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thern Kennedy Meadows/Grumpy Bear’s Retreat 1130.1km ~ Lone Pine 1199.5km
5/18-금. 50일째
느즈막히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한 뒤 우편물을 픽업(보관료 $6)해서, 가까운 그럼피 베어 리트릿 Grumpy Bear’s Retreat이라는 작은 식당으로 이동했다. 차로 10여분 거리의 그 식당은 보관료 없이 하이커들의 소포를 보관해 주고 주변의 공터에 텐트를 칠 수도 있었으며 저렴한 가격에 샤워할 수도 있었다. 단점은 PCT에서 조금 멀다는 것인데 도로에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대신 카페에서 셔틀 형식으로 무료 픽업 트럭을 운영해서 하이커들의 이동이 쉽게 도와주고 있었다. 덕분에 시골 마을의 작은 식당이 사람들로 북적인다.
또 얼마전에 PCT를 비롯한 Long Distance Thru Hiker에게는 꽤나 유명한 여자 하이커인 Yogi라는 사람이 그의 남편과 함께 인근에 Triple Crown Outfitters 라는 장비점을 열었다. 고산지대를 대비해서 이것저것 장비가 필요하거나 식량을 구입해야 하는 하이커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소식이었다. 두 사람 모두 Triple Crowner였는데 Triple Crowner란 미국의 3대 장거리 트레일인 PCT(Pacific Crest Trail 2,659mi(4,279km)), AT(Appalachian Trail, 2,200miles(3,500km)), CDT(Continental Divide Trail, 3100miles(4989km))를 모두 완주한 사람을 말한다. 나는 식량과 장비는 이미 충분했고, 법적으로 필요한 곰통을 구입해야 했다.
통상적으로 하이커들이 곰통/Bear Canister이라고 부르는 것은 음식을 보관하는 통 또는 가죽 주머니를 가리킨다. 미국은 몇몇 국립공원 내에서 음식으로부터 곰을 보호하기 위해서(음식을 곰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의무적으로 곰통을 지녀야 하는데 High Sierra가 그 구간에 해당되었다. Bear Vault는 대부분의 하이커가 구입하는 모델로 플라스틱 반투명의 원형 통인데 뚜껑을 돌리는 곳에 직각삼각형의 돌기가 있어 그것을 누르며 돌려야 열 수 있다. 곰은 그런 섬세한 동작을 할 수 없으니 아무리 음식 냄새를 맡아도 뚜껑을 열지 못해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곰통을 가지고 다니는 구간에서는 밤에 자는 동안 텐트에서 50~100feet(15~30m) 떨어진 거리의 눈에 보이는 곳에 놓아두어야 한다. 곰이 음식 냄새를 맡고 접근한다 해도 텐트 안의 사람은 다치지 않아야 하며, 곰이 음식을 습격한다면 소리를 듣고 곰을 쫒거나 피해야 하니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플라스틱 통이 아닌 가죽 주머니를 선택할 경우 곰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나무에 매달아 두어야 한다. 이제부터는 500km이상의 거리를 1.2kg만큼의 무게를 더 짊어져야 한다니 짜증이 났지만 안전을 위해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레인저에게 검문이라도 당한다면 벌금은 둘째치고 트레일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고도 했다.
식량을 곰통에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며 익숙해지려다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이제까지는 식량을 아침/점심/저녁으로 구분해서 그물 주머니에 넣었었는데, 한번에 넣어서 가지고 다녀야 하니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점심 한 끼 먹자고 통을 전부 뒤집어엎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제 좀 익숙해지려나, 싶었던 것이 바뀌어 또다시 낯설음에 마주하게 된 것은 비단 날씨만은 아니게 되었다.
5/19-토. 51일째
식당에서 판매하는 아침을 먹고 여유 있는 식량은 한참 뒤에서 걷고 있는 한국인 하이커를 위해 맡겨 두었다. 어쩌면 누군가 내게 해 주었으면 고마웠을, ‘수고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길고 긴 사막구간을 힘겹게 걸어 왔을 테니 이곳에서 작은 선물을 받으면 더욱 힘이 나겠지.
어제는 오후가 되어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바람도 꽤 불더니 오늘은 산에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 예보가 있다고 한다. 몸 상태도 썩 좋은 편은 아닌 데다 이상하게 출발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아 하루 더 쉬기로 했다. ‘괜한 핑계를 만들어 게으름을 피우는 걸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가고 싶은 마음이 들면 언제든 트레일로 돌아가 밤을 보내고 내일 아침 출발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잡았다.
오후가 되면서 새로 도착하는 하이커들이 늘어났고, 나 뿐 아니라 대부분의 하이커들이 2~3일씩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길게는 4일 이상 머무는 하이커도 있었으니 사막이 끝난 이곳에서의 휴식이 얼마나 모두에게 필요했는지 새삼 느낀다. 늦은 점심을 먹으며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맙소사! 열흘 쯤 전 워커 패스 캠프 그라운드에서 헤어졌던 하이커 친구 중 한명이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서로를 발견하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며 끌어안고 반갑게 인사를 한다. 무슨 일이냐고, 어떻게 된 거냐고, 왜 여기 있느냐고, 혼자인 거냐고 묻는 나의 속사포 질문에 말없이 밖을 가리키는 그의 손길을 따라가니 다섯 명의 친구들이 픽업 트럭에서 짐을 내리고 있다. 두 말 할 필요 없이 달려나가 방방 뛰며 서로 끌어안고 인사를 나눈다. 이래서 오늘 이곳을 떠나기 싫었던가 보다. 무엇을 선택하든 그 책임을 져야 하듯 어떤 선택은 이런 기쁨을 안겨주기도 하는 곳이 트레일 아니던가. 그들도 역시나 내게 이것저것 물으며 언제 이곳에 왔는지, 언제 출발할지등등 질문이 끊이지 않는다. 맥주 한잔을 나누며 그간의 일들과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하루가 저물어 간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그들을 만나니 ‘수고했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진다.
5/20-일. 52일째
어제 많은 하이커들이 날씨 걱정을 했던 것이 생각나 출발 준비를 마치고 일행들을 기다리며 경험이 많은 다른 하이커에게 천둥 번개를 칠 때는 어떤 장소에 텐트를 치는 것이 좋은지 물어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평지든 산이든 가장 높은 나무 아래는 피해야 하고, 바위 아래도 위험하다는 것이었는데 거기에 더해 낮은 나무 아래 텐트를 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주변에서 짐 정리하던 하이커들도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날씨 이야기가 끝나자 서로 언제 가는지, 지금 출발할 건지 등을 물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 말 끝에 누군가 그런 말을 던진다. ‘장거리 하이커에게 하이킹 하기 완벽한 날씨란 없어.’라고. 하루종일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나 역시 간혹 날씨 때문에 하이킹을 피하고 싶을 때도 있었는데 잘 못 판단하고 있었단 생각이 들었다. 하루 이틀도 아닌 6개월의 시간 중 좋은 날씨만 있으리란 법은 없으니, 나쁜 날씨에 주저앉아 하루를 보낸다면 이 길은 영영 끝나지 않으리라.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아주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우리는 걸어야 했다. 그것이 우리니까. 우리는 쓰루 하이커니까. 그렇게 산길을 한참 걸어 지나가자 또 다른 목초지(Meadow)에 들어섰다. 멀리 내가 걸어가야 할 산길과 함께 비구름이 보였다.
저 비구름은 내 쪽으로 오는 것일까, 아니면 나와 상관없이 지나가는 것일까. 결과는 금방 알게 되었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비를 맞은 것이다. 길가의 큰 나무 아래로 피한 뒤 배낭 커버를 씌우고 바지도 길게, 거기에 방수 기능이 있는 자켓까지 챙겨 입은 뒤 하이킹을 계속하다 넓은 강 건너 다리 아래 휴식을 취하며 나를 기다리는 친구들을 발견했다. 그들과 합류하여 간식을 먹은 뒤 출발, 멀지 않은 숲속의 작은 도랑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날이 추워진 데다 건조한 사막 구간을 지난 덕에 먼저 도착한 친구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있었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피운 모닥불 옆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던 친구들이 내가 다가가자 급하게 부른다. 다가가보니 이빨 자국으로 엉망진창이 된 곰통 뚜껑을 보여준다. 이곳에 곰이 나왔던 흔적일까? 왜 저 뚜껑을 가져가지 않은 걸까? 우리에게 Leave No Trace(줄여서 LNT;작은 휴짓조각 하나의 흔적도 남겨서는 안된다는 말.)는 무엇보다 우선시되어 지켜야 할 룰인데. 저 곰통 뚜껑의 주인은 무사할까? 별별 생각이 다 든다. 그러다 오늘 트레일 위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주말이라서인지 보이스카웃이나 가족 캠퍼들도 많았고 친구처럼 보이는 어르신들도 꽤 만날 수 있었다. 어린 아이들 마저도 각자의 배낭을 메고 스틱을 짚어가며 길을 걷고, 양보하고, 양보를 받으면 인사를 하는 것들을 보며 ‘어릴 때부터 이렇게 트레일을 걸으며 자연을 보호하면서 즐기는 방법이나 서로 지켜야 할 예절들을 몸소 체험하고 있으니 이 길이 자연스레 지켜질 수 밖에 없구나’하고 느꼈었다. 그 수 많은 사람 중 누군가가 저 곰통 뚜껑의 주인이었을 수도 있었을 거다. 부디 무사했기를 빌어본다.
잘 읽었습니다. 여기서 포스트가 끊겼네요. 끝까지 안전히 완주 하셨겠지요. 저도 언제가 꼭 걷고싶어지는 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