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페스티벌의 계절이 돌아오고 있다. 봄에는 페스티벌이라는 공식이라도 세워져 있는 걸까. 4, 5월 동안 열리는 페스티벌의 수는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 연인, 가족, 친구와 더 멋진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페스티벌은 가득 찬다.
비단 음악 페스티벌뿐만 아니라 발레, 오페라, 연극 페스티벌 등 공연 예술계는 봄을 맞이하느라 바쁘다.
나도 몇 개 페스티벌의 표를 예매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티켓팅 하는 순간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다. 이번엔 어떤 가수들이 내 마음을 전율시키고 어떤 공연이 내 눈을 빛나게 해줄지. 생각만으로도 벅차다.
수많은 페스티벌 중 봄과 가장 잘 어울리는 페스티벌을 뽑을 수는 없다. 하지만 난 재즈 페스티벌을 가장 기대한다. 따스한 바람에 섞여오는 재즈 선율은 감미롭다.
우리나라에는 양대 재즈 페스티벌이 있다. 봄에 열리는 서울 재즈페스티벌과 가을에 열리는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 난 재즈에 문외한이라 이 두 페스티벌의 비교는 다른 이에게 미루기로 하자. 하지만 재즈를 잘 모르는 나도 해마다 재즈 페스티벌을 방문해 멋진 추억을 가져온다. 봄과 가을 이 두 계절에 걸쳐 재즈 페스티벌을 갈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재즈가 울려 퍼지는 잔디밭과 흥겨운 나머지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는 사람들. 행사 부스에서 퍼져 나오는 음식 냄새.
하지만 이 감동적인 순간들을 뒷받침해주는 건 바로 술이다. 그중 재즈 페스티벌에 가장 어울리는 술을 뽑으라고 하면, ‘와인’을 뽑을 것이다. 왜냐고? 영화관에는 캔 맥주가 어울리듯이 재즈가 울려 퍼지는 잔디밭에는 와인이다. (이건 정말 순전히 개인의 취향이다)
페스티벌에 어울리지 않는 술은 없지만, 난 항상 와인을 제일이라 친다. 디오니소스의 영향인 걸까?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인간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난 애자(哀子)다.
헤라의 질투로 어머니가 죽은 후 아버지 허벅지 사이에서 키워지다, 이모 부부 손에 맡겨졌다. 하지만 그 부부도 헤라의 저주로 죽게 되고 님프들 사이에서 성장한다. 그는 그곳에서 포도 재배법과 즙을 짜내 술을 만드는 기술을 터득했다. 후에 그리스에 돌아온 그는 술의 신으로 추앙받게 된다. 그를 추앙하는 무리의 행렬은 [디오니소스 축제]로 바뀌게 된다. 그 무리에는 ‘미친 여자들(Mainades)’와 본능과 욕망에 충실한 사티로스들이 있었다. 그들은 한 손에는 뱀이나 포도송이를, 다른 손에는 탬버린처럼 생긴 악기 팀파논을 들고 술에 취한 채 광란의 춤을 추곤 했다.
고대 그리스에는 디오니소스 종교가 존재했다. 그 광란의 축제 안에는 여자 신도들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제물로 바쳐진 짐승, 어린아이를 산채로 뜯어먹고 그 피를 마셨다.
B.C 7 세기경 디오니소스 신앙은 이미지가 크게 반전된다. 맹목적인 광기 어린 축제가 아닌 정상적인 노동으로 회귀하기 위한 잠깐의 질서 파괴(즉 스트레스 해소)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우리가 아는 그리스 3대 비극 시인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는 이 순화된 축제의 희, 비극 경연대회 우승자이다.
각박한 현실 안에서 사람들은 자의식에 쉽게 노출된다. 오랫동안 지속한, 개인과 사회적 개인에 대한 강조는 사람들이 ‘함께함’을 잊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자의식이라는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고 집단화의 즐거움에 빠져들 필요가 있다. 페스티벌은 완벽한 대안이다.
사람들은 축제 안에서 평상시 필터 없이 마주해야 했던 자기 자신을 놓는다. 밤, 술, 음악. 이 세 가지가 합쳐지는 순간 사람들은 군중 속에 녹아들며 희열을 느낀다. 짧은 순간 디오니소스적 중독에 빠지고, 오르페우스 적 환상에 녹아들어 현실 속 자신을 잊고 광란에 빠진다. 페스티벌이 끝나면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겨준 추억들은 일 년간 현실을 지탱해주는 목발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