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지하철(튜브 Tube 또는 언더그라운드 Underground라고 칭함)의 얼개는 복잡한 편이다. 옆 나라인 아일랜드 더블린의 단조로운 지상철인 루하스 Luas와 비교된다. 그래도 주요 관광지를 편하게 가려면 개인적으로 버스보다는 언더그라운드를 택한다. 런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그리니치 지역.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에서 수원 정도의 거리다. 치열한 도심보다는 멀지는 않지만 숨을 고를 수 있는 곳, 그리니치가 오늘의 목적지다. 런던 시내에서 경전철로 약 20분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면 세계 표준시로 유명한 그리니치에 도달한다.
경전철 DLR(Dockland Light Raiload). 우리나라의 1호선 마냥 런던에서 근교까지 가는 지상철이다. 런던 북동쪽에 새롭게 건설된 신도시 도크랜드 Dockland를 지나서 그리니치까지 운행하는데, 무인열차인 데다가 역과 역 사이가 1km 정도밖에 안 되는 곳도 있어서 뭔가 놀이동산에서 타는 모노레일과 같았다. 당시 런던 시에서는 도크랜드를 첨단기술이 접목한 신도시로 건설하기 바랐고, 영국 최고의 금융단지로 육성하고자 이 교통수단이 필요로 했었다. 빨간색 원형이 런던의 언더그라운드 상징이라면, 경전철은 밝은 청색을 사용했다. 나는 그리니치로 가려고 경전철 노선이 있는 타워 게이트웨이 Tower Gateway 역으로 갔다. 우리나라의 대구 3호선과 비슷한 승차감이었다.
20분간 즐긴 도심 속 코끼리 열차의 종착역인 그리니치 역. 출입구가 어딘지 부산스럽게 찾을 필요 없이 함께 하차한 대열에 합류하면 된다. 작은 골목을 지나 큰 범선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커티 사크 Cutty Sark라는 스카치위스키가 있다. 1919년부터 발휘된 미국의 금주법은 스카치위스키 수출에 큰 타격을 안겨줬다. 기회를 엿보던 중 금주법이 조만간 해제될 것을 예상하고 속속 신제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새로 개발된 술의 이름을 찾던 중 당시 범선의 이름이던 ‘커티 사크’가 낙찰되어 위스키의 이름으로 지어졌다. 켈트 어로 ‘짧은 셔츠’라는 뜻의 커티 사크는, 스코틀랜드의 시인 로버트 번스의 시에 등장하는 ‘마녀의 속옷’을 가리키는 말로도 유명하다.
영국사람들은 홍차를 즐겨 마신다. 세계적인 홍차 생산국이기도 하다. 매일 아침, 호스텔에서 살짝 구운 토스트에 곁드는 우유를 넣은 홍차의 아침을 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거의 매일 아침을 그렇게 때웠기 때문에. 뜨거운 홍차를 마시려면 손잡이가 달린 찻잔이 필요했다. 커티 사크호는 중국에서 영국으로 차를 운반했던 쾌속 범선이다. 이 범선은 이후 양모 운반선으로 활약(?)하다가 포르투갈에 팔려가고 결국에는 1922년 영국으로 넘어왔다. 이후 커티 사크 보존협회에 기증되어 박물관으로 활용하다가, 2007년에 생긴 화재로 타 없어졌다. 최근 복원되어 일반 관광객에게 공개하여 그리니치 항에 가면 볼 수 있다. 이 항구는 항상 들떠있다.
그리니치에도 유명 마켓이 있다. 경전철 DLR Cutty Sark역 출구에서 나오면 바로 옅은 노란색 건물이 보인다.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앤티크와 빈티지 장이 서고, 토·일요일은 디자인 제품과 공예품을 파는 노점이 형성된다. 이 시장은 크게 골동품과 간단히 요기할 수 있는 음식을 판매한다. 앤티크나 도자기 및 미술품 등에 관심이 많지 않은 터라 내 눈에는 점심을 때울 메뉴 결정에 온 신경이 서 있었다. 그 와중에 보이는 한글, 그리고 그 매장에서 판매하는 불고기. 가격 대비 올곧은 선택이었다. 이 마켓도 여성 지향적인 상품들이 많아서, 삼삼오오 온 여성들의 쇼핑 시간은 늘어만 간다.
이제 가게 될 두 곳의 여행지는 의미가 다르다. 한 곳은 누구나 이곳에 오면 가는 곳이고, 나머지 한 곳은 내가 그리니치를 오게 된 오롯한 이유다. 먼저, 누구나 오는 곳을 향하기로 했다. 그리니치 천문대. 그리니치 시내에서 이 천문대로 이동하려면 약간 높은 산행 아닌 산행을 해야 한다. 천천히 산책하는 기분으로 걷다 보면, 여러 건물이 운집한 1675년에 세워진 천문대가 보인다. 이 천문대는 당시 항해술을 연구하려고 만들어졌다. 그 이후 영국의 천문학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그리니치 천문대를 위치 측정의 기준으로 삼아 왔으며, 네 개의 자오선이 이 지점을 기준으로 그어지게 되었다. 세계 표준시를 표시하는 ‘GMT’의 약자가 바로 ‘Greenwich MeanTime’이다. 여행하면서 바뀌는 시간대, 외국에 사는 지인에게 전화하려고 고려했던 시차가 모두 이곳을 기준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1930년 이후에는 천문대의 역할이 약해진다. 런던의 악명높은 스모그와 올라져 가는 고층빌딩으로 인해. 그래서 이전을 추진하였다. 천문대를 서섹스 주로 이전하고 현재는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다. 그리니치에서 바라본 그리니치 공원의 풍광도 아름다워 관광객들은 숨도 돌릴 겸 이곳에 앉아 휴식을 취한다. 천문대 정문 앞에는 발명가 찰스 셰퍼드 Charles Shepherd가 제작한 아날로그 시계인 셰퍼드 정문 시계 Shepherd Gate Clock이 있다. 준비한 맥주 한 캔을 꺼냈다. 숨이 제법 차오르고 땀이 등에 지도를 그릴 만큼 흐르던 순간이었다. 영국 시내를 스크린 삼아 반쯤 누워 거품으로 차오르는 맥주를 식도로 전달했다. 여행이 주는 짧은 쾌감의 정의를 말하라면 지금의 나를 설명하겠다.
마지막 여행지다. 내가 그리니치를 오게 만든 이유다. 술꾼인 나로서는 오로지 민타임 Meantime 맥주 양조장이 궁금했다. 물론 이곳의 마켓이나 천문대 등의 관광지가 있었기에 여행 코스로 계획하기 훌륭했다. 그리니치 다운타운에는 민타임 올드 브루어리가 있는데, 바, 카페, 레스토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전에 내가 알아보고 온 것과는 사뭇 달랐다. 레스토랑 내부에 맥주 탱크가 들어가 있긴 하지만, 난 양조장을 보러 왔음에… 직원에게 물어보니, 여기는 관광객들을 위한 크래프트 비어 레스토랑이고, 도보로 25분, 버스로 5분 거리에 양조장이 있다고 전해 들었다. 시간도 주워 담을 정도로 많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걸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걷다 보니 민타임 공장 입구가 보였다.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 투어 예약을 했던 터라, 이름을 확인하고 20파운드를 지급하여 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Meantime의 뜻이 표준시간이다. 세계의 시간의 표준인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가 있는 곳에서 태어난 맥주이다. 1999년, 민타임의 창시자 브루마스터 알라스테어 훅은 당시의 양조장이 그리니치 지역에 있어서 ‘맥주 맛의 표준이 되겠다’는 포부로 이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맥주에 담은 스토리텔링 중에 강력한 놈 중 하나다. 그는 맥주의 원재료를 생산하는 노동자에게도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생각에 2005년에 영국에서 최초로 공정거래 맥주를 제작한다. 그 맥주는 커피 포터이며, 2006년 월드 비어 컵에서 금메달을 수상한다. 민타임은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수제 맥주 중에 하나이고, 우리나라에도 2013년 11월에 수입해 들어왔다. 매달 새로운 리미티드 에디션이 출시되어, 병마다 새겨진 배치 번호가 컬렉터를 자극한다.
투어 프로그램의 신청자들은 안으로 들어와 한 사내와 마주한다. 투어 가이드인데 성격이 완전 호탕하다. 쇼맨십도 뛰어나서 관광객들에게 농담도 구수하게 던진다. 동양인이 나 뿐이어서, 한국에서 왔다니까 바로 ‘갱남 스타일’ 춤을 추며 날 맞이한다. 이 양조장 투어 프로그램은 다른 양조장에 비해 이동거리를 짧다. (다 못 알아들었지만) 민타임 만의 철학과 제조방법 등을 자세하고 재미있게 들을 수 있었다. 맥주 애호가라면 꼭 추천하는 투어 코스다. 전체적으로 여기 맥주는 기본에 충실하다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세상에 기준이 되는 맥주를 만들고자하는 기업 모토에 부합하는 맥주다. 대중성에 무게를 맞추고, 스페셜 에디션에서 남은 맥덕들의 기호를 충족해 준다. 병 디자인도 평범하지 않다. 아래가 불룩해 안정적으로 보였다. 맥주 양조장 투어는 참여 자체가 흥이 나서, 장점만 확대 해석되어 보인다. 행복한 그리니치의 마지막 여행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