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과 새해와 함께 ‘회식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중화요리부터 해산물 요리까지 회식하면 맛있는 음식들이 수없이 떠오르기 마련인데, 그중에서도 회식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은 단연코 ‘고기’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사람들과 함께 모여 고기 음식을 즐겼던 것일까? 사람들 대부분은 삼겹살이 보편화된 시기부터 즐겼을 거로 생각하는데, 사실 우리가 함께 모여 고기를 즐긴 지는 꽤 됐다.
우리나라 회식의 시작: 난로회
조선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를 보면 조선 후기에는 난로회라는 풍속을 즐겼다고 한다. 난로회란 더울 난·화로 로·모일 회로 이루어진 단어로, 겨울의 추위를 막고자 따듯한 화로 앞에 둘러앉아 음식을 즐겼던 모임을 의미한다.
난로회는 보통 음력 10월 1일에 이뤄졌으며, 정조와 연암 박지원 등의 기록을 보면 궁중과 민간 할 것 없이 전국적으로 퍼져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멈출 수 없는 소고기 사랑
그렇다면 우리의 조상들도 삼겹살에 소주를 즐겼던 것일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돼지고기처럼 육류를 먹은 것은 맞다. 하지만 돼지고기는 아니었고, 지금도 비싸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소고기로 회식했다. 그 당시 소는 식량인 동시에 농사를 지을 때 꼭 필요한 노동력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소를 잡아먹지 못하도록 우금령까지 시행했는데, 맛이 너무나 좋았던 탓일까? 소고기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기록에 따르면 16세기 중반부터 소고기 식용이 널리 퍼졌으며,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는 전국에서 하루 1,000여 마리의 소를 잡았다고 한다. 또한 승정원일기에서도 ‘도성의 시전에서 각 고을의 시장, 거리의 가게까지 모두 합해 하루에 죽이는 것이 1,000마리로 내려가지 않는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전골의 탄생, 전립투골
요즘 말로 FLEX하며 즐겼던 소고기였던 만큼 소고기를 먹는 모습도 특별했다. 구이에 사용한 불판은 ‘전립투’라고 불렸는데, ‘전립’은 조선시대 무관이 쓰던 벙거지 형태의 모자를 뜻한다. 전립투의 모양 또한 벙거지와 같았으며 움푹하게 파여 머리가 들어가는 공간에는 장국을 붓고, 가장자리의 평평한 챙에는 고기나 채소를 구웠다. 그리고 이렇게 즐기는 음식을 섞는다는 뜻의 골(滑)을 붙여 전립투골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전골로까지 이어져 있다.
마음만큼은 따듯한 우리들의 겨울
먹는 것에 진심이었던 우리 민족 사이에서 탄생한 전립투는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 때 사라지게 됐다. 당시 일본은 군사용품에 사용할 금속 확보를 위해 여러 가지 놋그릇과 금속제 물건을 강제로 공출했는데, 이때 전립투도 함께 가져간 것이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비록 우리의 일상에서 전립투를 접하기란 많이 어려워졌지만, 여전히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잔을 부딪칠 소중한 사람은 남아있다. 어쩌면 난로회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맛있는 전골 음식도, 취기를 살짝 올리는 술도 아닌 따듯한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함께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추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한 충분한 준비가 될 것이며, 사람이 모이는 곳엔 맛있는 음식과 술 그리고 행복한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