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와인을 마셔오면서 가졌던 가장 큰 편견은 ‘스위트 와인은 맛이 없다’는 것이었다. 강렬한 단맛은 부족한 풍미를 가리기 위한 트릭이고, 끈적한 당도가 혀를 마비시켜 곁들이는 음식의 맛조차 제대로 느낄 수 없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스위트 와인은 디저트류와 페어링하면 잘 어울린다지만 달달한 디저트의 짝꿍은 누가 뭐래도 짙은 에스프레소나 아메리카노라고 철석같이 믿어왔다. 굳이 단 와인을 마셔야 한다면 안주 없이, 그 자체를 ‘디저트’로서 맛봐야 한다고.
하지만 와인 공부를 시작하면서, 또 소테른을 마셔본 이후로 생각이 달라졌다. 와인을 달콤하게 만드는 방법도, 또 그렇게 만들어진 와인의 개성도 다양했고 어울리는 음식의 폭도 생각보다 넓었다. 오늘은 단맛을 응축하는 방식에 따른 스위트 와인의 종류와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페어링에 대해 살펴볼 예정이다. 이제 제법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꽁꽁 언 속을 녹이는 데는 적당한 알코올과 달달함만 한 게 없으니까.
진균이 만들어낸 달콤함, 귀부 와인
더 이상 미래의 일이 아니게 된 기후변화, 그리고 포도나무를 말살하는 병충해. 전 세계의 와인 메이커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아마 이 둘이 아닐까 싶다. 19세기 후반 창궐한 필록세라(Phylloxera: 포도나무 뿌리에 기생하며 수액을 빨아먹는 진딧물)는 유럽의 포도밭을 황폐화시켰고, 전 세계 와인 생산의 지형도를 바꾸어 놓았다.
그럼 포도나무에 빌붙어 사는 모든 생물은 포도와 와인에 악영향만 미치는 걸까? 꼭 그렇지는 않다. 포도에 기생하는 진균의 일종인 ‘귀부균(Botrytis Cinerea)’은 독보적으로 우아한 스위트 와인, ‘귀부 와인’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존재다. 이들 귀부균은 포도 알맹이에 달라붙어 당분은 그대로 두고 수분만 빨아들인다. 귀부균에 감염된 포도에서 농밀한 단맛의 와인이 탄생하는 원리이자, 고귀한 부패(Noble Rot)의 과정이다.
귀부와인의 대표주자로는 프랑스 소테른(Sauternes), 헝가리의 토카이(Tokaji), 독일의 트로켄베렌아우스레제(TBA: Trockenbeerenauslese)가 있다. 소테른은 세미용(Sémillon) 100% 혹은 세미용과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 무스카델(Muscadelle)을 블렌딩해 만들어지고 토카이는 푸르민트(Furmint), 트로켄베렌아우스레제는 리슬링(Riesling)이 그 재료다.
Pairing: ‘귀부와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소테른은 꿀 같은 녹진함, 열대과일의 화려함, 생강 아로마에서 오는 스파이시함, 단맛에 질리지 않도록 밸런스를 잡아주는 적당한 산미가 특징적이다. 널리 알려진 페어링 상대는 푸아그라. 푸아그라를 한입 먹고 소테른을 머금으면 입안에서 리치함이 폭발한다. ‘단짠’의 매력이 있어 달달한 거+달달한 거의 조합을 못 견디는 사람들에게 특히 매력적인 페어링이다. 로크포르(Roquefort) 등의 블루치즈도 같은 맥락에서 잘 어울린다.
소테른과 푸아그라는 샤블리와 굴만큼이나 공식적인 조합이 되었지만, 동물 학대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푸아그라가 꺼려질 터. 그렇다면 샤토 디켐(Château d’Yquem) 마케팅 디렉터 장-필립 르무안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보자. 2017년 방한한 그는 한국의 와인 애호가들과 함께한 세미나에서 ‘로스트 치킨과 프렌치프라이에 디켐을 곁들여 마시는 것이 소테른 지역에서는 일반적’이며, ‘푸아그라나 블루치즈와 소테른의 조합은 너무 무겁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외에도 향신료의 풍미가 강렬한 인도 음식이나 스시 등 다양한 메인 요리가 소테른과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영하 7도에서 피어난 풍미, 아이스 와인
우리 조상들은 첫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이면 국화주를 마시고 홍시를 먹었다고 한다. 국화는 말할 것도 없는 가을꽃의 대표 주자요, 떫은맛 없이 부드러운 홍시는 서리를 맞으면 그 달콤함이 절정에 이르기 때문이다. 아이스 와인을 만드는 포도는 서리를 맞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꽁꽁 언 상태—대략 영하 7~8도에서 수확된다. 0도 이하로 떨어지면 포도 속 수분은 얼어버리지만 포도 속 당분은 얼지 않는데, 즙을 짜내는 과정에서 고체(얼음)가 된 수분은 상당 부분 걸러지고 당분을 많이 함유한 소량의 주스만 추출된다. 레이블에 ‘아이스 와인(Ice Wine)’이라는 표기를 하려면 자연 상태에서 언 포도를 수확해야 하고, 인위적으로 포도 과육을 냉동해서 만든 경우 아이스박스 와인(Icebox Wine) 혹은 ‘아이스드 와인(Iced Wine)’이라고 적거나 그냥 ‘디저트 와인(Dessert Wine)으로 표기한다.
아이스 와인의 대표적인 생산지 중 하나는 추운 날씨로 잘 알려진 캐나다. 기념품이나 선물용으로도 인기가 좋기 때문에 캐나다를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필리터리(Pillitteri)나 이니스킬린(Inniskillin)이라는 이름이 친숙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스 와인—독일어로 아이스바인(Eiswein)—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794년 독일에서다. 달콤한 풍미의 와인을 생산하려고 수확 시기를 늦추다가 이례적인 혹한으로 포도가 얼어버렸고, 어쩔 수 없이 언 포도로 와인을 만들었는데 일반적인 레이트 하비스트(Late Harvest: 늦은 수확) 와인보다 훨씬 달고도 매력적인 결과물이 탄생한 것.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리슬링이, 캐나다에서는 비달 블랑(Vidal Blanc)과 카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이 아이스 와인 생산에 주로 사용된다.
Pairing: 아이스 와인의 평균 당도는 코카콜라의 두 배 수준이라고 한다. 단맛에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라면 잘 여문 과일이 올라간 타르트나 말린 망고, 코코넛 아이스크림 등의 밀리지 않는 달콤함으로, 혹은 치즈 케이크의 녹진한 텍스처로 아이스 와인을 상대하는 것도 좋겠다. 기본적으로 단맛, 신맛, 짠맛 그리고 매운맛의 밸런스를 중시한다는 태국 요리도 괜찮은 매치. 장어나 랍스터 같은 기름진 해산물도 종종 거론되는 아이스 와인의 안주다.
건포도로 만드는 스트로(Straw) 와인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첨가물 없이 포도 그 자체로만 달콤한 와인을 만드는 기본적인 방법이 ‘수분의 제거 – 당분의 응축’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아챘을 것이다. 귀부 와인은 귀부균의 힘을 빌리고 아이스 와인은 추운 날씨의 혜택을 입는다. 그러나 이런 도움 없이도 수분을 날리는 방법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 바로 ‘널어서 말리기’다. 수확한 포도를 짚으로 만든 매트 혹은 나무 선반 위에 넓게 펼쳐 두고 쪼글쪼글하게 말리면 수분은 날아가고 건포도 특유의 단맛이 진하게 남는다. 물론 온도와 습도 조절은 필수다. 다습한 환경에 과일을 널어놓으면 마르기는커녕 곰팡이만 필 테니까.
말린 포도로 만드는 와인 중 잘 알려진 것으로는 이탈리아 베네토 지역의 레치오토(Recioto)와 여타 지역의 파시토(Passito), 프랑스 쥐라에서 주로 생산되는 뱅 드 파이유(Vin de Paille)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그리스 산토리니의 빈산토(Vinsanto) 역시 방문객들의 사랑을 받는다.
Pairing: 말린 포도로 만드는 스위트 와인은 생산 지역도, 사용되는 포도의 품종도 각양각색이다. 당연히 풍미도, 어울리는 음식의 종류도 서로 다를 것. 오늘은 이탈리아의 레치오토 델라 발폴리첼라(Recioto della Valpolicella)에 집중해 보자. 아마로네(Amarone)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발폴리첼라’라는 이름이 익숙할 텐데, 레치오토 델라 발폴리첼라와 아마로네 델라 발폴리첼라는 (그 이름에서 이미 드러나듯) 고향과 유전자를 공유한다. 코르비나(Corvina), 론디넬라(Rondinella), 몰리나라(Molinara) 등의 포도를 말려 즙을 짜내고 알코올 발효를 하다가 중도에 멈춰서 당분을 남겨두면 스위트 와인인 레치오토가, 끝까지 발효시키면 드라이한 아마로네가 되는 것이다. 레치오토를 만들려다 발효를 멈출 시기를 놓쳐 아마로네가 탄생했다니, 레치오토가 아마로네의 아버지 격이라 할 수도 있겠다.
잘 여문 자두, 체리, 건포도, 잼의 풍미는 물론 캐러멜과 초콜릿, 견과류, 때로는 담배의 아로마까지 담아내는 레치오토의 천생연분은 누가 뭐래도 초콜릿이다. 다크 초콜릿으로 만든 초콜릿 타르트나 케이크, 혹은 부드럽게 혀를 감싸는 초콜릿 무스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