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루쪼 Abruzzo와 몰리세 Molise를 여행할 때, 마침 이탈리아의 범 국가적인 와인 축제라 말할 수 있는 칸티네 아페르테 Cantine Apert를 경험할 수 있었다.
칸티네 아페르테는 영어로 이야기하면 “Open Cellars” 즉, 와이너리를 개방한다는 의미다. 기간은 5월 마지막 주 주말, 단 이틀. 보통 와이너리들이 주말에 문을 닫는 곳들이 꽤 되는데 이 시기만큼은 이탈리아 전국 방방곡곡 많은 와이너리가 셀러를 활짝 개방하고 손님들을 맞이한다.
다만 와이너리는 <Movimento Turismo del Vino>라 불리는 단체에 속해 있는 곳들로 제한이 되기 때문에, 혹 가야 Gaja라든지, 비온디 산티 Biondi Santi 같은 레전드 와이너리들을 기대하면 안 된다. 물론 행사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와이너리들이 그 주를 대표하는 곳들로 리스팅 된다. 그 때문에 진정으로 어떤 주의 와인을 이해하려는 이들에게는 최고의 행사가 아닐 수 없다.
어디든 행사 리스트에 적힌 와이너리를 방문하면 ‘Movimento Turismo del Vino’라 쓰여 있는 글라스를 5유로에 살 수 있다. 그 글라스만 있으면 지역의 어느 와이너리든 약속 없이 방문해서 와인을 마음껏 테이스팅할 수 있다. 다만 와인은 와이너리에서 정한 것만 무료로 맛 볼 수 있고, 다른 주로 벗어나면 그 주의 이름이 쓰인 글라스를 새롭게 구매해야 한다.
우리 부부가 이 행사를 통해 방문한 와이너리는 총 6곳이었는데, 와이너리마다 축제를 위해 준비한 여러 이벤트가 있어서 계속되는 시음과 와이너리 투어도 질리지 않고 즐길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그 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햄이나 치즈 등을 페어링 해 볼 수 있다든지, 무료로 와이너리 투어를 한다든지 등이다.
간혹 리스트에 있는 와이너리가 사정에 의해 문이 닫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꼭 전화로 오픈 여부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는 것을 추천한다. 우리 부부도 꽤 기대를 했던 와이너리가 참여 목록에 있어서 먼 길을 운전해서 갔으나, 굳게 닫힌 문을 보고 허탈하게 오후 일정을 날린 경험이 있다. 이런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이 행사 덕분에 아브루쪼와 몰리세에서는 별도의 예약 없이 와이너리를 방문해서 순수하게 행사 참가자의 입장에서 와인을 즐길 수 있었다.
방문했던 와이너리와 와인에 관해서 설명하기 전에 아브루쪼와 몰리세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보자.
본래 두 지역은 하나의 주였다고 한다. 1963년까지 ‘Abruzzi e Molise’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가 이후 분리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아브루쪼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몰리세는 아브루쪼에 비해서 와인에 대한 인지도나 양 자체가 매니악하다. 아브루쪼가 생산량에서 20개 주 중 5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몰리세는 뒤에서 5위(16위)를 차지하고 있다. 다만 아브루쪼의 경우도 생산량의 1/3 정도만이 DOC(G), 그러니까 퀄리티 와인으로 만들어진다. 이 전에 소개한 마르케의 DOCG가 5개인데 반해, 아브루쪼는 하나, 몰리세는 없다는 것에서 어느 정도 지역 차가 있음을 미리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아브루쪼를 여행하고 느낀 점은 참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아브루쪼는 주 전체의 1/3이 국립공원과 자연보호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3개의 국립공원과, 1개의 주립공원, 그리고 38개의 자연보호지역이 있다. 이는 유럽에서도 가장 큰 규모다. 별명도 “유럽에서 가장 깨끗한 지역(Greenest Region in Europe)“. 이곳에는 유럽에서 살고 있는 모든 종의 무려 75%와, 검독수리, 아브루쪼 사모아, 아펜니노 늑대, 마르시칸 갈색 곰 같은 희귀종들이 서식하고 있다.
또한 유럽 최남단에 있는 빙하인 칼데로네 빙하 Calderone glacier도 아브루쪼에 있다. 이탈리아 중앙에 빙하가 있다는 것이 쉽게 상상이 되지는 않지만, 아르루쪼는 해안가를 제외하고 내륙은 대체로 산악지대와 불모지가 많은 편이다. 아펜니노산맥의 최고봉인 그란 사쏘 Gran Sasso(2,912m)를 비롯해 마이엘라 Maiella(2,793m) 같은 고봉들이 즐비한 것도 이 때문. 무척이나 풍부한 자연유산을 지닌 주이다.
이탈리아의 외교관이자 저널리스트인 ‘프리모 레비 Primo Michele Levi’는 아브루쪼를 방문했을 때 “forte e gentile(강하면서 온화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이 지역의 아름다움과 사람들의 강한 기질을 비유한 것이라고 한다. 이 ‘포르테 에 젠틸레’가 현재 아브루쪼의 모토로 쓰이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참 멋진 말이라고 생각한다.
와인에서는 단연 몬테풀치아노가 이 지역을 대표한다. DOC로는 몬테풀치아노 다브루쪼 Montepulciano d’Abruzzo가 있는데 와인 생산 지역 대부분을 커버할 정도로 범위가 넓다. 다만 여기에 콜리네 테라마네 Colline Terramane가 붙으면, 아브루쪼의 유일한 DOCG가 된다. 콜리네 테라마네는 ‘테라모 언덕’이라는 뜻이다. 아브루쪼의 테라모 인근의 언덕에서 재배되는 몬테풀치아노(+산지오베제)에만 DOCG가 부여된다. 일반 버전은 2년 숙성, 리세르바를 달려면 반드시 3년을 숙성해야 한다.
대표적인 화이트 와인에는 트레비아노 다브루쪼 Trebbiano d’Abruzzo DOC가 있다. 약간 헷갈릴 수도 있는데, 단어에 ‘트레비아노’가 들어갔다고 해서 이 와인이 반드시 트레비아노만 메인으로 쓰인다는 것이 아니다. 아브루쪼에서 많이 재배되는 봄비노 비앙코 Bombino Bianco를 여기서는 그냥 트레비아노 다브루쪼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DOC의 메인 품종에 트레비아노가 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에 두 화이트 품종을 메인으로 함께 쓰는 DOC라고 이해하면 편하다.
참고로 봄비노 비앙코는 19세기 초 로마 인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대량 생산용 포도 품종이었다. 이 품종의 이름인 ‘Bombino’ 또한 이탈리아어인 ‘Bonbino(부채 탕감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좋은 생산량으로 말미암아, 힘겹게 삶을 유지했던 농부들의 빚을 갚아주던 효자 품종이었던 셈이다.
다음편에 바로 이어서 몰리세와 와이너리 이야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