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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빈 와인을 즐기는 방법

와인 애호가들의 로망 중 하나는 자신이 태어난 연도의 와인을 만나는 것이리라. 기도하면 이루어진다 하던가, 며칠 전 필자가 태어난 해(1972)의 와인을 만났다. 그 감흥은 와인의 시음 적기 여부를 떠나, 필자에게 일종의 경이로움으로 다가왔다. 올드 빈티지 와인을 종종 접하다 보니 이 와인을 어떻게 즐겨야 좋을지 생각하게 되었다. 필자가 올드 빈티지 와인을 마시면서 생각한 바를 간략하게 정리해보았다.

1. 디캔팅전에 중요한 일, 안정화

올드 빈티지 와인은 셀러에 아주 오랫동안 보관된 경우가 많다. 10년, 또는 몇십 년의 숙성 과정에서 침전물이 발생한다. 디캔팅 사용에 대한 찬반양론이 갈리는데, 침전물을 생각한다면 올드 빈티지 와인은 반드시 디캔팅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올드 빈티지 와인의 침전물은 매우 고와서, 디캔팅을 거치더라도 침전물이 와인 안에 부유물처럼 떠다니고 있을 때가 많다. 그러므로 시음 전에 최소한 하루는 안정시켜야 하며, 와인을 옮기거나 세울 때도 조심스러워야 한다. 이 과정을 ‘안정화’라고 부른다. 올드 빈티지 와인은 안정화 여부에 따라 시음이 주는 감흥이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만 이야기 하고 싶다. 안정화를 아무리 잘 시켜도 필터링을 하지 않은 고급 와인은 약간 탁한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오래 안정화 시킬수록 완화된다. 안정화가 잘 되면 침전물이 거의 가라앉기 때문에 꽤나 부드럽고 섬세한 질감을 선사한다. 그렇다고 와인을 따를 때 체나 커피 필터에 거르는 실수는 범하지 말기 바란다. 체에 거른다 해도 고운 침전물은 모두 다 통과해버리며, 커피 필터를 사용한다면 풍미가 확연히 변하여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올드 빈티지 와인은 마실 때가 되어서도 기다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오랜 시간을 기다렸는데, 마시기 전 며칠을 못 기다릴까?

2. 장시간의 디캔팅이나 브리딩은 금물

올드 빈티지 와인은 사람으로 치면 연륜이 있는 경영자 혹은 수도승의 느낌을 준다. 미술가 마티스의 예를 들자면, 그의 젊은 시절 그림은 아주 강렬하고 힘이 넘친다. 한 번 보면 뇌리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을 정도이다. 그러나 말년의 마티스는 점차 선 하나, 면 하나에 에너지를 가득 담는다. 이 엄청난 에너지는 손끝에서, 영혼의 끝에서 전해진다. 올드 빈티지 와인의 경우도 그렇다. 전체적인 느낌은 섬세함보다는 좀 더 단순 복잡함(?)을 내포하고 있다. 어딘가 설명되지 않는 에너지가 전해지기에 우리는 장인의 손을 느끼듯 올드 빈티지 와인의 심오함을 느낀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어린 빈티지에서 올드 빈티지 와인으로 버티컬 테이스팅할 것을 추천한다. 비록 올드 빈티지 와인의 힘은 약하나 그 깊은 내면은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올드 빈티지 와인은 힘이 부족하여 풍미가 쉽게 사라지므로 장시간 디캔팅이나 브리딩을 권장하지 않는다.

3. 와인만큼 도구도 중요

올드 빈티지 와인은 코르크가 축축하게 젖어있는 경우가 많다. 와인의 품질을 떠나 와인을 눕혀 두는 경우가 많기에, 코르크의 상태는 매우 나쁜 경우가 많다. 코르크가 와인을 보호해주는 역할과 (과학적인 증거는 없지만) 와인이 숨을 쉬도록 돕는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개봉할 때다. 오래된 와인의 코르크에 일반적인 코르크 스크루를 넣어서는 안된다. 얼마전 나도 도미누스 94빈티지의 코르크가 정상으로 보이길래 일반 오프너를 넣었다가 낭패를 입은 적이 있다. 빈티지가 20년이 넘었고 보관이 잘 된 와인이라면 반드시 아소(Ah-so)와 같이 코르크 주변을 잡아주어 천천히 당길 수 있는 장비를 쓰는 것이 좋다. 만약 코르크가 밀려 들어간 경우에는 이를 꺼내줄 수 있는 집게를 준비하는 것도 좋다. 오죽했으면 뜨겁게 달군 집게로 병목을 가열하고 온도 차를 이용하여 자르는 방법까지 나오게 되었을까? 오래된 와인은 보관도 중요하지만 개봉하는 과정도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자. 만약 내가 와인 초심자인데 올드 빈티지 와인을 마시고 싶을 땐 어떡할까? 이때는 주변에 경험이 많은 지인과 함께 마시거나, 제대로 된 레스토랑에서 콜키지 비용을 지불한 다음 서비스를 요청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4. 안주 없이 와인 본연의 모습을 즐기자

나는 피노 누아나 리슬링이 완벽한 음식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이런 와인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훌륭한 맛을 내기 때문에 굳이 치즈나 안주를 곁들일 필요가 없다. 올드 빈티지 와인은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섬세한 모습이 많으므로 와인만의 아로마와 질감을 느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와인의 조화를 생각하여 여러 음식과 조화를 맞추어 보는 것도 좋겠지만, 내가 추천하는 올드 빈티지 와인의 안주는 고독과 사색, 음악과 책이라 생각한다. 가만히 와인을 음미하며 조용한 음악에 집중하면 와인의 느낌을 더 깊이 느낄 수 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즐겨도 좋겠지만, 이때에도 과도한 이야기보다는 눈빛과 손길 같은 좀 더 비언어적인 요소와 함께 즐기는 것이 더 적절하리라 생각한다. 그만큼 올드 빈티지 와인은 본능적이다.

5. 좋은 빈티지는 있어도 망한 빈티지는 없다

적정한 수준이 되는 포도원이라면 연도가 상당히 지났다 하더라도 그 자체의 품질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몬테스의 알파, 라포스톨의 퀴베급 와인은 15년 이상 되면 정말로 멋진 맛을 보여준다. 빈티지에 따라 상태가 좋다 나쁘다 하더라도 우리가 마트나 편의점에서 구하는 중, 고가 와인들은 이미 생산지 국가에서 상당한 품질을 자랑한다. 보르도 그랑 크뤼는 더욱 그러하다. 예를 들어 가장 힘들었던 해 중 하나로 지목되는 1997년 빈티지 와인은 당시에 매우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었다. 그런데 얼마 전 시음한 생테밀리옹 그랑 크뤼 1997은 내게 놀라운 경험을 선사했다. 자연스러움과 따스함, 뭉근하면서 관조적인 느낌이 아름다운 질감을 전해주었다. 와인이 어릴 때 매겨지는 인간의 평가가 교만이라면, 올드 빈티지는 대자연의 긴 시간이 주는 자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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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휘웅

- 김준철 와인아카데미 마스터, 양조학 코스 수료 - 네이버 와인카페 운영(닉네임: 웅가) - 저서: 와인장보기(펜하우스), 와인러버스365(바롬웍스) - (현)공개SW협회 공개SW역량프라자 수석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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