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월드컵이 시작되었다. 멕시코가 피파 랭킹 1위 독일을 꺾었고, 서울시 도봉구보다 인구가 적다는 아이슬란드가 아르헨티나와 무승부를 기록하는 등 이변이 속출하고 있는 와중에 눈길을 끄는 기사가 하나 있었다. 월드컵 개막일인 6월 15일에 열린 우루과이와 이집트의 경기에서 눈부신 선방으로 최고의 수훈 선수 (Man of the match)로 선정된 이집트의 골키퍼 무함마드 시나위가 ‘수훈 선수상’ 수상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술 마시는 것을 금하는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으로서 맥주 회사인 버드와이저가 수여하는 상은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순간 기원전 수천 년 전부터 물처럼, 밥처럼 맥주를 마시며 맥주의 힘으로 거대한 피라미드를 세웠던 이집트 왕국이 어쩌다가 술을 금하는 이슬람 국가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역사적인 사정은 뒤로하고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받는 상의 스폰서가 주류회사라면 이슬람 신도로서 고민이 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경기가 시작될 무렵이면 펍에 모여 축구 중계와 함께 맥주를 마시는 것이 일상인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는 물론, 월드컵 기간이면 막연히 기대감이 높아지는 한국의 치킨과 맥주 업계의 모습만 보아도 월드컵과 맥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게다가 피파 입장에서는 2002년 한일 월드컵부터 꾸준히 수훈 선수상을 후원해 온 버드와이저를 배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일례로, 브라질에서는 축구 경기장에서의 폭력 문제로 2003년부터 경기장 내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금지해 왔으나, 월드컵 경기장에서 축구를 관전하며 맥주를 마시는 것이 오랜 전통이라는 피파의 강력한 주장 때문에 결국 브라질 정부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 기간 경기장에서의 맥주 판매를 허용하게 되었다. 비슷한 상황인 러시아 또한 푸틴의 통 큰 결단으로 월드컵 경기장 내에서 버드와이저 맥주 판매가 가능해졌다. 이런 상황이니, 이슬람 신자인 선수가 수훈 선수상을 거부하는 광경은 앞으로도 종종 벌어질 듯하다. 하지만 2022년 월드컵이 열리는 카타르는 공공장소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아예 금지된 이슬람교 국가이다. 과연 피파와 카타르는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
피파 월드컵 공식 스폰서인 버드와이저에 대한 반감은 맥주를 사랑하는 나라인 독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기간 피파는 경기장 내에서는 공식 스폰서인 버드와이저의 맥주만 판매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맥주 순수령을 지켜왔고 축구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한 독일인들에게 그들의 월드컵에서 옥수수나 쌀을 섞어 만드는 버드와이저를 마셔야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사실 쌀, 옥수수, 설탕을 섞어 맥주를 만들면 ‘맥주’라는 이름도 붙일 수 없는 나라가 독일이니, 독일 월드컵을 상징하는 맥주가 버드와이저라는 사실은 그들의 맥주 부심에 상처를 낼 만하다. 결국 독일 월드컵 경기장에서는 버드와이저와 함께 독일의 지역 맥주인 비트버거 맥주가 함께 판매되었다.
독일 월드컵 이후 2008년 다국적 주류기업 AB인베브가 버드와이저를 인수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버드와이저는 계속해서 피파 월드컵의 공식 스폰서로 남아있게 된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당시 AB인베브는 이미 전 세계 맥주 시장의 25%를 장악하고 있었고 버드와이저를 비롯해 셀 수 없이 많은 지역 맥주회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2010년 남아공 월드컵부터는 피파 월드컵을 자신들이 보유한 지역 맥주 회사 홍보의 장으로 이용하게 된다. 예를 들면 아르헨티나 경기에는 아르헨티나 맥주인 킬메스 (Quilmes)를, 브라질 경기에서는 브라흐마 (Brahma) 맥주를 홍보하는 식이다.
이번 월드컵부터는 ‘우리 가게에서 월드컵 보세요’와 같은 홍보를 하려면 개인 가게라도 텔레비전 1대당 10-20만 원의 중계료를 내야 한다고 한다. 이쯤 되면 월드컵의 진짜 목적이 돈벌이와 글로벌 기업의 홍보인지, 세계인의 축제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지방에 살고 있던 나는 온통 붉은 물결이 넘실대는 광화문의 흥분된 광경을 애써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우리들을 위해 강당을 개방해 월드컵을 중계하기로 한 학교의 전격적인 결정 덕분에 2002년 월드컵은 처음으로 야식과 맥주를 먹으며 축구란 것을 응원했던 여름날의 추억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관공서와 비영리단체의 무료 거리응원이라도 500명 이상이 모이면 상업성 심사를 미리 받아야 한다고 하니, 전국 방방곡곡의 응원 열기가 과연 예전만큼일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피파에 묻고 싶다.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월드컵이 진정 여러 나라의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는 세계인의 축제라면 인류의 문화적 다양성이 그대로 녹아있는 맥주야말로 그 정신의 상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월드컵에서 문화적 다양성이란 코트디부아르나 트리니다드 토바고와 같이 우리에게 생소한 나라의 이름을 알게 되는 정도인지도 모른다. 월드컵이 다국적 기업의 손쉬운 홍보 수단이 아닌, 다양한 지역 맥주와 저마다의 독특한 ‘술과 함께하는 응원문화’를 알리는 축제의 장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일까?
이번 러시아 월드컵을 기념하여 영국의 애드남스 브루잉과 전 세계 5개 대륙의 5개 브루어리가 손잡고 월드컵 맥주 ‘바이시클킥 쾰쉬’를 개발했다. 유럽에서는 영국 애드남스, 북미에서는 ‘펫타이어’ 로 유명한 미국의 뉴벨지움,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베어드 비어(Baird beer), 남미에서는 브라질의 보드브라운 (Bodebrown), 아프리카에서는 남아공의 데블스픽 (Devil’s peak), 중미에서는 멕시코의 프리머스 (Primus) 브루어리가 같은 레시피를 사용해 저마다의 바이시클킥 맥주를 만든다. 같은 재료와 레시피라도 누가 어디서 만드냐에 따라 맥주 맛은 조금씩 달라지기 마련이니, 여섯 브루어리의 바이시클킥 맥주를 모두 모아 토너먼트를 해 보는 것도 월드컵을 통해 몰랐던 전 세계의 브루어리를 알아가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래서 준비했다. 월드컵에 진출한 32개국이 벌이는 한 달간의 드라마를 함께 할 다양한 지역 맥주를 말이다. 벨기에와 잉글랜드의 경기를 벨기에의 수도원 맥주와 잉글랜드의 수제 맥주와 함께한다면 그 또한 월드컵을 즐기는 또 다른 재미가 되지 않을까? 더욱이 페이스북의 ‘비어 마스터 클럽’과 같은 동호회에서는 다양한 수제 맥주와 월드컵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이벤트 소식도 알 수 있으니, 이번 월드컵은 참가국의 국기만큼이나 다양한 맥주의 세계로 빠져보자.
이곳에서는 월드컵 진출 32개국 중 10개국의 맥주를 소개해 보았다. 이들 맥주가 아니더라도 가까운 바틀샵을 방문한다면 기꺼이 각 나라의 맥주를 소개하며 눈을 반짝일 맥덕 사장님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월드컵 32강 진출국의 독특한 맥주를 마셔보자!
A조 러시아 | 발티카 포터 No. 6 | 알코올 도수 7도
단맛이 너무 강하지 않고 깔끔하면서도 묵직해서 질리지 않고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다고 한다. 차르가 지배하던 제정 러시아 시절 영국에서 러시아로 수출하던 높은 도수의 포터 맥주를 ‘발틱 포터’라고 하였는데, 이 맥주의 맛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듯하다. 평소 임페리얼 스타우트의 몰트 맛은 좋아하지만, 너무 끈적한 느낌이나 강한 향이 부담스러웠다면 시도해보자.
B조 스페인 | 에스트렐라 담 이네딧 | 알코올 도수 4.6도
호가든과 같은 꽃향기가 산뜻한 맥주이고 알코올 도수도 낮아 편하게 마실 수 있다. 호가든보다는 조금 더 복잡미묘한 향을 느낄 수 있다. 부담스러운 가격이지만 포르투갈과 비겨서 울상인 스페인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한 번 마셔볼 만하다.
C조 덴마크 | 투올 3X 레이드 | 알코올 도수 5.9도
카스, 아사히, 버드와이저 – 라거는 다 비슷비슷하다고? 그런 사람을 위한 라거가 바로 투올의 3X 레이드 인디아 페일 라거이다. 맥주 초보라도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자신 있게 이 맥주는 다르다고 외칠 수 있을 만큼 아낌없이 넣은 홉 향이 가득한 덴마크의 라거 맥주이다.
D조 아이슬란드 | 아인스톡 페일 에일 | 알코올 도수 5.6도
아이슬란드는 1988년까지도 ‘맥주 금주령’ 때문에 알코올 도수 2.25도 이상의 맥주는 마실 수 없었다. 그런 아이슬란드의 크래프트 브루어리인 아인스톡의 페일 에일은 기분 좋은 쌉쌀함과 달고나처럼 깔끔하게 떨어지는 은은한 단맛이 잘 어우러진 맥주이다. 홉 향은 강하지 않으면서도 신선한 느낌이다.
D조 나이지리아 | 기네스 포린 엑스트라 스타우트 | 알코올 도수 7.5도
유럽의 아일랜드에서 만들어지는 기네스 맥주가 가장 많이 팔리는 나라는 영국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많이 팔리는 나라는 어디일까? 바로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이다. 나이지리아 사람들은 기네스를 자신들의 맥주라고 여길 정도로 사랑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마시는 기네스 드라우트가 아닌 기네스 포린 엑스트라 스타우트를 즐겨 마신다. 오랜 운송 기간을 견딜 수 있도록 알코올 도수가 높은 이 맥주는 우리가 평소에 알던 세련되고 섬세한 기네스가 아닌 거칠고 투박한 기네스의 새로운 매력을 알 수 있게 해준다.
F조 멕시코 | 밸러스트 포인트 하바네로 스컬핀 | 알코올 도수 7도
미국에서 만든 맥주이지만 매운 하바네로 고추를 넣어 만들어 멕시코의 맥주 칵테일인 미첼라다처럼 매콤한 맛이 특징이다. 족발이나 치킨처럼 훈제나 기름진 음식과 잘 어울리는 맛이다.
F조 독일 | 바이엔슈테판 비투스 | 알코올 도수 7.7도
맛있지만 늘 한결같은 모범생 스타일의 독일 맥주만 마셔보았다면 도전해보자. 비투스는 7.7도의 높은 도수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부드럽고 향긋한 밀맥주이다. 하지만 바디감도 확실해 잊기 어려운 맛의 맥주이다.
G조 벨기에 | 듀벨 | 알코올 도수 8.5도
알코올 도수가 높으며 부드럽고 풍부한 거품이 특징인 벨지안 골든 에일의 전형이다. 쌉쌀한 홉의 맛과 살며시 감도는 감귤류의 향, 너무 달지 않은 맥아 맛의 조화가 좋다. 벨기에의 수도원 맥주를 경험해 보고 싶다면 쉬메이 (Chimay) 맥주도 마셔보자.
G조 잉글랜드 | 비버 타운 블랙 베티 | 알코올 도수 7.4도
풍부하고 상큼한 향과 구수한 구운 맥아의 맛이 잘 어우러진 맥주이다. 맥주가 가진 모든 맛과 향을 조금씩 맛볼 수 있는 신기한 맥주.
H조 일본 | 키자쿠라 / 교토 바쿠슈 쿠라 노 카오리 | 4도
교토에 위치한 키자쿠라 양조장은 사케와 맥주를 함께 만드는 곳이다. 사케 효모와 쌀을 이용해 만든 이 맥주는 부드럽고 깔끔하면서도 좋은 사케에서 느껴지는 쌀의 단맛과 은은한 꽃향기를 지니고 있다. 한국에서도 전통 효모나 쌀을 이용한 맥주 개발이 한창인데, 이 맥주는 일본 술의 특성을 잘 살린 좋은 쌀 맥주의 예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