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셀, 브뤼헤. 벨기에에서 여행할 도시 중 2곳은 이미 정해진 상태였고, 나머지 1곳을 선정하는데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첫날은 브뤼헤로, 마지막 여행지는 브뤼셀로 라인업을 꾸린 상황에서 중간에 들어갈 도시로 겐트(Gent)와 안트베르펜 (Antwerpen)이 물망에 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더 고민이 됐을 터. 맥주의 나라, 벨기에는 1달 코스로 계획해야 편애 없이 여러 도시를 보듬을 수 있다. 지도상 중앙에 있는 겐트 대신에 브뤼헤에서 동쪽으로 이동해 안트베르펜을 가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브뤼헤에서 체크 아웃하고 나와 도착한 시간과 기차 시간이 가까운 지역이 안트베르펜이었기에. 여행 운명론자의 판단은 단호하고, 뒤끝이 없다.
기차는 1시간 30분 언저리에서 속력이 줄어든다. 내릴 때가 되면 부지불식간 내 눈은 창밖을 응시한다. 상견례와도 같다. 새 도시와의 아이컨택. 짐을 수중에 모아놓고, 머릿속에서 이후 일정을 시뮬레이션해본다. 먼저, 숙소로 가는 길과 운송수단을 점검한다. 주로 걷는다. 휴대전화의 데이터 연결을 해놓지 않아서, 기차역 로비에 갖춘 지역 지도를 가져온다. 펼치고 선을 긋는다. 지날 곳의 도로명과 주요 건물을 인지하고 따로 메모해 둔다. 기차역에서 나가는데 시간이 걸렸다. 루벤스 작가의 도시인 만큼 기차 역사의 아우라도 꽤 볼만 했기 때문이다. 고풍스럽고 귀족적인 분위기는 처음 오는 관광객을 압도한다. 기차역에서 나와 궁전 같은 외관을 사진 속에 담는다. 과거 유럽 최고의 무역항이었던 안트베르펜이라서 그럴까. 기차역 밖은 다이아몬드 상점으로 줄지어 있다. 우리나라 종로 금 도매상가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이 상점을 쭉 따라 10분 남짓 가다 보면 숙소가 나온다.
숙소 체크인을 하고 바로 첫 여행지로 양조장을 선택했다. 대부분 시내 쪽으로 물 흘러가듯 목적지를 정하지만, 난 맥주가 더 간절했다. 호스텔 로비에서 인사하고 말을 섞었던 친구들은 모두 시내로 향했고, 나 홀로 반대편 길로 외로이 걸었다. 벨기에에서 유명한(사실상 안트베르펜의 제1의 맥주) 맥주인 드 코닉(De Koninck) 맥주가 생산되는 양조장이 있다. 1833년에 양조를 시작한 유서 깊은 곳이며, 흰색 왼손의 로고가 인상적이다. 왼손잡이라서 더 애착이 간다. 드 코닉 양조장에 대해 가장 궁금했던 건, 바로 이 CI이다. 왜 빨간 바탕에 흰색 손을 그려넣었을까. 예전 이곳은 범법자들을 처형하는 지역과 마을 주민이 생활하는 곳의 경계지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처형지로의 출입을 금하기 위해 이 표시판을 설치하면서 이 브루어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양조장 안이 분주해야 하는데, 너무도 을씨년스러웠다. 사무실로 보이는 곳에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고 들어가 사정을 물어보니, 현재 양조장은 가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도착했을 무렵, 이 양조장이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계획대로였다면, 현재 재개방을 했을 거다). 아쉬운 맘에 텅 비어 있는 내부라도 찍고 싶었다. 맥주 라벨을 자세히 보면, ‘Speciale Belge’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영국 스타일이 아닌 벨기에 스타일의 에일 맥주라고 강조한 부분이다.
냉면 가게에 와서 냉면 기계만 보고 가면, 얼마나 속상하겠나. 맥주 공장에 왔는데, 맥주도 못 마셔보고 간다는 건–특히 외국에서–나 자신에게 미안한 일이다. 다행스럽게, 양조장 바로 앞에 맥주를 파는 카페가 영업 중이다. 드 펠그림(De Pelgrim)은 네덜란드어로 ‘순례자’, ‘여행자’란 뜻이다. 여행자라면 자기력이 이끌려 들어가고 마는 곳인가. 카페 안에는 중년 남성 2명이 한 테이블을 차지했을 뿐, 여행자로 보이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롯이 나를 위한 공간인가. 주저함 없이 건너편 양조장의 맥주 로고가 있는 탭을 가리켰다. 한낮인데도 카페 안 조명의 조도가 낮아서 흡족하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으면 종업원이 초에 불을 얹어놓고 간다. 사람도 없는 조용한 곳에서 촛불에 의지해 마시는 맥주는 분위기에서 반 이상을 먹고 간다. 트라피스트 맥주에 걸맞은 고블릿 잔이 놓이고 그 옆에 잘 절인 올리브 열매가 곁들임 안주로 함께 왔다. 이 이후일 것이다. 맥주를 마실 때 절인 올리브를 찾는 습관이. 신맛이 돋는 맥주에 살짝 짭조름한 올리브가 들어가니 입안에서 균형감이 느껴진다. 모든 조건이 내 마음대로 진행되고 있다. 공사 중이었던 양조장을 보며 실망한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이제 시내로 가보자. 벨기에 안트베르펜은 쇼핑 도시로 유명하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럽인들은 명품 쇼핑을 하려고 이곳을 찾는다. 화려한 거리에서 새어 나와 음지가 드러나는 좁은 골목을 지나치면, 내가 찾는 쿨미네이터 맥주 카페가 보인다. 잘 차려입은 정장보다는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은 당신을 보는 기분. 이곳이 명소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상호를 모르고 갔다면, 분명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미국 맥주 전문 사이트 레이트 비어(Ratebeer)가 ‘세계 최고의 맥줏집(best beer destinations)’을 발표했는데, 쿨미네이터가 5위를 차지했다. 특히, 웹방문자들이 별점으로 선정하는 최고의 맥줏집으로는 이미 몇 번이나 1위를 자리했다. 분명 이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건,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벨지안들은 이곳에서 과거로의 회귀를 경험한다. 누군가는 1300년대 중세의 천막집(Tabern)에 들어와 세월이 멈춰있다고 표현한다. 긴 역사를 얘기하듯, 속속들이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세월의 향과 맛이 전해진다. 이 카페는 명성에 비해 작고 다소 꽉 막혀 있는 구조다. 나이테처럼 찬장 구석에 쌓여있는 묵은 먼지들. 마치 우리나라의 오래된 양조장을 견학하는 것처럼 불쾌함은 전혀 없고, 오히려 신선한 기운이 감돈다.
테이블 한 곳을 차지하더니, 느릿느릿하게 나오는 나이 드신 할머니. 그리고 손님에게 잠시 눈길을 주고 본인의 할 일을 하시는 노신사. 가게는 두 노년의 부부가 약 40년 가까이 운영하고 있다. 주문은 주로 부인인 덕(Dirk) 여사가 받고, 남편인 린(Leen)은 사무실이 아닌 한 테이블을 자신의 영역 삼아 일을 하고 계신다. 그 테이블에 쌓인 자료들도 세월이 얹어진 인테리어와 같았다. 메뉴판이 나왔는데 꽤 묵직했다. 어떤 외국인은 메뉴판이 성경책 같다고 후기에 남겼다. 이 두꺼운 메뉴판을 넘길 때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맥주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가 있다. 연식이 꽤 진행된 선풍기가 돌아가는 공간에 수많은 맥주가 진열되어 있으며, 이 안도 꽤 복잡스럽게 얽혀있다. 이곳에서는 맥주 한잔 이상의 것을 얻고 간다. 오감을 열고 들어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