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남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곳에 루아르강을 따라 크고 작은 고성들이 즐비하고, 카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과 슈냉 블랑(Chenin blanc) 포도밭이 펼쳐져 있는 곳. 바로 루아르이다. 부르고뉴가 와인 역사에 획을 그은 장인들의 위인전 같다면, 루아르는 동네 사람들의 정겨운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곳 같은 느낌이었다. 예약하지 않으면 방문하기 어려웠던 부르고뉴와 달리, 와인을 마시다 맛있어서 라벨에 적힌 주소를 찾아가면 우리만을 위해 문을 열고 반겨주던 곳. 오를레앙(Orléans)을 시작으로 투르(Tour), 앙제(Anger), 낭트(Nantes)로 이어진 루아르 와인 여행을 시작해보자.
루아르 와인 여행은 위의 4개의 도시를 거점으로 시작하면 좋다. 하지만 각 도시들 간의 거리도 100km 이상 떨어져 있기 때문에 10일 이상 루아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면 와인 산지가 가장 몰려있는 투르 또는 앙제 지역에 머무르며 와이너리를 방문하기를 권한다. 오를레앙에서는 쇼비뇽블랑 품종을 주로 생산하는 루아르 오른쪽 와인 산지를 방문하면 좋다. 오를레앙에서 차를 타고 20분정도만 가면 루아르의 거장 디디에 다그노(Didier Dagueneau)의 와이너리와 대중들에게도 비교적 잘 알려진 파스칼 졸리베(Pascal Jolivet)의 와이너리가 나온다. 디디에 다그노의 와인은 루아르 와인 중에서도 고가에 속하기 때문에 꼭 와이너리를 방문하지 않더라도 루아르 지역에 간다면 현지에서 마셔보는 것이 좋다. 아쉽게 경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난 디디에 다그노의 유작 빈티지 2006는, 루아르에서도 구하기 어렵고 판매하는 곳을 발견한다고 해도 다른 빈티지 와인보다 1.5배 이상의 가격 차이가 있다.
화장품, 풍선껌, 파인애플 향 등 와인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 향들은 화학비료나 제초제, 살충제 등을 사용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손 수확을 원칙으로 해서 재배한 포도로 만든 내추럴 와인 (Natural Wine)의 특징 중에 하나이다. 루아르는 바로 이러한 내추럴 와인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기도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해, 달 등 철저히 자연의 움직임에 따라 수확 시기를 정하는 ‘자연주의’ 와인, 즉 바이오다이나믹(Biodynamic)와인도 만들어지고 있다. 바로 이러한 바이오다이나믹 와인의 선구자, 니콜라 졸리(Nicolas Joly)의 와이너리는 투르 또는 앙제를 거점으로 방문하면 좋다. 가파른 언덕에 위치한 니콜라 졸리의 와이너리는 루아르에서 꼭 방문해야 할 와이너리 중에 하나다. 특히 이곳의 ‘쿨레 드 세랑(Coulee de Serrant)’ 포도밭은, 부르고뉴 ‘로마네 콩티’와 론의 ‘샤토 그리에’와 더불어 포도밭 자체가 고유 원산지 명칭(AOC)를 가진 유일한 밭이기도 하다. 이곳은 와인 시음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루아르의 아름다운 풍경을 내려다보며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보았노라, 마셨노라, 믿었노라 (J’AI VU, J’AI BU, J’AI CRU)
유명한 루아르 와인 생산자들의 와인은 이미 국내에서도 만나볼 수 있고 유명 와이너리들을 하나씩 찾아다니기엔 루아르는 너무 넓고 길다. 루아르를 방문한다면 가장 추천하고 싶은 여행 방식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와이너리들을 방문해 보고 시음해 보는 것이다. 루아르, 특히 투르 지역을 거점으로 주변에 위치한 와이너리들은 아버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버지까지 몇 대째 파서 만든 동굴에 와인을 보관하고 포도밭을 일궈온 곳이 많았다. 한국에서 한번도 본적 없지만 와인도 꽤 맛있고 가격도 적당했다. 대부분 와인이 6유로 정도였고 이 와인 한 병이면 다섯 병 이상의 와인을 시음할 수 있도록 내어 주는 곳이 많았다.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기본 와인으로 리스트에 많이 오르는 와인이 루아르 지역 와인이라고 하니 가성비는 검증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일요일. 투르에서 머물고 있던 어느 날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특히 고속도로 기본 속도가 160km였던 루아르에서 비를 뚫고 와이너리를 찾아가는 것도 조금은 지쳤기에 투르의 거리를 걷다 시내 중심에 열린 벼룩시장을 구경하게 되었다. 프랑스 최대 와인 산지 중의 하나인 곳답게 오래된 와인 오프너들과 장신구들이 유난히 많던 투르의 벼룩시장에는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오래된 루아르 와인을 단돈 5유로에 팔고 계셨다. 와인이 상하진 않았을까 하는 마음과 설레는 마음을 동시에 품고 숙소에 들어와 그 와인을 오픈했다. 와인 병에는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듯한 날짜가 적힌 종이가 붙여져 있었고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부르게이(Bourgueil) 지역의 카베르네 프랑 품종으로 만든 와인이었다.
루아르 여행 중 니콜라 졸리의 클로 드 라 쿨레 드 세랑(Clos de la Coulee de Serrant)을 마셔보기도 했고, 루아르에선 빼놓을 수 없는 생산자 디디에 다그노의 유작 빈티지 블랑 퓌메 드 푸이(blanc fume de pouilly)도 마셔봤지만 벼룩시장에서 샀던 그 와인이 루아르에서 마셨던 와인 중에 가장 맛있었다. 다음날 차를 몰고 와인 라벨에 적힌 주소를 찾아갔다. 포도밭을 지나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시골 마을의 초가집 한 채 만한 크기의 작은 와이너리였다. 문을 두드리자 주인이 주섬주섬 나와 문을 열어 주었고 와인을 보여주자 이 와인을 어디서 구했는지 의아해했다. 영어가 잘 통하지 않았던 생산자와 손짓, 발짓에 구글 번역기를 동원해 이 와인을 어떻게 구했고 맛이 어땠고 얼마나 감동했는지에 관해서 설명했다. 그녀는 무작정 찾아간 나에게 그림까지 그려가며 오랜 시간 자신이 만든 와인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영어와 불어와 그림이 섞인 언어에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열정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맞췄다.
Pomme. 유일하게 생각난 와인과 매칭된 프랑스 단어가 뽐므. 사과였다. 카베르네 프랑에서 사과향이라니. 비가 오는 날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누군가가 선물로 받은 와인이라고 생각했던 믿음 때문이었는지 가장 맛있게 마셨던 Domaine des vienais의 와인처럼 루아르에 방문한다면 일단 많이 보고, 마음에 드는 와인을 사서 마셔보고 찾아가 보길 권한다. 그것도 수많은 와인 중에 나만의 와인 만나는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루아르 고성에서의 하룻밤
루아르는 중세 이후 왕족과 귀족들의 휴양지였기 때문에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80여 개의 성들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무덤이 있는 앙부아즈성(Chateau d’ Amboise)과 소설 <잠자는 숲 속의 미녀>의 무대가 되었던 위세성(Chateau d’ Usee) 등이 들어서 있는 덕에 와이너리 투어가 아니어도 매년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앙제 지역을 중심으로 이러한 크고 작은 성들 일부를 개조한 호텔에 숙박할 수 있다.
웬만한 안방보다 큰 욕실, 영화에서만 보던 따뜻한 벽난로, 창문 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정원. 비수기여서인지 그 큰 성에 머무른 손님은 우리뿐이어서 조금 무섭긴 했지만 와인 마시는 숲 속의 공주가 된 듯한 느낌을 주었던 ‘Château de l’Epinay(https://www.chateauepinay.com)’라는 성은 가격 면에서도 일반 호텔과 비슷해 부담스럽지도 않으면서 고성의 정취를 느끼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당시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던 나에게 샴페인과 꽃다발, 초콜릿과 축하카드까지 준비해준 센스 넘치는 이 성은 루아르의 낭만이 가득한 곳이다. 루아르 포도밭 주인들은 다른 지역보다 불어만 쓰는 경우가 더 많았다. 조금 큰 규모의 와이너리들은 호텔에서 전화로 예약을 부탁하면 조금 더 수월하게 방문할 수 있다.
루아르에서 부르고뉴까지, 프랑스의 포도밭 여행을 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들은 값비싼 와인을 공짜로 마셨을 때도, 으리으리한 고성에서의 하룻밤도 아닌, 잘 만든 와인 한 병을 위해 등이 굽고 까만 피부의 ‘열정 있는 생산자들과 만남’이었다. 꼭 와인이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무언가의 기원을 알아가고 그 흔적을 직접 확인해 보는 건 단순히 그것을 즐기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