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와인과 각종 주류, 관련 기사를 검색하세요.

한국 와인계의 프랑스 혁명을 꿈꾸다.

한국 와인계의 프랑스 혁명을 꿈꾸다.

황수진 2019년 8월 27일

며칠 전, 웹서핑을 하다 우연히 한 유명 인기 강사의 강연을 보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가 요즘 웬만한 아이돌 가수들이 태어난 때쯤 되는지라, 주로 수험생들을 위해 강의하신다는 그분의 성함은 몰랐지만 재치있는 말투에 매료되어 계속 귀를 기울였습니다.

한국에서는 영어가 사회적 계급이다.

강연을 흥미롭게 보는 도중 제 머리를 멍하도록 후려치는 문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영어가 한국에서는 부의 대물림이 되는 수단이 된다는 이들도 있으며, 한국의 신분은 영어로 표현된다는 말이었습니다. 너무 당연하고 뻔한 말이 무어가 그리 충격적이냐 물으실 수도 있겠지만, 제가 사는 곳과는 너무도 극단적으로 다른 대한민국의 현실을 실감하며 한없이 슬퍼졌다면 이해될지요?

올해는 제가 한국을 떠나 프랑스에 정착한 지 13년째 되는 해입니다. 여러 경우가 있겠지만, 대체로 이곳에서 영어는 부수적 수단일 뿐입니다. 국제화 시대에 영어를 잘한다면 좋지만, 못해도 그럴 수도 있다 여기는 듯합니다. 한국에서는 난리가 났던 영어 하는 대통령도 프랑스에서는 그저 작은 외교적 이점을 하나 더 가진 대통령일 뿐, 그것이 자랑스러워 언론에서 앞다투어 대서특필하는 것을 본 적은 없습니다.

지금은 결코 작고 힘없는 나라가 아님에도, 강대국 사이에 끼어 쉼 없이 고통받으며 살아와 소국의 열등감이 뼛속까지 새겨진 탓일까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모국어보다 영어에 능통해야 성공하는 사대주의 사회에서 사는 것이 서글프고 치욕적으로 느껴지는 건, 저뿐입니까?

와인이 한국 사회에서 갖는 상징성.

그러다 와인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영어가 사회적 계급이라면, 영어뿐만 아닌 불어, 서어, 이탈리아어, 독일어가 혼재된 와인은 한국 사회에서 소위 계급의 정점에 있는 이들만이 즐기는 고급문화일 수도 있겠구나.

문득, 와인전문가 한 분이 쓰신 글 중, 한국의 와인 소비량은 전 세계 소비량의 0.68%에 지나지 않고, 이마저도 증가추세가 미미하다는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와인에 대한 관심은 전반적으로 높아지는 듯한데, 그 관심이 소비의 증가로 직접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민해 보았습니다.

여러 자유무역협정을 통한 관세 철폐에도 여전히 높은 한국 시장의 수입가격도 분명 주요 원인이겠지만, 그보다도 와인이 일반 소비자들에게 아직도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기 때문이 아닌지요. 와인과 그를 소비하는 층의 지나치게 배타적이고 고고한 이미지가 잠재적 소비자를 계속 잠재적인 소비자로만 남게 하지는 않는지, 한국의 한 소믈리에분께서 한국의 와인 전문가와 애호가들은 자존심이 너무 세 힘들다고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예술과 와인은 사람들을 가깝게 한다.

휴가 중 들른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딱 봐도 예술계에 종사할 듯한 사람이 소리칩니다. “예술 평론가 정도는 되어야 대가의 명화를 보고 느끼는 게 있지! 이해 못 하는 대중들한테 예술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나 다름없어!” 예술작품의 보존을 위해 일반 대중의 입장을 막아야 한다며 당신의 입장표 구매를 방해하는 이를 본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전문가와 애호가만을 위해 존재하는 예술, “왜 당신들만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하고 반문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예술처럼 와인의 진정한 가치는 그를 즐기는 이의 신분 고하에 차별 없이 관능적 아름다움을 줄 때 비로소 드러납니다. 물론 해박한 지식을 가지면 더 많이 분석하고 이해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와인의 첫째 존재 목적은 즐거움이 아닐까요?

“예술과 와인은 사람들을 가깝게 한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또한, 프랑스 현대 요리사에 큰 업적을 남기고 며칠 전 유명을 달리하신 폴 보퀴즈 PaulBocuse씨는 생전 “고급 와인이 가득한 와인 저장고에 초대받는 것은 항상 유쾌한 일이지만, 가장 매혹적인 와인 이 존재하기 시작하는 순간은 바로 친구들과 함께 그 병들을 비우는 때에 시작된다. Nous sommes toujours flattés d’être conviés à visiter des belles caves garnies, mais les bouteilles les plus prestigieuses commencent à exister au moment où on les vide entre amis ”라고 하셨답니다. 듣고 보니, 정말 특출나게 맛있는 와인을 마셨던 기억들은 주로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순간들이지 않나요?

프랑스인들은 매일 고급 와인만 마실까?

많은 와인 애호가들이 환상을 품는 프랑스, 프랑스인들은 정말 옛 귀족들처럼 고급 와인만 마실까요?

프랑스의 어느 슈퍼를 가나, 와인이 갖춰진 곳이라면 브랜드 빌라주아즈 Villageoise 같은 플라스틱병이나 테트라팩에 든 저가 와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1.5 리터들이가 3유로, 즉 0.75 리터 와인병으로 환산 시 한국 돈으로 이천 원이 되지 않는 가격입니다. 0.33 리터 들이 소주 한 병에 1700원쯤이니 오히려 소주보다 쌉니다. 요리에나 쓰는 와인 같지만, 놀랍게도 이 와인을 평소 반주로 마시는 프랑스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매 끼니에 와인을 곁들여야 하는 노인세대나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학생들이 이 와인의 주요 소비자이긴 하지만요.

유럽연합의 통계에 따르면, 2017년 프랑스에서 소비된 레드와인 한병의 평균 가격은 5.48 유로 입니다. 한화로 약 7500원 정도 되는 액수지요. 특별한 날에는 고가의 와인을 열어 기념하는 프랑스인들이지만, 평소에는 대부분 소박한 와인을 즐겨 마십니다. 오렌지 주스나 닭고기처럼 와인 은 식료품이지 자기과시용 사치품이 아닙니다.

제가 칠 년간 프랑스 툴루즈 근교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중 하나가 있습니다. 저희는 잔으로 파는 와인을 주기적으로 바꿔서 적어두곤 했는데, 하루는 한 고객이 샤르도네 한 잔을 주문하셨습니다. 말끔하게 차려입으신 삼사십대의 프랑스 남자분이셨습니다. 제가 주문대로 샤르도네 한 잔을 갖다 드리자, 깜짝 놀라며 “샤르도네를 시켰는데 왜 화이트와인을 줍니까 ? 저는 화이트와인을 좋아하지 않는데” 하시더군요. 사족이지만, 그분에게 부끄러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습니다.

알자스를 제외한 모든 AOC 등급의 와인은 포도품종이 아닌 지역명을 붙이는 프랑스 와인의 특성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도 있을 법합니다. 와인을 잘 모르는 분이라면, 샤르도네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청포도 품종이며, 청포도로는 레드와인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어쩌면 당연한 것 아닐까요.

프랑스인이라고 와인을 잘 안다고 추측하는 건, 한국인이라고 모두 김치를 잘 담근다는 선입견과 비슷합니다. 그렇지만, 샤르도네 Chardonnay나 시라 Syrah가 와인을 생산하는 포도품종인 것을 모른다 해도 그것이 와인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아 보입니다. 지식이 풍부하고 교양있는 사람을 높이 사는 국민성 때문에 와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이를 확실히 더 좋아하긴 하지만, 와인을 잘 모르는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거나 더 중요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닙니다. 무식한 게 자랑은 아니겠지만, 와인 문외한이나 초보라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기죽지 않고 와인을 즐기는 그 날을 꿈꾸며.

와인 전문가가 와인을 잘 아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전문가라고 해도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와인을 다 꿰뚫어 알지 못합니다. 몇 세대에 걸쳐 한 밭을 일궈온 와인 생산자들보다 그 들의 와인을 더 잘 알 수는 없습니다. 설탕과 소주에 담근 포도주가 아니면, 와인이라는 술은 한국 고유 전통주가 아닙니다. 많이 알수록 더 섬세하게 음미할 수 있겠지만, 몰라서 어려워하거나 기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않을까요?

앞서 말한 강사는 공신 강성태 씨입니다. 조금 논리적 비약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한국에서 영어는 신분이며, 영어를 해 삶이 나아질 수 있기에 자신의 공부방법을 나누며 사람들을 돕고 있다고 하시더군요. 그 말씀에 참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리고 와인이 영어 못지않은 사회적 계급의 표식이라면,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제가 가진 와인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나눔으로써 세상에 조금의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마시자에서 칼럼 활동을 시작해 보고자 합니다. 의견이나 조언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참조
세바시. 2018. https://www.youtube.com/watch?v=q9lxOrwlmrE
정 휘웅. 2017. http://줄어드는-술-시장에서의-와인-생존법
인 비노 베리타스, 2010. http://www.invinoveritas.fr/pages/dictons.htm
유럽 연합, 2017. https://ec.europa.eu/agriculture/sites/agriculture/files/dashboards/wine- dashboard_en.pdf

Tags:
황수진

와인은 제게 삶의 위안이자 즐거움입니다. 당신에겐 무엇인가요? 7년간 남프랑스에서 레스토랑 운영, WSET Diploma, 45여개국 방랑

  • 1

You Might also Like

Leave a Comment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