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와인 그 자체로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 이 글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내 앞에 있는 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안다면 빈티지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티지는 여러 사람들에게 여전히 재미있는 주제이다. 올여름 토스카나와 피에몬테의 29개 와이너리를 방문하면서 29명의 와인 메이커로부터 들은 최근 빈티지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정리해봤다.
숙성이 잘 된 네비올로(Nebbiolo)와 산지오베제(Sangiovese)는 구분하기 어렵다. 이는 반대로 숙성이 덜 된 네비올로와 산지오베제는 차이가 확연하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이 확연함은 점점 그 격차가 줄어들고 있다.
브루넬로(Brunello)와 바롤로(Barolo)는 출시 후에도 좀 더 숙성이 필요한 와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근 빈티지일수록 숙성이 잘되어 출시되고 있다. 이런 추세를 완연하게 보여준 빈티지가 ‘2015’다. 2015는 최근 10년간 평균의 기준으로는 약간 더웠던 빈티지다. 하지만 이제 높은 수준의 와인메이커들은 더운 빈티지를 완벽한 밸런스로 재탄생시키는 방법을 안다. 심지어 많은 바롤로, 브루넬로가 출시되자마자 맛있다.
제임스 서클링은 무려 16개의 100점을 브루넬로 2015 빈티지에 난사했다. 그만큼 2015가 완벽한 빈티지일까? 이건 어디까지나 음용성을 좀 더 중시하는 서클링의 기준이다. 우아함의 기준을 들이대면, 2015의 장점은 조금 희석된다. 어차피 점수는 객관성으로 포장한 자기 주관 아닌가.
산지오베제보다 더위에 민감한 네비올로는 우아함이 결여되면 떫은 특징이 도드라지는 그저 힘 좋은 품종에 불과하다. 타닌의 양과 질감은 다르지만, 2015 바롤로는 마치 섬세한 산지오베제처럼 음용성과 밸런스에서 돋보이는 경우가 많다. 따자마자 과실과실한 바롤로, 은근 많아지고 있다. 2015 빈티지에서 보이는 (사실 그 전부터 변화는 이뤄지고 있었지만) 바롤로와 브루넬로의 새로운 모습을 이해해야 2016-2020 빈티지 특성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된다. 언제나 10년 이상 기다려야 하는 와인들이 이제는 아니다.
역대급 빈티지인 2016, 남들이 좋다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하지만 지금 마시기 힘든 와인이 많다. ‘나중에 좋아지겠지’하며 셀러에 넣어둔 분들이 많겠지만 2010과 비슷하다. 많은 2010 바롤로는 아직도 안 열리거나 열리더라도 뭔가 아까운 느낌이 든다. 브루넬로는 조금 더 일찍 열리겠지만, 수확 연도로부터 10년이 지나도록 안 열리는 와인이라면 기다리지 못한 내가 문제일까, 보여주지 않는 와인이 문제일까? 이런 빈티지는 여러 병을 셀러링해서 1-2년마다 오픈해 그 변화를 즐기는 것도 방법 중 하나지만, 이런 여건을 갖출 수 있는, 혹은 갖추고자 하는 MZ세대가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다. 요즘 와인을 즐기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조금 느껴진다.
2017 빈티지는 바롤로 지역 기준(출처: barolomga360.it) 역대 최고 더웠던 빈티지이다. 2003과 비교해도 더 더웠다. 조금 과장해서, 말라서 불타버린 느낌이 들었던 2003 빈티지 와인을 경험한 분들은 2017 빈티지를 마시기도 전부터 선입견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심한 반전은, 갓 착즙한 체리 주스 같은 상큼함을 2017 바롤로에서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브루넬로 2017 역시 (아직 출시 전이지만) 파워보다는 잘 익은 과실이 돋보인다. 입안에 꽉 차는 과실은 산도가 동반되어야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다.
많은 생산자가 2017년은 정말 더웠고 진짜 비도 안 왔지만, 밤 만큼은 서늘했다는 점을 좋은 산도의 이유로 설명하면서 강조했다. 마쏠리노의 프랑코는 겨울에 눈이 많이 왔던 것이 좋은 밸런스에 영향을 끼친 것 같다고도 했다.
카프릴리의 쟈코모는 2017년에 포도나무 잎을 제거하지 않고 햇빛으로부터 포도를 보호하는 역할로 잎을 그대로 놔두었다고 한다. 실제로 보면 포도를 잎으로 싸매는 것처럼 보인다. 곰팡이가 생기지 않도록 바람이 통할 수 있게 잎을 요령 있게 쳐주는 게 포인트. 말이 쉽지 일일이 손으로 다 해야 한다.
산 지우스토 아 렌텐나노의 루카는 2017년에 잎을 그대로 두는 것뿐만 아니라 그린 하베스트(송이솎기)를 되도록 하지 않았고, 최근에는 우박 방지용 그물도 일부 설치해 운영 중이다. 우박을 막아줄 뿐 아니라 햇빛도 살짝 가려준다면서.
프로두토리 델 바르바레스코의 알도는 자기가 일을 시작한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알코올 13.5도를 넘는 바르바레스코를 찾기 힘들었는데, 이제는 14.5도보다 낮은 와인을 찾기가 어렵다며 푸념했다. 하지만 그의 푸념 따위 상관없이 가격은 급상승 중이다. 바르바레스코는 2016보다 2017이 더 좋다. 알도의 의견이다. 실제로 리제르바 기준 비교 테이스팅에서도 2017이 2016보다 훨씬 맛있었다. 2016이 10년, 20년 후 더 좋아질 걸 알지만 10년, 20년 후 이 바틀이 내 손에 있을 꺼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 맛있는 게 맛있다.
2018 빈티지는 크뤼급 와인보다는 기본급 와인에서 생산자의 실력이 가늠되리라 예상된다. 봄과 수확철에 비가 생각보다 많이 왔다. 베레종 기간에 날씨가 좋아 포도의 퀄리티는 전반적으로 좋으나, 생산자가 넋 놓고 있었으면 의외의 망빈으로 기록될 수 있었다. 많은 생산자가 리제르바나 크뤼급 와인의 생산보다는 기본급 와인에 집중했고, 브루넬로나 바롤로를 만들 포도로 엔트리급 와인을 만든 경우도 있었다. 이런 빈티지에서 진정 혜자스러운 와인이 나온다는 건 알만한 상식.
2019은 뉴 클래식의 탄생이다. 아직 배럴에서 가늠이 쉽지 않은 상태지만, 적어도 맛있음은 보장이다. 2010, 2016과 같은 기존의 클래식 빈티지보다는 좀 더 마시기 쉬운 점이 매력이다. 앞으로도 바롤로와 브루넬로는 더욱더 마시기 편해질 것이다. 날씨의 영향도 분명히 있지만, 포도 재배와 양조법이 해가 갈수록 발전하고 있으며, 이에 생산자가 와인을 어떻게 디자인하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당신에게 셀러가 있다면, 구조가 좋은 2019 랑게 네비올로나 로쏘 디 몬탈치노를 좀 쟁여 두길 권해본다. 이런 엔트리급 와인의 지금 알코올 도수가 90년대 브루넬로 바롤로의 도수와 비슷하거나 더 높다. 2~3년만 지나도 더욱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가능성이 크다. 일단 가격 부담이 없으니깐.
코로나 빈티지인 2020은 새로운 시도가 많이 이뤄졌다. 어딜 가지 못하니깐 셀러와 밭에서만 지낸 생산자가 대다수였다. 전반적으로는 2019보다 향긋하고 가벼운 스타일을 보여주는데, 날씨 자체가 환상적이라기보다는 생산자가 어딜 가지 못하는 심심함과 싸우며 밭과 셀러에서 디테일을 극도로 살린 결과물들이 흥미로웠다. 그만큼 훌륭한 와인이 곳곳에서 보였다는 의미. 2024-25년에야 출시가 될 테지만, 매우 재미있는 빈티지가 될 것 같다.
멧 크레이머는 2015년 자신의 저서 트루 테이스트(True Taste: the Seven Essential Wine Words)에서 일곱 개의 단어를 강조했다. 통찰, 조화, 질감, 층위, 기품, 놀라움, 미묘함. 브루넬로와 바롤로는 빈티지와 상관없이 이 모든 ‘진짜 맛’을 보여줄 수 있다. 이 글은 이탈리아 와인의 구체적인 재미를 즐기기 위한 가이드 정도이다. 구체적일수록 경이로움은 줄어든다는 점을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