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에 몸을 싣고 떠나는 장거리 여행은 언제나 흥미진진하다. 특히 긴 수속을 끝내고 항공기 좌석에 앉아 마시는 와인의 향은 그 맛을 배가 되게 만들어 준다.
상당수 여행자가 항공기 속 와인의 맛과 향에 대해 육지에서 맛본 것보다 몇 배 이상 더 좋은 추억을 갖는 것에는 갑갑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지로 떠나는 기대감이 한 몫 단단히 했을지도 모른다. 여행의 고수를 자청하는 이들 중에는 비행기에 타자마자 고급 와인 한 잔을 주문해 비행의 설렘을 즐기기도 할 정도다.
이 때문에 매년 항공사들이 집계하는 ‘기내에서 판매된 기내식 중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한 제품’의 절대적인 1위에 알코올이 이름을 올릴 정도다. 그 뒤를 라면과 커피가 각각 2~3위로 링크됐다. 국내선과 국제선을 불문하고 기내식 중 승객들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아오고 있는 상품은 단연 알코올이 차지하고 있는 것.
특히 좌석 하나당 1천만 원이 훌쩍 넘는 일등석 승객에게는 고급 레스토랑에서나 맛볼 수 있는 알자스 지역의 최고급 와인이 제공된다. 또, 일부 항공사에서는 소믈리에가 직접 선정한 올해의 와인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와인 전문가들이 직접 기내에서 테이스팅까지 마친 엄선된 와인이 제공된다.
그 맛이 얼마나 좋은지, 최근에는 중국의 한 승객이 기내에서 서비스로 제공되는 와인을 몰래 챙기려다 들통나 망신을 당한 사건이 발생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도 했다. 프랑스 파리를 출발해 중국 우한을 향하던 에어프랑스 안에서 기내 서비스로 제공되던 와인 8병을 몰래 챙겨 넣으려던 것이 적발됐던 것.
그만큼 항공기에서 맛본 와인은 육지에서의 것보다 몇 배 더 향기롭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비행과 와인은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끈끈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들리는 속설 중에는 항공기 안에서 마시는 와인은 평소보다 맛만 좋은 것이 아니라, 왠지 한층 더 빨리 취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항공기 안에서 마신 와인은 정말 평소보다 더 빨리 취하게 만든다는 그 속설이 진실일까?
실제로 익명의 한 심리학자는 높은 고도에서 마시는 알코올이 육지에서 섭취한 같은 양의 알코올 대비 최대 3~4배 이상의 효과를 준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희박해지는 산소 탓에 인간의 뇌로 전달되는 산소량이 급격하게 부족해지고, 그로 인해 같은 양의 알코올을 섭취해도 평소보다 3~4배 빨리 취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또 고도에 따른 신체적 변화에 예민한 정도에 따라 숙취 역시 심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저기압 상태가 장시간 유지되는 기내에서 알코올의 섭취 후 인간의 신체가 감당해야 하는 부담은 예측한 수준을 쉽게 넘어설 가능성이 크다는 목소리도 있다. 이 때문에 일부 항공사에서는 승객 1인당 1회에 제공하는 주류 양을 제한해오고 있기도 하다.
반면 일각에서는 기내에서 섭취하는 와인의 위력에 대해 느끼는 신체의 변화는 단순한 심리적 반응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즉, 항공기 탑승 시 인간이 느끼는 설렘과 같은 심리적인 변화로 인해 와인의 향과 맛, 그리고 알코올의 위력에 더 빨리 취하도록 만드는 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
이를 두고 일부 전문가들은 일명 ‘플라시보’ 효과의 절대적인 위력이 작용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기내의 기압 차이와 산소 부족 현상 등 다양한 외부 현상이 와인 섭취 시 인간이 느끼는 신체 변화 작용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그 수준은 매우 미미한 정도에 그칠 뿐 절대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단연 심리적인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미국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 외상센터의 크리스토퍼 콜웰 응급의학과 박사는 “항공기 안에서 우리 몸은 호흡 속도를 증가시키게 되는데, 이 때문에 대사 반응 일부가 증가하며 더 많은 혈액이 심장으로 전달되기 위해 심박 수도 동시에 증가한다”고 설명했다. 즉, 적은 산소량 탓에 우리 몸은 평소보다 더 술에 쉽게 취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의견에 힘을 실어준 것.
다만, 크리스토퍼 콜웰 박사는 “이런 외부 환경의 변화는 곧 인간 신체가 호흡수를 미미한 수준으로 증가시키는 데 그친다”면서 “신진대사의 반응이 조금 변하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해외여행을 취소시킬 정도로 막강한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인간의 신체는 3만 5천 피트 상공에서 비행하는 기내에서 느끼는 신체 변화와 그보다 5~6천 피트 더 높은 상공에서의 변화를 구분해서 느낄 만큼 민감하지 않다.
오히려 등산 후 정상에 올랐을 때 느끼는 일종의 고산병과 같은 아찔한 신체 변화가 기내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브리검 여성병원 응급의학과 의사이자 하버드 의과대학 조교수인 피터 차이 박사는 “알코올은 가벼운 이뇨 작용을 불러오는데, 기내의 외부 환경이 육지보다 건조한 상태가 장시간 유지된다는 점에서 수분 보충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 된다”면서 “평균 8시간 이상 비행하는 상태가 유지될 경우, 인간의 신체는 약 150ml 이상의 이뇨 작용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 더해 와인을 섭취한 승객은 더 강한 이뇨 작용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콜웰 박사는 “만약 평소 저녁에 와인 3~4잔을 마시는 와인 애호가라면, 기내에서 두 잔 정도만 섭취하는 것이 올바른 와인 접근법이 될 것”이라면서 “그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마법과 같은 정답은 없지만, 적당한 절제 속에서 와인이 주는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모두에게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