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의 해외여행 컨셉이 늘 와인 산지를 따라가는 터라 일반 관광은 대상에 없지만, 간혹 와인 산지에 유명한 관광 포인트가 겹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들뜬 마음이 되어 관광을 즐기기도 한다. 이번에 소개하는 가르다 호수도 만약 와인 산지와 거리가 멀었다면 (그렇게 유명한 곳인데도 불구하고) 우리 부부가 일정에 넣지 않았을 곳이다. 하지만 베네토 Veneto 주를 대표하는 레드 와인 생산지인 발폴리첼라 Valpolicella와 바르돌리노 Bardolino가 가르다 호수 왼편에 바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아름답다던 가르다 호수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가르다 호수는 이탈리아 최대 면적의 호수다. 우리 부부는 이 호수를 세 번 여행했는데 같은 포인트를 간 적이 없다. 그만큼 이곳을 방문할 때면 호수의 넓이와 주변 관광지의 방대함에 놀라게 된다. 긴 호숫가를 매력적인 소도시와 포도밭들이 온통 감싸고 있고, 이색적인 레스토랑, 카페, 와인 바, 와이너리가 줄을 잇는다.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호수를 바라보며 글라스 와인이나, 이곳에서 유명한 칵테일인 스프릿츠(Spritz)를 홀짝이면 그야말로 이곳이 천국. 진정한 힐링 여행을 꿈꾸는 이들에게 자신 있게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가르다 호수를 대표하는 마을로 시르미오네 Sirmione가 있지만, 우리 부부는 아쉽게도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시르미오네 뿐만 아니라 가르다 호수 남부를 수놓은 수십 개의 마을은 마치 열차 선로처럼 하나로 이어지며, 아름답고 고즈넉한 풍경이 끝도 없이 펼쳐지기 때문에 어디에 숙소를 잡아도 크게 상관이 없을 듯하다. 그야말로 가르다 호수 전체의 마을들이 와인 마을인 셈이다.
엄청난 넓이를 자랑하는 만큼, 가르다 호수는 롬바르디아 Lombardy 주와 베네토 Veneto 주에 걸쳐서 자리 잡고 있고, 와인 산지도 두 지역으로 나뉜다. 롬바르디아 쪽의 주요 와인 산지를 읊어보면, ‘가르다 Garda DOC’, ‘가르다 클라시코 Garda Classico DOC’, ‘가르다 콜리 만토바니 Garda Colli Mantovani DOC’, ‘루가나 Lugana DOC’가 있고, 베네토 쪽으로는 ‘바르돌리노 Bardolino DOC’, ‘바르돌리노 수페리오레 Bardolino Superiore DOCG’, ‘가르다 Garda DOC’, ‘루가나 Lugana DOC’, ‘쿠스토자 Custoza DOC’, ‘발폴리첼라 Valpolicella DOC’, ‘발폴리첼라 수페리오레 Valpolicella Superiore DOC’, ‘아마로네 델라 발폴리첼라 Amarone della Valpolicella DOCG’, ‘레치오토 델라 발폴리첼라 Recioto della Valpolicella DOCG’가 있다.
베네토 쪽에 매력적인 와인 산지가 더 많은 만큼, 둘 중의 한 곳을 선택해야 한다면 베네토 쪽 와인 산지를 여행하는 것을 추천한다. 숙소는 가르다 호수 근처로 잡으면 된다. 유명 관광지라 가격이 살짝 더 비싸기는 하지만, 호수 관광과 와이너리 투어를 한 번에 엮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낭만적인 이탈리아 여행이 없을 테다.
위에서 언급한 베네토 지역의 가르다 호수 인근에서 DOC, DOCG 중 유독 눈여겨 봐야 할 것이 바르돌리노와 발폴리첼라다. 베네토 주가 자랑하는 퀄리티 레드 와인들이 쏟아져 나오는 곳으로, 특히 발폴리첼라의 아마로네는 이탈리아 3대 명품 와인으로 꼽힌다.
바르돌리노와 발폴리첼라의 주요 품종으로는 코르비나 Corvina, 코르비노네 Corvinone, 론디넬라 Rondinella, 크로아티나 Croatina, 오셀레타 Oseleta가 있다. 다만 바르돌리노의 경우 발폴리첼라보다 더 가볍고 편안하게 마실 수 있는 와인들의 비중이 더 많은 편이고, 대개 코르비나와 론디넬라만을 이용해서 와인을 만든다. 예전에는 이 구성에 몰리나라 Molinara를 반드시 넣었지만, 현지를 여행해보니 거의 쓰이질 않았다. 몰리나라가 산도에 취약한 편이라 점차 사라지는 추세라고 했다.
발폴리첼라에서 심심치 않게 보이는 코르비노네의 경우 원래는 코르비나의 변종으로 알려졌는데 DNA 분석 결과 완전히 다른 품종이라고 결론이 내려졌다. 보통 코르비나는 발폴리첼라 와인에 45~95% 넣게 되어 있지만, 코르비노네는 최대 50%까지만 블렌딩할 수 있다. 코르비나의 생김새보다 더 크고 약간 더 넓게 퍼져 있는 형태다.
한 가지 더. 발폴리첼라 지역의 와이너리를 방문해보니, 생각보다 매니악한 품종을 활용하는 와인들이 많았다. 위에서 언급한 크로아티나나 오셀레타도 그렇지만, 네그라라 Negrara라든지, 포르셀리나 Forsellina, 페라라 Pelara 같은 생소한 품종들도 심심치 않게 블렌딩한다.
특히 오셀레타는 단일 품종 와인이 존재할 만큼 근래 주목을 받는 품종이다. 이 품종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50년 전으로 돌아가나 구전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수 세기 전부터 재배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점차 사라지게 된 이유는 생산성이 극히 낮기 때문. 지금이야 와인의 생산량보다 개성에 중점을 두는 와이너리가 많지만, 예전에는 생산량이 높은 포도 품종을 선호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오셀레타의 재배 비중이 줄어들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필록세라도 한몫했다.
생산성이 낮다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포도송이 생김새가 아기자기하다. 본래 오셀레타의 의미도 ‘small female bird’라고. 하지만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이 있듯, 타닌이 많고, 미네랄이 매우 풍성한 특징을 지니며 다크 베리의 노트가 확연하다. 이런 특징은 비교적 마일드한 캐릭터를 지닌 발폴리첼라의 레드 품종의 특징과는 확연히 반대된다. 실제로 100% 오셀레타 와인 두 가지를 현지에서 테이스팅 해봤는데 그 견고한 구조감 때문에 입안이 뻑뻑해질 정도였다. 또한 다크 베리 뉘앙스가 너무 강해서 쉽게 다가가기 힘든 와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폴리첼라를 여행하게 되면 두 가지 독특한 레드 와인을 꼭 마셔보길 바란다. 하나는 발폴리첼라 수페리오레 리파소 Valpolicella Superiore Ripasso이고 하나가 아마로네 델라 발폴리첼라(줄여서 아마로네)다.
‘Ripasso’는 영어로 이야기하면 ‘Re-pass’다. 보통 아마로네를 만들기 위해서는 포도를 말려야 하는데, 포도를 말린 후 당도가 응축된 포도의 즙을 짜서 껍질하고 오랫동안 침용을 한 후에 긴 발효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찌꺼기로부터 와인을 걸러내는데, 이때 한 번 쓴 포도 껍질 등의 부산물(건조해서 사용)을 일반 발폴리첼라 와인에 재활용해서 만든 와인이 바로 리파소다. 쉽게 말해 아마로네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를 리파소 와인을 만드는데 다시 재활용한다는 의미다.
부산물을 다시 넣은 와인은 재발효가 일어나고 라이트 한 발폴리첼라 와인이 좀 더 복합적이고 헤비한 스타일로 변신하게 된다. 아마로네만큼 복합적이지는 않지만, 합리적인 가격에 비슷한 스타일의 와인을 즐길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참 좋아하는 와인이다.
아마로네는 위에서 설명했듯이 수확한 포도를 건조대 위에서 말린다. 기간은 보통 4~5개월. 이 부분이 어려운데 그냥 말리는 게 아니라 습도, 온도가 완벽히 조절되는 공간에서 해야 한다. 만약 곰팡이가 피면 한 해 농사를 망치는 셈이다. 잘 말리면 포도의 수분이 증발해서 쭈글쭈글해지고 당도가 응축된다. 그 포도의 진한 액을 뽑아낸 뒤에 완전히 발효시키고 2년 이상 숙성시키면 그게 바로 아마로네다. 알코올 도수가 최소 14%. 보통 15~16%는 나오기 때문에 굉장히 파워풀하며, 쌉싸름한 맛도 일품이다. 참고로 완전히 발효하지 않은 와인은 레치오토 Recioto라고 부르며 달콤하고 역시 쌉싸래한 맛이 훌륭한 디저트 와인이다.
우리 부부는 가르다 호수 주변에서 10곳이 넘는 와이너리를 방문했는데, 와인에 대해서 잘 모르더라도 매우 즐겁게 와이너리 투어를 할 수 있는 곳 두 곳을 골랐다. 하나는 마시 Masi이고 다른 하나는 제니 Zeni다.
마시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와이너리 중 한 곳이다. 특히 아마로네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집과 집념을 보여준다. 명품이라고 일컬어지는 아마로네에서도 그들이 선보이는 캄포롱고 디 토르베 Campolongo de Torbe나 마짜노 Mazzano는 상위 1% 아마로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품질이 우수하다. 물론 와인이 가격이 비싸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아마로네 와인 애호가라면 반드시 경험해보고 싶을 와인이다.
마시는 베네토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유명한 와이너리인 만큼 돈도 꽤 많이 번 곳이라 이들의 와인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 베네토에만 세 곳이 있다. 참고로 아르헨티나 멘도사 Mendoza에도 포도밭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서 생산한 와인을 베네토 현지에서도 맛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세레고 알리기에리 에스테이트 Serego Alighieri Estate. 세레고 알리기에리는 단테의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다. <The Divine Comedy>(신곡)의 단테는 14세기 중반 정치적 이유로 피렌체에서 쫓겨나야 했고 그의 가문이 새롭게 정착한 곳이 바로 베로나 근처의 이 세레고 알리기에리였다. 그의 후손들은 300acre의 땅에서 지금까지 와인을 만들어왔다. 1970년대 마시 그룹과 조인하면서 마시의 이름을 달고 출시되기 시작했다. 게스트 하우스와 작은 에노테카와 시음실이 있으며 별다른 예약 없이 테이스팅비를 지불하고 와인을 테이스팅할 수 있다.
두 번째 칸티네 마시 Cantine Masi는 마시의 본사다. 예약 후 와이너리 투어가 가능하기 때문에 마시 와이너리에 대한 시리어스한 접근이 필요한 이들에게 추천할 수 있을 것 같다.
세 번째인 테누타 카노바 Tenuta Canova를 가장 추천한다. 이유는 가르다 호수에서 차로 약 10분이면 갈 수 있는 근접성도 한몫하고, 무엇보다 훌륭한 레스토랑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이 레스토랑에서 뇨끼, 치즈 플레이트, 야생 토끼와 멧돼지 고기를 먹었는데 모두 훌륭했다. 파인 다이닝 컨셉이 아닌 캐주얼한 분위기를 지향하고 있어서 가격도 저렴한 편이다. 음식에 곁들이는 와인은 당연하지만 모두 마시 와인이다. 이곳에서 마시가 아르헨티나 멘도사에서 만드는 와인을 글라스로도 테이스팅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추천하는 와이너리인 제니는 마시만큼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곳은 아니나, 훌륭한 와인 박물관을 무료로 개방한다는 점, 또한 이곳에서 생산하는 다양한 와인을 한 자리에서 무료로 테이스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와인 가격도 매우 저렴하다.
제니 와인의 주력은 바르돌리노 쪽이지만 아마로네와 같은 발폴리첼라 와인들도 생산하고 있다. 현지 사람들에게는 저렴한 가격 때문에 인기가 많고 관광객들도 박물관을 구경하고 편안하게 와인 시음을 할 수 있다는 장점 덕에 늘 북적인다. 지하에는 와인에서 나는 향들을 맡아볼 수 있는 시향실과 인생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광활한 넓이의 오크 숙성실이 있어서 보는 재미를 더했다.
휴양, 와이너리 투어 이 모든 것들을 한 곳에서 경험하고 싶다면 가르다 호수, 그리고 그 주변의 바르돌리노와 발폴리첼라 와인 여행을 자신 있게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