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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피노 누아’는 동의어 아닙니까?

 

가을이 왔습니다.

어제는 더웠다. 그런데 오늘은 춥다.
한 달 만에 청바지를 꺼내 입었고, 긴 셔츠를 입었고 혹시 감기라도 걸릴까 싶어서 얇은 스카프도 둘렀다.
항상 가는 커피집에서 올여름 동안 자주 시켰던 콜드 브루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로 주문도 바꿨다.
언젠가부터 새벽녘에는 발치에 흐트러져 있는 얇은 이불을 끌어다가 덮고 자는 통에 아침에 눈을 뜨면 나는 마치 핫도그 안에 들어 있는 소시지 같은 꼴이었다.
한낮의 더위는 여전했지만, 달력에 날짜를 확인하지 않아도 곧 가을이 닥칠 것이라는 것을 이렇게 알았다. 그리고 셀러에서 얌전히 자고 있는 와인들이 나를 부르는 듯 자꾸 눈이 갔다.
가을이 왔다.

와인의 매력을 얘기하자면 끝도 없이 줄줄 설을 풀 수 있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매력은 과일 발효주라는 점이다. 그 과일은 물론 ‘포도’다.

와인을 만드는 포도 품종은 정말 다양하다.
다양한 품종의 포도가 재배되는 환경 역시 다양하다.
게다가 포도즙이 발효되고 숙성되는 조건은 더욱 다양하다.
단지 자연이 만들어 낸 기후나 환경 등 자연적 조건뿐만 아니라 인간의 개입이 더해지면서 와인 한 병이 갖게 되는 다양성은 제곱에 제곱을 무한대로 더한 것만큼이나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이 되니.
와인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묶인 각각의 술 한 병은 각각 다른 향과 다른 맛과 다른 촉감을 갖고 있어 골라 마시는 재미가 더해진다.

그리고 그 한 잔이 내게 오기까지의 여정을 추적하면서 경험하는 스토리텔링은 또 얼마나 매력적인가 말이다.와인 한 잔이 만들어내는 기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대표적으로 과묵한 사람마저 순식간에 수다쟁이로 만들어 버리는 기적이 있으니 믿어지지 않는다면 좋은 와인 한 병과 맞춤한 음식으로 시도해 보시길. 분명 와인 연금술의 기적을 눈을 껌뻑이며 보게 될 것이다.

“나는 오늘 피노 누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거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포도 품종인 피노 누아.”

딱 꼬집어서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르고뉴 피노 누아. 욕심껏 부르고뉴의 작은 마을 단위까지 하나하나 맛을 볼 수 있는 부르고뉴 피노 누아 주간이라도 만들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피노 누아.(피노 누아는 부르고뉴뿐만 아니라 뉴질랜드와 미국에서도 활발하게 재배 중이며 각 떼루아의 특성에 맞는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이 아름다운 와인이 빛을 발하는 시기는 가을이다.”

맑고 투명한 한 모금은 입안에서는 매우 가볍다. 그러나 그 가벼운 몸체에 얼마나 다양한 향들을 숨겨 놓았는지 놀라울 정도이고, 입안을 굴러 목 넘김 이후에도 끝나지 않는 여운과 서서히 느껴지기 시작하는 얇지만 날카로운 타닌의 흔적. 으아! 이것은 실제 육성으로 감탄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익숙한 것으로 비교하자면 좋은 고기와 뼈로 정성껏 우려내고, 맑게 걸러낸 곰탕 같다.
그 맑디맑은 국물 한 숟가락에서 느껴지는 감칠맛과 육향과 담백한 시원함. 맑은 곰탕 국물을 즐길 줄 안다면 누구라도 피노 누아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피노 누아는 부르고뉴에 포도밭이 생겨날 때부터 재배되었고 훌륭한 레드 와인을 만드는 품종이라고 정평이 나 있다. 포도알은 크기가 작고 촘촘히 열리는 진한 보랏빛의 포도송이로 포도즙이 풍부하고, 당도가 높다. 포도즙이 옅어서 샴페인을 만드는 대표적인 품종이기도 하다(같은 묘목에서 나오는 포도즙이라고 할지라도 양조를 달리하면 샴페인이 생산된다). 부르고뉴에서 생산되는 대표적인 품종으로 꼬뜨-도르의 그랑크뤼 와인을 생산하는 대표적인 품종이다.

<사진 : 피노 누아 포도와 와인 컬러>

부르고뉴 피노 누아라고 하면 가장 많이 듣는 얘기는 고가의 와인이라는 이야기일 테고 가장 낯익게 들어봤을 이름은 ‘로마네-콩티(Romanee-Conti)’일 거다. 심심치 않게 보이는 와인 허세꾼들의 얘기로는 로마네-콩티를 맛보지 않고서 부르고뉴 피노 누아를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도 말라는 다소 위협적인 얘기도 있으나 시음회 등에서 혓바닥만 적셔보고 로마네-콩티를 마셨다고 하는 자들도 있으니 미리부터 부르고뉴 피노 누아에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로마네-콩티가 부르고뉴 피노 누아 중 가장 말이 많고 유명한 와인이기는 하나 부르고뉴에는 로마네 콩티만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딱 지금 시기에 코르크 열기가 기대되는 부르고뉴 피노 누아는 ‘뉘-생-조르주(Nuits-Saint-Georges)’다. 부르고뉴의 많은 A.O.C 는 각각 특색있는 성격의 와인을 만들어 내는데 그중 뉘-생-조르주는 다소 야성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얘기할 수 있다. 흔히들 이곳의 와인을 얘기할 때 깊고 진한 컬러, 강하고 복잡한 아로마(주로 체리, 카시스, 동물의 털, 트러플, 기타의 향신료 등)를 이야기하며 부르고뉴 와인 중 타닌이 강한 편에 속하고, 강한 탄닌과 감미로운 맛의 조화가 뛰어난 와인으로 단단한 구조감을 지닌 와인이라고 평한다. 개인적인 느낌을 말하자면 섬세함을 내재한 야성이라고나 할까?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자연적인 거친 느낌을 품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정성을 들여서 가꾼 아름다운 정원수라 할지라도 계절의 변화에 따라 버스럭하게 말라가는 잎을 어찌할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그런 야성을 닮은 와인이라고나 할까? 내가 느끼는 뉘-생-조르주는 그런 느낌이다. 그래서 계절이 바뀌는 지금 시기에 더욱 간절하게 그리워지는지도 모르겠다.

양념을 최소화 한 육회(육 사시미, 쇠고기 가르파치오 등)나 숙성이 잘 된 안심의 겉면만 강하게 익힌 레어 상태의 스테이크나 채소와 각종 버섯들의 향을 살려 강한 불에 순식간에 볶아 낸 버섯 채소볶음. 그리고 돼지 피를 넣어 만든 전통적인 피순대(내 경우에는 병천 순대)와 함께하면 뉘-생-조르주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다.

<사진 : 순대>

<사진 : 비프 카르파치오>

 

물론 위에 나열된 음식들과의 매칭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것이니 굳이 여기에 갇힐 필요는 없다.
다만 내가 느끼는 와인의 거친 듯 섬세한 이미지와 그런 와인을 함께 하고, 음식들을 즐겁게 나누던 사람들과의 기억들이 와인과 음식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고, 좋은 계절이 되면 기분 좋게 떠오르는 행복한 추억이 되살아나 되풀이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이다.

너무 뜨거워서 힘들었던 여름을 보내고 솔솔 부는 찬 바람이 반가운 시기에 소중한 기억을 불러 일으키는 촉매 같은 와인이 당신에게는 있는지 궁금하다.
오늘 여유를 한 번 부려보는 건 어떠실지……

<사진 : Nicolas Potel Nuits-Saint-Georges 1er Cru Vieilles Vignes 2008>

 

<사진 : Prieure Roch Nuits-Saint-Georges Vieilles Vignes 2006>


참고 : 부르고뉴 와인, 실뱅 피티오 외, 박재화/이정욱 공저, 와인 북스.

Tags:
백경화

여행 한 스푼, 와인 한 방울. 즐거운 와인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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