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8일~24일, 유럽 연합과 그리스가 공동 출자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된 서부 그리스 와인 투어에 참가했다. 와인의 역사가 시작된 곳에서 가장 현대적인 그리스 와인을 만났으며, 그 무한한 가능성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다. 이처럼 좋은 기회를 마련해준 서부 그리스의 주지사 넥타리오스 파르마키스(Nektarios Farmakis) 씨와 든든한 가이드였던 그레고리 미하일로스(Gregory Michailos/WSET Diploma) 그리스 와인 에듀케이터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아하이아(Achaia)와 일리아(Ilia)는 그리스 본토의 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The Peloponnese)의 서쪽에 위치한다.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Athens)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을 가지며, 발이 닿는 곳마다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한 고고학적 유적지가 펼쳐져 있다. 또한,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아름다운 해변은 물론, 험준한 산과 숲, 강과 동굴 등 놀라운 자연 명소로 사계절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수천 년의 와인 문화를 꽃피운 그리스에서 아하이아와 일리아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고대부터 이어온 포도 재배 및 와인 양조와 관련된 많은 고고학적 흔적이 이곳에서 발견되면서, 인류의 와인 역사 그 시작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세대의 젊은 와인메이커를 주축으로 독특한 테루아를 온전히 표현하는 흥미로운 스타일의 와인을 생산하며 그리스 와인의 새로운 물결을 만들고 있다.
아테네에서 자동차로 2~3시간을 달리면, 험준한 산과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금빛 모래 해변이 공존하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북서쪽, 아하이아(Achaia)와 일리아(Ilia)에 닿는다. 이동하는 내내 한쪽에서는 눈이 시리게 아름다운 바다가 펼쳐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깎아지른 듯한 산맥이 이어져 지루할 틈이 없었다.
>> 아하이아(Achaia) <<
먼저 아하이아의 주요 도시인 파트라(Patras)에 머물며 대표 와이너리 2곳을 방문했다. 아하이아는 바다와 산맥의 영향을 모두 받는다. 바다와 가까운 포도밭은 풍요롭고 비옥한 토양과 따뜻한 중기후를 갖춰 가성비 좋은 와인을 생산한다. 반면, 가파른 경사의 산악 지역은 다양한 고도와 방위, 토양에서 뛰어난 품질의 와인을 만날 수 있다. 유럽 전체를 통틀어 가장 고도가 높은 포도 재배 지역이 바로 아하이아의 애기알리아 언덕에 위치하는데, 산맥이 남쪽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을 막아주어 지중해성 기후의 열기로부터 포도밭을 보호한다.
아하이아에는 PGI 아하이아(Achaia)와 PGI 슬로프스 오브 애기알리아(Slopes of Aigialia), 2개의 PGI가 있다. 또한, 4개의 PDO가 있으며 PDO 파트라(Patra), PDO 머스캇 오브 파트라(Muscat of Patra), PDO 머스캇 오브 리오 파트라(Muscat of Rio Patra), PDO 마브로다프네 오브 파트라(Mavrodaphni of Patra)이다.
‘로디티스(roditis) 포도의 왕국’으로 알려진 PDO 파트라(Patra)는 넓은 지역에서 매우 다양한 지형과 기후를 가지고 있다. 로디티스 100% 단일 품종으로 와인을 생산하는 그리스의 유일한 지역으로, 화이트 와인만 생산하며 대부분이 드라이 스타일의 와인이다.
PDO 머스캇 오브 파트라(Muscat of Patra)와 PDO 머스캇 오브 리오 파트라(Muscat of Rio Patra)에서는 모두 화이트 머스캣만 생산하며, 햇볕에 말린 포도를 사용하거나 양조 과정 중 주정 강화한 스위트 와인을 생산한다. PDO 머스캇 오브 파트라(Muscat of Patra)는 넓은 지역에서 많은 양을 생산하며, 따뜻한 기후의 영향으로 힘 있고 잘 익은 와인 스타일을 보인다. 반면, PDO 머스캇 오브 리오 파트라(Muscat of Rio Patra)는 매우 작은 규모의 특정 지역에서 매우 제한된 생산량을 보이며, 바다에 가까이 위치하여 더 우아하고 신선한 스타일의 와인을 생산한다.
마지막으로 PDO 마브로다프네 오브 파트라(Mavrodaphni of Patra)는 알코올 도수 15~22% abv의 ‘스위트 주정 강화 레드 와인’만을 생산한다. 마브로다프네(Mavrodaphni)가 주품종이며, 블랙 오브 코린트(Black of Corinth) 품종을 블렌딩하여 우아하고 구조감 좋은 마브로다프네에 달콤함을 더 하기도 한다. 오크 배럴에서 최소 12개월 숙성하여 복합적인 풍미가 두드러지며, 올드 바인 또는 아주 오래된 와인을 부분적으로 블렌딩하여 뛰어난 품질의 와인을 생산하기도 한다.
– ACHAIA CLAUSS –
아하이아 클라우스는 매년 20만여 명의 방문객이 찾는 이 지역 최고의 관광 명소 중 하나다.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로, 1861년 독일 바이에른 출신의 구스타브 클라우스(Gustav Clauss)에 의해 설립되었다. 독일 무역 회사에서 일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 그는 아름다운 자연과 훌륭한 와인에 매료되었다. 그는 곧 작은 포도원을 구입하여 자신이 소비하기 위해 와인을 생산하였고, 그의 와인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게 되면서 대규모 와이너리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는 곧 그리스는 물론, 유럽을 중심으로 국제 시장에서 명성을 얻게 된다.
1908년, 그가 사망한 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지만, 와이너리는 전통적인 와인 생산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마브로다프네(Mavrodaphni) 품종 생산의 선두 주자인 아하이아 클라우스는 마브로다프네 외에도 무스캇(Muscat), 아기르기티코(Agirgitiko),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등을 사용하여 레드, 화이트, 로제 및 주정 강화 와인을 생산한다.
19세기 석조 건물, 특히 거대한 조각 와인 통이 놓여진 저장고에 들어서는 순간,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압도된다. 2차 세계 대전 중 대피소로 사용되었던 이곳은 100년 이상 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마브로다프네 와인을 포함하여 오래된 빈티지 와인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와이너리 투어가 끝나고, 이 지역 8개 와이너리의 와인들을 맛보았다. 와이너리 관계자에게 마브로다프네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국제 품종과의 비교를 부탁했다. 어떤 이는 우아한 붉은 과일 풍미의 피노 누아(Pinot Noir)를, 그리고 누군가는 허브와 향신료의 캐릭터가 카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을 연상시킨다고 답했다.
– TETRAMYTHOS WINERY –
최근 가장 떠오르는 부티크 와이너리인 테트라미토스 와이너리는 애기알리아 슬로프(Aigialia Slopes) 지역, 고도 600~1,050m 경사면에 포도밭이 위치한다. 높은 고도의 영향과 함께 고린도 만(the gulf of Corinth)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신선하고 균형 잡힌 포도의 생산을 돕는다.
로디티스(roditis), 말라구지아(malagousia), 아기오르기티코(agiorgitiko) 등 토착 품종과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 메를로(merlot),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등 국제 품종이 유기농법으로 재배되며, 현대 기술로 완벽한 환경에서 떼루아의 특성을 온전히 반영하여 양조된다. 특히, 로디티스 품종을 사용한 레치나(retsina) 와인은 암포라에서 숙성하여 과거의 전통을 현대의 기술로 이어가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애기알리아 포도 재배 지역은 높은 고원 지대에 펼쳐져 있으며, 석회암을 중심으로 매우 다양한 토양이 구성되어 있다. 산에는 많은 샘이 위치하고 산을 타고 천천히 녹아내린 눈이 바다로 이어지면서 물을 끌어오기가 비교적 쉽다. 이러한 환경적인 혜택 덕에 가장 큰 유기농 생산 지역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곳에서도 주변 8곳의 와이너리 생산자를 만나 그들의 와인을 시음했다. 비교적 서늘한 기후의 영향으로 와인은 전반적으로 신선한 과실 풍미가 돋보이고, 상쾌한 산도가 매력적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토착 품종인 로디티스와 말라구시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품종 중 하나인 로디티스는 분홍색 껍질을 가지고 있으며, 높은 클론 다양성으로 다채로운 스타일의 와인이 생산된다. 특히 고지대의 애기알리아 언덕에서 생산되는 로디티스 알레푸(Roditis Alepou) 클론은 뛰어난 품질로 유명하다. 그리고 최근 주목을 받는 말라구시아는 꽃과 허브, 머스캣 풍미를 가진 아로마틱 품종으로, PGI 슬로프스 오브 애기알리아(Slopes of Aigialia)의 산악 지역에서 생산한 와인은 상큼한 산도와 허브향과 민트 향이 더 돋보인다.
>> 일리아(Ilia) <<
아하이아의 남쪽, 일리아는 서쪽으로 키파리시아 만(Gulf of Kyparissia)과 이오니아 해(Ionian Sea)를 마주하고 있어 여름에도 높은 습도와 강우량을 보인다. 험준하고 가파른 산악 지역이 많은 아하이아에 비해 일리아는 해발 400m 정도의 중간 수준 고도에 포도원이 있으며, 해수면 근처의 비옥한 저지대에 포도밭이 조성된 것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일리아에는 PDO가 없으며, PGI 일리아(Ilia)와 PGI 레트리노이(Letrini), 2개의 PGI가 있다.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그르나슈(Grenache), 레포스코(Refosco) 등 국제 품종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로디티스(Roditis), 마브로다프네(Mavrodaphni), 아브구스티아티스(Avgoustiatis) 등의 토착 품종으로도 훌륭한 품질의 와인이 생산된다.
그리고 이곳에는 그리스 방문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올림픽의 발상지 ‘올림피아(Olympia)’가 위치한다. 기원전 1000년경, 제우스를 숭배하는 신전이 있던 신탁 장소로,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 벌였던 행사가 올림픽이다. 유적지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옛날 모습을 상상에 맡겨야 하지만, 1989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더디지만 복원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고대 올림피아의 고고학 발굴 현장에서 포도를 밟던 압착소인 레노스(Lenos)가 발견되면서 와인 양조 역사의 시작 페이지를 다시 쓰게 되었다.
– MERCOURI ESTATE –
메르쿠리 에스테이트는 1800년대 후반에 설립된 오랜 역사의 와이너리다. 1870년, 이탈리아 프리울리(Friuli)에서 들여온 레포스코(Refosco) 포도나무를 식재하여 처음 와인을 만들었으며, 19세기 말부터 이미 유럽 국가에 수출했다. 지금도 포도를 생산하는 140년 이상 된 레포스코 올드 바인은 베레종(Veraison) 이전에 포도송이를 솎아내어 수확량을 관리하면서 집중도를 높인다.
이곳은 현재 4대를 이어오며 역사적인 유산의 양조 전통을 되살리면서도 현대적이고 체계화된 시스템에서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레포스코 외에도 15종 이상의 다양한 토착 및 국제 품종을 재배하고 있다. 또한, 콜로니얼 스타일과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은 아름다운 건축물로 대표적인 와인 관광지로 손꼽힌다. 아주 오래된 시설과 도구들이 잘 보관되어 있고, 그 옛날의 모습을 온전히 담은 사진들을 하나하나 감상하며 마치 잘 관리된 와인 박물관을 투어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번 투어의 마지막 저녁, 일리아의 와인 생산자들은 그들의 다채로운 스타일의 와인을 선보였다. 그리스의 주요 품종 중 하나인 아시르티코(Assyrtiko)는 이곳에서 더 과실 풍미가 좋고 미네랄리티함이 두드러진 스타일로 완성된다. 아로마가 매우 강렬하지는 않으나 입안에서의 질감이 좋고, 특히 숙성되면서 페트롤과 같은 미네랄과 견과류의 복합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일리아 서부 해안에서 발견되는 적포도 품종, 아브구스티아티스(Avgoustiatis)는 잘 익은 붉은 과일과 허브, 후추 등의 풍미에 산뜻한 산도와 중간 바디를 가지며, 산뜻하면서 향긋한 과일 향을 보여주는 로제 와인으로도 생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