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리세는 위에서도 한 차례 언급했지만 와인에 있어서 인지도가 매우 낮은 곳이다. 개인적으로 이곳에 여행을 오기 전에 이 지역 와인을 마셔볼 일도 없었고, 주변 사람들도 마셔봤다든지, 아니면 기억에 남는 와인이 있다든지, 이런 얘기를 들어본 일도 없었다. 하지만 굳이 몰리세까지 들러서 와이너리를 방문(딱 한 곳!)한 이유는 이 지역에서만 맛 볼 수 있는 품종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틴틸리아 Tintilia.
틴틸리아는 (거의)몰리세에서만 재배되는 진정한 토착 품종이다. 오랫동안 사르데냐의 주요 품종인 보발레 그란데 Bovale grande와 같은 품종으로 여겨졌다. 심지어 사르데냐에서는 보발레 그란데를 거꾸로 틴틸리우 Tintiliu로 불러서 더욱 혼란을 가중시켰다. 하지만 유전자 조사로 완전히 다른 품종임이 밝혀졌다.
틴틸리아는 중간 정도의 생장력을 지니고 있는데, 노균병, 오이듐균, 포도상 진균 등 병충해에 약하기 때문에 몬테풀치아노 품종에 밀려서 재배가 많이 감소한 비운의 포도다. 때문에 현재는 매우 극소수의 지방과 와이너리에서 다루고 있고, 그 중심에 바로 몰리세가 있다. 단일 품종으로 양조되면 흑보라의 진한 색에 폴리페놀 함량이 매우 높은 특징을 지닌다. 또한 장미, 아티초크, 아스파라거스, 서양 자두를 연상시키는 향이 특징적이다. 또한 풀바디, 높은 알코올 도수 덕분에 숙성에 적합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장래가 참 밝은 품종이라고 생각된다.
몰리세에는 DOC가 4개 밖에 없다. 이중 2011년 DOC로 지정된 틴틸리아 델 몰리세 Tintilia del Molise DOC는 이 지역의 와인 생산자들의 틴틸리아 사랑의 결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DOC를 달기 위해서는 틴틸리아를 반드시 95% 이상 써야 한다. 2년 이상 숙성시키면 리제르바를 달 수 있다. 운 좋게 몰리세에서 이 틴틸리아 리제르바를 마셔볼 기회가 있었는데, 실로 검은 실크 천을 연상시키는 와인이었다. 묵직하지만 부드러운 밸류 와인이었다.
화이트 품종으로는 팔랑기나 Falanghina가 유명하다. 사실 캄파니아 Campania 주에서 더 많이 재배하는 품종이지만, 몰리세에서도 꽤 좋은 퀄리티 화이트 와인을 만들어내고 있다. 고대 로마 시대 때부터 알려진 오래된 토착 품종으로 고대인들이 가장 사랑했던 화이트 와인인 팔레르노 Falerno 와인의 베이스를 이루었던 품종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름의 기원은 포도나무를 ‘falanga’라고 부르던 지지대에 연결해서 재배하던 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품종의 이름 자체가 “지지목에 의해 지탱되는 포도나무“라는 뜻. 팔랑기나는 마스콜리나 Mascolina와 베라체 Verace, 두 가지 종으로 나뉘며, 베라체가 더 넓게 재배되고 있다. 품종 특징으로는 중간 정도의 생산량, 진한 황금빛, 드라이하며 벨벳같이 부드러운 맛이다.
우리 부부는 아브루쪼에서 4곳, 몰리세에서 한 곳의 와이너리를 들렀다. 이탈리아 와인 여행을 기획했던 두 달 반이라는 시간은 길다면 긴 여정이었지만, 이탈리아는 전국이 와인으로 뒤덮여 있는 와인의 땅이었기 때문에 아브루쪼와 몰리세에 할애할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더군다나 몰리세는 시칠리아로 이동을 하기 위한 통과의 의미가 더 강해서 한 곳의 와이너리만 간신히 들러볼 수 있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몰리세의 그 한 곳이 사실 아브루쪼에서 들른 4곳보다 더 의미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브루쪼나 몰리세로 와인 여행을 갈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 부부가 간 곳 중 추천을 하자면, 아브루쪼의 도라 사르케제 Dora Sarchese와 몰리세의 테레사크레 TerreSacre다. 어차피 몰리세에서는 더 추천할 와이너리도 없다.
도라 사르케제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와인 분수 Wine Fountain’였다. 이 와인 분수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로마와 오르토나 Ortona(아브루쪼의 마을)를 잇는 카미노 디 산 토마소 Cammino di San Tommaso 길에 와이너리가 위치한 것에 착안, 와이너리에서 직접 여행자들의 목을 축이고자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본 일이 없기 때문에 물처럼 쫄쫄 나오는 와인 분수는 신기했다. 물론 맛까지 기대하는 것은 실례다.
와인 분수 다음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스푸만테였다. 코코치올라 Cococciola라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품종과 샤르도네, 트레비아노를 블렌딩 해서 만드는데, 2차 병 발효를 무려 10년이나 한다. 마침 칸티네 아페르테 행사를 맞이해 데고르주멍 Degorgement을 시연하고, 도자주 Dosage를 하지 않은 내추럴한 상태의 이 스푸만테를 마셔볼 수 있었다. 고소한 비스킷 향과 입 안을 간질이는 작은 버블, 좋은 구조감까지, 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운 스파클링 와인이었다. 이외에도 몇몇 IGT 와인과 페코리노 Pecorino로 만든 화이트 와인도 맛볼 수 있었는데, 하나 같이 가격 대비 퀄리티가 발군이었다.
몰리세에서 방문한 테레사크레에서는 와인과 함께 몰리세 특산 음식으로 구성된 뷔페를 맛볼 수 있었다. 이 또한 칸티네 아페르네 주간을 맞이해 와이너리에서 특별히 준비한 만찬이다. 온통 이탈리아인이 바글대던 와이너리의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우리 부부는 와인메이커의 손에 이끌려 와이너리 곳곳을 둘러보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와인 생산량이 형편없이 작은 주에 있다고 그곳의 와이너리를 무시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투어였다. 와이너리 시설에 아낌없이 투자하며, 틴틸리아에 평생을 헌신하기로 한 이들의 손에서 탄생한 와인은 문화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스카나를 지나 에밀리아 로마냐를 거쳐 마르케, 아브루쪼, 몰리세에서 내질렀던 감탄사. 와인의 세계란 얼마나 무궁무진한가! 아무리 많은 와인을 맛보고, 이곳 저곳 여행을 다녀도 여전히 어딘가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훌륭한 와인들이 있다는 것은 와인 애호가로서 큰 기쁨이다. 아브루쪼와 몰리세에서 누군가 이런 흥분을 맛볼 수 있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