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와인의 제조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따른다. 포도의 수확과 파쇄, 1차 발효 및 압착이 끝나면 곧장 2차 발효와 정제 과정을 거치고, 이어서 또다시 정해진 기간에 따라 숙성과 여과의 긴 인내의 시간을 지나서야 비로소 고혹적인 와인병에 담겨 상품화된다. 이 일련의 과정을 무사히 거친 와인만 상품성 있는 와인으로 취급되며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제조, 상품화된 뒤 소비자들에게 판매된 와인 뒤에는 남겨진 다량의 포도 껍질과 잔해물들이 있다.
물론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와인 제조 후 남은 포도 찌꺼기들을 알뜰히 모아 증류한 뒤 또 다른 마실 거리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탈리아의 ‘그라파(Grappa)’가 바로 와인 제조 후 남은 잔해들을 모아 증류한 국민주다. 특히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서 생산된 그라파는 그 원재료가 부산물이라는 단점을 거뜬히 극복하고, 기타 브랜디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고급 증류 술로 각광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욱이 오크통에서 5~6년 이상 숙성된 그라파는 그 향이 어떤 다른 술과 견주어도 좋을 만큼 그윽해서 고급 브랜디와 같은 대접을 받는다.
하지만 와인 제조 업체를 보유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와인 제조 후 남은 포도 찌꺼기를 그대로 쓰레기로 분류해 버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게 매년 수천 톤에 달하는 포도가 와인 제조 후 남은 쓰레기로 처분되고 있다. 사람들의 눈과 입을 매혹시키는 와인을 만들어 내는 와인의 화려함과 상반되게 쓰고 남은 와인 잔해에는 사실 그동안 단 한 차례도 이목이 집중됐던 적이 없었다.
최근 이 분야 전문가들 사이에서 와인 제조 후 남은 잔해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처리되는지에 집중하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특히 남은 부산물들까지 모두 다양한 방식으로 재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긍정적인 움직임도 힘을 얻고 있다.
실제로 일부 유럽 화장품 개발 회사와 약품 업계에서는 바이오 연료와 미용 제품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의 대체 용도를 연구해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최근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와인 부산물을 이용, 피부 재생 및 건강 회복을 위한 제품으로 다채로운 활용이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연구소 소속 박사들이 진행 중인 피부 조직 유익 성분을 제조하는 방법이다. 최근 캘리포니아대학 연구소 측은 샤도네이 포도원에서 와인 제조 후 남은 부산물을 활용, 인간 피부 조직 회복에 유익한 성분인 올리고당류를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지금껏 와인이라는 인간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매력적인 알코올을 만들고 남은 잔해의 위치에 그쳤던 포도 껍질들이 이제는 어엿한 하나의 개척 분야로 각광을 받는 분위기다.
캘리포니아대 소속 연구진들은 와인 제조 후 버려진 포도 껍질과 씨앗 등을 활용해 인간 건강에 유익한 건강보조식품으로 재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새로운 연구 결과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특히 버려진 포도 줄기와 껍질에서 발견한 인간 피부조직에 유익한 화학적 성질이 이 분야 발전이 큰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라는 전망이다.
연구원들은 샤도네이 포도 껍질 속 올리고당 등 다량의 탄수화물을 발견, 해당 물질이 인간 피부 조직에서 발견되는 화학적 성분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들 연구 결과, 포도 잔해 속 올리고당 성분은 인체 면역력을 높여주는 기능과 장 건강 강화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동안 인류는 해당 성분의 일부를 모유 수유를 통해 자연스럽게 흡수시켜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식품과학과 다니엘라 바릴리 박사는 “아직 포도 잔해와 관련한 연구는 매우 초기 단계에 불과하다”면서도 “하지만 이번 연구 결과를 통해 와인을 만들고 남은 포도 찌꺼기 속에 인체 건강에 유익한 다수의 화합물이 첨가돼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향후 이를 통해 인류의 건강 증진을 위한 각종 영양제와 다수의 식품 개발 연구의 원천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특히 이번 연구 결과는 과거 일부 국가에서 와인 부산물을 동물 사육 사료로 활용하는 수준의 것과 차원이 다르다는 점에 이목이 집중됐다. 와인 부산물이 소, 양, 돼지 등 가축 동물과 양식업의 사료로 활용됐던 1차적인 수준의 것을 넘어, 인체에 유익한 새로운 화합물을 생성할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번 연구에 함께 참여한 아만다 신로드 수석 연구원은 “이번 연구 성과는 단순히 와인 생산 이후 버려진 포도 잔해들에 대한 연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면서 “포도 잔해물 연구를 통해 남은 부산물만으로도 얼마나 유익한 화합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인류가 확인한 사례다. 이를 통해 인류는 폐기물 문제 해결이라는 또 하나의 성과를 얻은 것”이라고 했다.
연구팀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초기 연구 결과를 통해 잭슨 패밀리 와인즈 그룹(Jackson Family Wines)과 추가 제휴 협정을 맺었다. 잭슨 패밀리 와인즈 그룹은 미국을 대표하는 가족 경영 와이너리 기업이다.
이를 통해 향후 해당 기업과 연구팀은 샤도네이의 포도 줄기와 껍질, 씨앗 등을 지속적으로 연구해 분자 구성 연구를 진행할 것이라는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