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PO라는 말이 있다. Time(시간)의 T, Place(장소)의 P, Occasion(상황)의 O가 만나 만들어진 말로 시간과 장소, 상황에 맞춰서 옷을 입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TPO는 의류 업계에서 마케팅의 목적으로 처음 사용해 왔지만, 직접적으로 ‘옷’을 나타내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 그 말인즉슨 음식 앞에서 TPO를 논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는 거다.
TPO라는 말이 어려워서 그렇지, 음식 앞에 놓인 TPO는 사실, 제철 음식이라 생각하면 쉽다. 집 나간 입맛과 함께 돌아오는 향긋한 봄나물, 무더운 여름이면 찾게 되는 냉면, 팔딱팔딱 힘 좋은 가을 대하. 추운 겨울 집안에서 까먹는 귤. 제철이 뭐 별건가. 시기적절하게 맛있게 즐길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은 제철 음식이 될 수 있다.
비단 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더라도 TPO를 적용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는 마시며 즐기는 술이 여기에 해당한다. 집에서 간단히 혼자 마시는 술에는 맥주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고, 연인과 분위기 내며 마시는 한 잔에는 와인이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근데 놀랍게도 때에 맞춰 술을 즐겼던 건 지금의 우리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과거 기록을 보면 크게는 절기에 맞춰, 작게는 명절(축제·잔치·행사)에 맞추며 술을 즐겨온 내용들이 있다.
*** 절기주와 세시주 : 절기주는 절기에 따라 즐겨 마시는 술을, 세시주는 세시풍속(농경의례 행사)때 즐기던 술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세시풍속은 절기에 맞춰 이루어지다 보니 사실상 절기주와 세시주는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
한 해의 시작: 도소주
한 해의 첫날을 기리는 명절인 음력 1월 1일 설날부터 절기주는 사용된다. 설날에 사용하는 절기주의 이름은 도소주다. 잡을 도, 사악한 기운 소, 술 주가 만나 사악한 기운을 잡는 술이란 의미가 있다.
조선시대 고문헌에 나와 있는 도소주 제조법을 보면 여러 약재를 사용해서 만드는 걸 알 수 있다. 사용하는 약재 대부분엔 몸속 기생충을 없애는 효과가 있으며 대황에는 변을 배출하고 천초에는 몸에 땀을 내어 노폐물을 내보내는 효능까지 있었다고 한다. 몸에 있는 나쁜 물질을 몸 밖으로 내보낸다는 의미로 도수주를 마셨던 셈이다.
도소주에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어린아이부터 마시는 술이라는 점이다. 나이가 어릴수록 질병이나 전염병에 약하기 때문에 어른들의 배려로 자리 잡은 풍속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어린아이에게 술 예절을 가르치기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고 한다.
정월 대보름: 귀밝이술
설날이 지나 정월 대보름이 찾아오면 우리의 조상들은 귀밝이술을 마시곤 했다. 귀밝이술은 이명주라고도 불리며 특정 술을 지칭하는 것보다는 아침 해가 뜨기 전 마시는 찬 상태의 맑은 술 (소주·청주)을 의미하고 있다. 귀밝이술은 이름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시피 귀를 밝히기 위해 마셨던 술인데 귀가 밝아지면 한 해 동안 좋은 소식을 잘 들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에 마시곤 했던 절기주다.
꽃 피는 봄이 오면: 두견주, 도화주, 송순주
3월이 되면 본격적으로 꽃이 필 준비를 한다. 활짝 핀 꽃들은 때때로 술의 좋은 재료가 되기도 하는데 진달래꽃으로 빚은 두견주, 복숭아꽃으로 빚은 도화주, 송순으로 빚은 송순주가 대표적이다.
오늘날에 있어서 두견주는 면천두견주보존회의 면천 두견주로, 송순주는 솔송주양조장의 솔송주로 대체할 수 있다. 참고로 면천 두견주는 국가 무형 문화재로 지정된 술이며 솔송주는 박흥선 식품 명인이 빚고 있는 술이기도 하다.
맑은 하늘 아래서: 청명주
4월에는 24절기 중 다섯 번째 절기인 청명이 있는 달이다. 청명에는 하늘이 차츰 맑아진다는 의미가 있는데 이를 기념하면서 마셨던 술 또는 이를 기념하면서 빚었던 술을 청명주라고 불렀다. 과거에는 청명일을 기준으로 농사 준비를 했는데 농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차례를 지낼 때도 청명주를 사용했다고 한다.
모내기가 끝나고 난 뒤: 창포주
모내기가 끝나고 잘 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냈던 명절이 바로 단오다. 우리나라 4대 명절로 불릴 만큼 매우 중요하고 큰 축제이다 보니 어김없이 술도 빠지지 않았다. 단오에 즐긴 술은 창포주인데 우리가 흔히 단옷날에 머리 감을 때 사용한다는 그 창포물로 빚은 술이다. 물론 머리 감고 남은 창포물로 빚은 건 아니다.
창포는 몸을 건강하게 해주는 약효 덕에 예로부터 사랑받아온 식물이다. 그렇다 보니 많은 노동력이 있어야 하는 추수 전까지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창포를 사용했다고 한다.
추석: 신도주
설날에 도소주가 있다면 추석에는 신도주가 있다. 신도주는 연중 첫 수확물인 햅쌀로 빚은 술로 신께 감사한 마음을 담아 받치는 차례상이나 한 해 동안 같이 고생한 마을 사람들과 잔치를 열어 나눠 마시는 데에 사용하곤 했다.
어쩌면 필요했던 건 술을 마실 핑곗거리
먹거리가 풍족한 오늘날에는 언제 무엇을 먹든 큰 제약이 없겠지만, 풍족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무엇 하나를 먹더라도 충분한 이유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TPO라 부를 수 있는 과거의 잔치나 명절, 행사는 음식과 술을 즐기기 좋은 일종의 핑곗거리였지 않았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