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역시 무척 곤란했던 경험이 한두 번 정도 있다. 허용 가능함, 적절함, 혹은 위협적임에 대한 오늘날의 새로운 기준들 탓에 도통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늙다리같이 왜 이래. 신세대는 세상을 다르게 본다고. 분명 맛도 다르게 느끼겠지. 넌 트레이시 에민(영국의 설치예술가-옮긴이)도 잘 이해 못하잖아? 요즘은 흐트러진 침대 같은 와인이 대세라니까. ‘컨-퓨전’ 음식하고도 딱 맞는다고.”
문제는 이거다. 미술관에 가면 작품이 바로 눈앞에 놓여있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사면 된다.
그러나 코르크가 와인병을 막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특정한 판단 기준(투명도, 안정성, 강도와 당도, 산도 사이의 균형 등)과 아펠라시옹 시스템 속에 아로새겨진 전통적 가치에 따라 와인을 평가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내추럴’은 기존의 이런 판단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다. 이런 (내추럴) 와인은 마치 장인이 만드는 공예품과도 같으며, 때로는 예술작품의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와인메이커는 내가 그토록 믿는 전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시하는 와인을 나한테 마음대로 팔 권리가 있는 것인가?
‘내추럴 와인’이라는 표현은 모든 실수를 두둔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스스로를 합리화할 수 있는 그런 무적의 존재인가? ‘대체 와인’ (‘alternative wine’)이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은 아닐까?
물론 와인메이커가 훌륭한 실험실을 갖추고 있고 최신 기술을 쓸 수 있으면서도 양조 과정에 인력과 과학기술의 개입을 최소화하기로 선택했을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매우 명성 높은 (그리고 아주 값비싼) ‘오렌지’ 와인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50년 전 이탈리아를 떠올리게 하는 ‘내추럴’ 와인들도 맛보았다. 포도를 소가 끄는 수레 위 커다란 통에 부어 넣고 농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몽둥이로 마구 때려 즙을 낸 뒤 나머지는 자연에 맡기는 방식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내추럴’ 와인 광고를 보면 기존 방식으로 만들어진 와인에는 포도즙 외에 다른 첨가물이 잔뜩 들어간다는 말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생선 내장: 끔찍해. 달걀흰자: 독이야. 이산화황: 알레르기를 유발해. 색소: 속임수야. 설탕: 완전 사기다.
‘내추럴리스트’와 비건 채식주의자들이 공통으로 영위하는 윤리적 우월 의식 같은 게 있는 듯하다. 더 도덕적이고, ‘핫’하며, 위생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슈퍼마켓에서 판매되는 제품을 아무거나 집어 포장지 뒷면에 나온 각종 첨가물 등을 읽어본다면 이들은 아예 먹는 행위 자체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무엇이 ‘내추럴’한가에 대해서는 이미 독설이 난무하고 있다. 나까지 거기에 보태고 싶은 마음은 없다. (갑자기 더블린 술집 바깥에 선 한 남자가 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이거 사적인 싸움인가요, 아니면 아무나 끼어들어도 됩니까?”)
그저 ‘내추럴’을 대체할 수 있는 용어로 ‘대체’는 어떨까 하고 제안해 본다.
작성자
Hugh Johnson
번역자
Sehee Koo
작성일자
2017.2.3
원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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