냥 낯설고 먼 곳이었다.
고립된 곳, 부모님 세대의 신혼여행지, 유채꽃밭, 동남아 여행지보다 재미는 없고, 물가는 비싼 곳, 역사적 인물들의 유배지, 돌담, 해녀 등.
대학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제주도에서 왔다고 하는 동기를 봤을 때 모두 그 녀석의 이름을 궁금해하기보다 ‘제주도에서 온 애’로 부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녀석 이름은 생각이 안 난다.
이후 약 10년 전 즈음 제주를 주제로 문화예술 행사를 기획하는 세미나에서도 참석자들은 ‘제주 = 관광지’라는 공식을 벗어난 논의는 하지 못했으니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얼마나 진부하고, 아둔한 모임이었는지 새삼 부끄럽기까지 하다.
봄 날씨는 워낙 변덕스럽지만 봄 여행을 제주로 계획했다면 고사리 장마가 있는 제주 날씨에 대해서는 동남아 같은 쨍한 햇빛에 대한 기대는 일단 버리는 것이 좋겠다.
다들 기대하는 것이 제주는 남쪽이니까 육지보다는 따뜻할 것이고,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휴양지에서의 이미지가 떠오르면서 제주 역시 맑은 하늘과 강한 햇빛의 남국의 날씨를 기대하게 된다. 아마 대부분의 육지 관광객들이 제주 여행을 기대하면서 갖게 되는 환상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비가 잦은 이 계절에 기대할 수 있는 몇 가지는 있다.
1, 거센 비바람에 반응하는 거친 파도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월정리 카페에서의 하루.
2, 비가 그치고 난 직후 가장 싱그러운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려니숲 길.
3, 한껏 수분을 머금은 후 봉오리를 터트리고 향기를 뿜어내는 감귤나무 꽃향기.
4, 차창을 열고 달리는 드라이브 길에서 맡게 되는 축축한 흙냄새와 알싸한 생고사리 냄새.
5. 넓은 초원에서 풀을 뜯는 어미 말과 망아지들의 무리.
이것들은 내가 겪은 봄철, 약 보름 동안만 즐길 수 있는 날 것 그대로의 제주의 정수이다.
제주를 여행하는 많은 사람이 렌터카를 이용하는 것만큼 제주의 렌터카 업체는 매우 다양하다.
제주 공항에서 직접 마중과 배웅 서비스를 하는 업체를 이용하면 제주를 들고나면서 공항을 이용할 때 확실히 편리하다.
이 시기 제주의 기상 상황은 매우 변덕스럽기 때문에 항공기의 지연이 빈번하다. 이 때문에 마중 서비스를 하는 업체와 항공기 운항 시간에 대한 소통이 필요하다. 내가 탄 비행기가 지연 없이 출발했다고 할지라도 도착지의 공항 상황에 따라 착륙 시간은 달라질 수 있으므로 비행기 출발 직전에 앞선 항공 상황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와 함께 업체에 전달하면 시간상의 착오를 줄일 수 있다.
그리고 차를 인도받기 전 차량의 확인 작업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특히 비가 많이 오는 시기에 여행하기로 했다면 다른 무엇보다 타이어 점검이 필수적이다. 더불어 한 가지 주의점을 덧붙이자면 타이어는 보험 사항에 포함되지 않는다. 업체의 관리 소홀로 타이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 이상 보험 회사의 긴급 호출 비용부터 시작해서 타이어 교체 비용에 이르기까지 고스란히 사용자가 부담해야 한다.
자동차 인수 전 차체를 확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타이어의 마모 상태 등을 확인하는 것은 필수적으로 사용자가 꼼꼼히 챙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즐거운 여행길에서 당황스러운 상황을 마주할 수 있다.
나는 분명히 여행 운이 좋았다. 여행 동안 비가 온 날은 하루 반(혹은 이틀)뿐이었다.
나보다 일주일 전에 제주에서 일주일간 지낸 H 언니는 제주에 있는 내내 비가 오거나 매우 흐린 날의 연속이었을 뿐만 아니라 돌아오는 날도 기상 악화로 6시간 이상을 제주 공항에서 대기를 해야 했다고 했고, 내가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온 후부터 제주는 다시 기상 악화가 시작되어 항공기 지연 뉴스가 연일 계속됐다.
장마로 제주 여행 때 고생을 한 사람은 내가 얄미울 수도 있겠으나 온종일 비가 오는 날은 마침 미리 제주 CGV에 미리 영화 예약을 해 놓은 날이었으니 고사리 장마라는 이름에 걸맞게 비바람이 치는 날 오후에는 월정리 바닷가 카페에서 느긋하게 거친 파도를 감상했고, 저녁에는 마블사의 영화를 봤다. 이 얼마나 절묘한 행운인지!
여행이라는 게 그렇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만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계획한 것들은 생각대로 실행되지 않는다. 그러면 뭔가 알찬 여행을 못한 것 같은 찝찝한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나는 그다지 계획적인 사람이 못 되기도 하지만 나의 여행은 계획이라는 게 없다. 아주 최소한의 일정만 정해져 있을 뿐 나머지는 상황에 맞춰 움직일 뿐이다.
비가 오는 날은 비가 오는 날을 즐긴다. 어차피 책은 한 권씩 가져갔으니 일상과 다른 풍경 속에서 책을 읽어도 좋고 멍하게 앉아서 죄책감 없이 스마트 폰에 집중해도 좋다. 한껏 게을러도 좋은 것이 여행 아닌가?
비가 오는 날, 평소 파랗고 높은 하늘과 잔잔한 파도가 무척이나 고요한 풍경에서 잔뜩 멋을 낸 사람들의 포토존으로 활용됐을 월정리 바닷가는 SNS에서는 본 적이 없는 새로운 바다의 모습을 선보였다.
고정되지 않은 것은 모두 날려 버릴 것 같은 바람과 이에 합을 맞춰 일렁이는 파도. 그리고 회색빛 하늘.
멋쟁이 셀카족들은 다 어디에 있나요? 이날만큼은 남의 카메라에 혹시라도 얼굴이 걸릴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날이었다.
숲길을 산책하기 가장 좋은 시간은 아침 이슬이 사뿐하게 내린 새벽 시간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나도 안다. 다만 나는 그 시간에 맞춰 일어나기가 힘 들 뿐이다.
이슬을 먹고 그날 막 자라나온 듯한 새 풀의 뽀얗고 싱그러운 모습과 축축해서 푹신하게 밟히는 땅의 느낌과 상쾌한 공기에서 느껴지는 풀냄새. 이런 것들이 숲길 산책의 정수이지 말이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비 오는 제주를 여행 중이라면 비가 그친 바로 직후에는 다른 일정은 미루고서라도 반드시 사려니 숲을 가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새벽이 아니어도 새벽에 느낄 수 있는 숲이 주는 선물을 받을 수 있다.
‘사려니’라는 말은 ‘신성한 곳’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숲길을 조용히 걷다 보면(비가 온 직후라 확실히 방문객의 수가 적어 한적한 시간을 즐길 수 있으니 이는 일거양득이라 할 수 있다.) 앞만 보고 속도를 내서 걷는 평소와는 다르게 주변에 있는 나무와 풀들에 눈길이 가게 되는데 흔히 볼 수 없는 사려니 숲의 자생 식물 중에는 희한한 모양과 색을 가진 식물들이 많다. 예를 들면 마치 안스리움 같이 생긴 식물인데 꽃받침의 색깔이 안스리움처럼 유혹적인 빨강이나 노랑, 초록이 아닌 아주 어두운 까만색인 독초 같은 경우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식물인가 싶어 손이라도 댔다간 대번에 피부가 가렵고 부어오른다니 신성한 곳의 생명은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된다.
한바탕 내린 비로 공기가 가벼워진 느낌이 들면 창을 열고 드라이브 길에 나서는 것도 좋다. 피부로 느껴지는 서늘한 바람이 나쁘지 않다. 그리고 낯선 단향이 문득 나는데 도대체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그러다가 카페 야외 자리에 앉아 있을 때 그 달큰하게 나던 향내가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어찌보면 제주이기 때문에 당연한 냄새일 수도 있는 감귤나무 꽃향이었다.
강릉에 본점을 둔 박이추 선생의 카페 테라로사가 제주(서귀포)에도 문을 열었는데 전에 있던 감귤나무 밭을 그대로 카페 정원으로 삼고 있어 카페 테라스 자리에 앉아 있으면 마치 감귤 나무 밭에 테이블을 하나 빌려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4월~5월에 내리는 제주의 고사리 장맛비는 고사리만 아니라 감귤나무 꽃봉오리에도 통통하게 향이 차게 한다. 좋은 시기를 만난 덕에 섬의 바다 냄새, 해산물 냄새 외에도 축축한 흙냄새, 알싸한 생고사리 냄새, 달큰한 감귤나무 꽃냄새 등 제주는 향으로 가득하다.
제주에서 말을 보는 건 흔한 일이다. 며칠을 제주에서 보내다 보니 풀 뜯는 소를 보는 게 더 신기하더라. 내가 묵은 집에서는 아침에 말 울음 소리가 기상 알람일 정도였다. 육성 목장이 아닌 곳에서도 한, 두 마리 자마를 키우는 집들도 꽤 있어 보였다. 초지에서는 특별할 것도 없이 말들이 풀을 뜯고 있다. 그리고 다른 계절과는 다르게 어미 말 옆에 딱 붙어 있는 올해 태어난 망아지(당세마)도 볼 수 있다. 갓 태어난 망아지를 본 적이 있는가? 멀리서 보면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다리가 길다. 마치 사슴 같다. 긴 다리와 아직은 살이 다 오르지 않은 마른 몸과 가는 다리. 대부분은 엄마 곁에서 졸듯이 앉아 있지만 뭔가 신이 났다하면 제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신나게 팡팡 뛰기 시작하는데 그 모습이 정말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귀엽다.
말들은 생각 외로 사람을 잘 따른다. 그리고 말들은 절대 먼저 위협적이지 않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조심해야 하는 때가 어미 말과 망아지가 함께 있을 때다. 망아지가 귀엽다고 절대 다가서면 안 된다. 제 자식을 지키려는 어미 말의 공격도 조심해야 하지만 설사 어미 말이 무관심한 상황일지라도 망아지는 말 그대로 아기 말이기 때문에 호기심과 장난의 정도가 도를 넘는다. 제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망아지가 자기를 향해 다가오는 사람을 향해 반갑다고 펄쩍 뛰다가 망아지의 몸체에 스치기라도 할 때 사람이 받는 충격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
나는 말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봄철 제주 여행의 이유 중 하나로 그 해에 태어난 망아지를 보고 싶다는 이유가 포함이 됐었는데 이번 여행은 그런 바람이 아주 잘 실현된 여행이지 싶다. 망아지들은 아주 쑥쑥 자라기 때문에 봄이 지나고 나면 그해 태어난 망아지라고 할지라도 사슴같이 여린 모습은 볼 수 없어진다. 봄 제주의 아름다움에 갓 태어난 망아지가 초지에서 뒹구는 모습을 빼고서는 얘기할 수가 없지 않나 싶다.
고사리 장마로 이야기 되는 봄 제주. 단지 비가 잦다는 이유로 여행이 불편한 때라고 단순히 평가될 수는 없는 제주의 멋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