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캔터 시음회에 다녀왔다. 미수입 와인을 시음할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지만 단지 미수입 와인이어서가 아니라 디캔터 매거진의 와인 평가위원들이 심사한 품질 와인을 시음하는 자리라는 것이 더 설렜다. 글쎄 조금 과장해서 생각한다면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들과 더불어 와인 시장에 의견 하나를 더할 수도 있다는 설렘이랄까? 만일 이 중 몇 가지의 와인이 수입된다면 한국에서는 가장 먼저 해당 와인을 맛을 본 몇 명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으쓱한 기분도 들고 말이다. 와인 허세꾼들이 참으로 눈꼴시긴 하지만 솔직히 나도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함을 고백한다. 만일 이곳에서 시음한 와인 중, 특히 내가 시음하고 좋았던 와인이 수입된다고 할 경우 솔직히 나는 으쓱할 것 같다. “그 와인 나는 시음회에서 먼저 마셔봤지. 부담 없이 가벼운 바디에 다양한 향이 레이어드 되어 있어서 그때도 정말 좋은 와인이라고 생각했었어. 이제야 수입이 되나 보네.” 하면서 한껏 난척을 해 주겠다.
나의 와인 생활은 이원으로 진행되면서 발전 중이다.
새로운 와인에 대한 정보를 탐험하고, 이를 밥상 와인으로 적용하는 것.
와인은 정말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고, 양조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새로운 철학과 스타일을 추구하는 양조자들은 매일 새로운 와인에 대한 꿈을 꾸고 이를 실현해내고 있다. 과거에 즐겨 마시던 와인을 계속 고수하기에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되기 쉽고, 다른 스타일의 와인에 대한 갈증도 더해진다. 그래서 좋아하는 와인을 하나만 꼽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환경에서 경험한 와인이냐에 따라 와인의 가치와 이미지는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하나만 딱 집어서 말하는 것은 어렵다 못해 불가능하다. 와인을 타인에게 추천하고 선물하는 것도 너무나 어려운 일인데 나는 당신의 와인 취향을 모르기 때문이다. 와인의 맛이 단순하다면야 어렵지 않겠지만, 와인은 맛을 결정하는 굉장히 많은 변수가 존재하고 있으므로 누군가 어떤 와인을 마셔야 한다고 묻는다면 순간적으로 질문자와 답변자의 처치가 뒤바뀔 수밖에 없게 된다. 나는 즐겨 먹는 음식에 관해 물을 것이고, 음식 취향을 물을 것이고, 어떤 자리에서 마실 와인을 구하는지 물을 것이며, 함께 먹을 음식이나 함께 식사 할 사람과의 관계, 과거 와인을 마셨을 때 당시 해당 와인에 대한 인상 등을 묻게 될 것이다. 대개 졸지에 질문자에서 답변자로 처지가 바뀐 당사자들은 무척 피곤해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아직 미숙한 나는 와인에 대해서 간결하고, 담백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
와인에 대한 탐구심과 호기심이 도저히 혼자서는 해결되지 않는 사람들은 시음 행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를 추천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와인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서는 위축되고 불편할 것 같다는 반응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이런 생각은 불필요하다. 시음회를 즐기는 사람들은 사실 와인 시음 외에 다른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리고 꼭 시음회에 나온 와인들을 잘 이해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그럴 수도 없다. 새로운 와인을 경험하고 배우러 가는 자리라고 생각한다면 매우 알찬 시간이 된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겸손한 태도로. 어떤 와인이 궁금하다 싶으면 주최 측에 질문하면 되고(질문을 굉장히 즐거워할 것이다.), 주최 측에서 배포한 정보지들을 활용하면 된다. 게다가 시음회에 나온 모든 와인을 다 마셔 봐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몇 가지를 마셔보고 이것이 내 취향이다 싶은 와인을 하나라도 발견한다면 그것으로도 시음회에서 얻을 수 있는 최선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시음회를 통한 최고의 결과는 내가 겪은 새로운 경험을 생활에서 즐기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벤트가 일상이 되는 짜릿한 경험. 물론 모든 시도가 성공하진 않는다. 그러나 도전하고, 활용하고, 변주를 주면서 와인을 매개로 일상을 경영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일명 ‘밥상 와인’이라는 명명으로 일상에서 와인 즐기기를 좋아하는 나는 캐주얼한 와인을 선호한다. 풀바디 와인이라고 불리는 ‘센 와인’들은 나의 밥상 문화와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간혹 식사 때 와인을 즐긴다고 하면 아직도 매일 저녁 미디움 레어로 구워진 두꺼운 스테이크를 먹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와인은 다양한 향과 스타일을 지닌 만큼 그와 어울리는 와인 푸드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절대 고정된 스타일로 박제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물론 클래식처럼 내려오는 공식들이 있긴 하다. 샤블리와 굴이라든지, 향이 강한 스테이크와 풀 바디 와인이라든지 달콤한 디저트와 포트라든지. 그러나 이는 많은 매칭 스타일 중의 하나일 뿐이지 절대로 변화가 불가한 고정된 진리는 아니란 얘기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주로 먹는 식으로 굴에 초장, 와인의 매칭이라면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와인의 맛을 즐기는 것을 포기하든지 초장을 포기 하든지(초장은 정말 강력하다). 또 양념이 안 된 소고기 숯불구이라면 풀 바디 와인보다는 미디움 바디 와인이나 무거운 화이트 와인이 나은 경우가 많았다. 와인의 스타일은 계속 변하고 있다. 사람들의 입맛도 물론 변하고 있다. 그리고 문화는 당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변주하고, 새롭게 창조하면서 발전한다. 어차피 와인은 우리의 전통적인 술은 아니므로 당연히 우리의 전통적인 식문화와 조우하기 위해서는 많은 조율이 필요하다. 우리가 즐겨 먹는 음식에 매칭할 와인을 찾아내는 일 혹은 새롭게 맛을 들이게 된 와인에 맞는 조리 스타일을 고민하는 일. 와인을 곁들이는 일상의 변주는 이렇게 시작하게 된다.
DAWA(Decanter Asia Wine Awards) 시음회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와인의 품질과 컨디션이었다. 총 41종의 와인들은 최상품이라 할 만했고, 스타일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와인들은 대부분 2010년대 빈티지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오래 숙성되지 않으면 거칠고 투박하다고 얘기되는 산지오베제로 만든 끼안띠 중 베스트 끼안띠로(96 point) 선정된 것은 2013년 산이었으며(Carus Vini, Gaudio, Chianti Classico Grand Selezione, Tuscany, Italy 2013), 묵어야 제맛이 난다는 보르도(심지어 포이약) 역시 2014년 산이 92 point로 실버 메달을 수상했다는 점이다(Dompierre, Pauillac, Bordeaux, France 2014). 물론 심사의 기준은 단지 당시 와인 컨디션만이 아닌 와인의 잠재 가능성이 고려 되기도 하지만 어린 와인이라고 할지라도 밸런스의 정도는 매우 훌륭했다. 이 와인의 경우 1년 차를 둔 2013년 산은 브론즈 메달(87 point)을 수상했는데 1년간의 시간 차이를 두고 와인의 변화가 얼마나 극명한지를 체험할 수 있었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보르도는 무조건 묵혀야 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낡은 생각인지 깨닫게 해 주는 경험이었다(물론 1년 더 묵은 2013년산의 경우 복합미와 더불어 여운의 정도가 훨씬 좋았으며 타닌의 정도는 많이 정돈되어 부드러운 맛이 좋았다). 심지어 산지에 대한 선입관을 깨기도 했는데 이탈리아 투스카니의 쉬라즈는 95 point를 받아 골드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쉬라즈는 무조건 호주지! 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이 행사에 참여한 소믈리에 중 한 분은 행사 소감을 한마디로 ‘(나는)우물 안 개구리’로 표현했다. 나 역시 동감한다. 평소에도 충분히 고려하고 있다고 했던 와인의 변화, 스타일의 다양성을 얘기했지만, 그것들의 실제적 체험은 신선하고, 즐겁고, 전의(?)에 불타게 했다.
지인들과 더불어 와인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면 와인을 접근하는 방식 역시도 사람마다 참 다르구나 싶다. 와인을 학구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도 있고, 액세서리처럼 활용하는 사람도 있고, 유독 유명세에 예민한 사람도 있고, 도구적 관점으로 와인을 이용하는 사람도 있고 정말 다양하다. 무엇인가를 향유하는 것에 정답이 있겠느냐만 내 생각은 그렇다. 와인이 매일매일 달라지는 만큼 와인을 대하는 소비자 역시 고여있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확고한 취향은 비판할 수 없으나 비교 대상이 없는 취향은 취향이라고 볼 수 없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안의 것을 우물 밖의 어떤 것과도 비교-선택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글에서도 밝힌바 내가 생각하는 최상의 와인은 밥상에서 즐겁게 마실 수 있는 와인이다.
즐겁게 와인을 즐기기 위해서는 평소 내 밥상에 어울리는 와인을 고르는 일도 중요하지만 반대로 와인에 맞는 밥상을 차려내는 일도 똑같이 중요하다. 당연히 많은 시행착오가 생긴다. 하지만 이는 다른 도전에 대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지난해 떫고 공격적인 싸구려 까베르네 소비뇽이 청어 과메기와 기가 막힌 매칭이 된다는 걸 알게 된 순간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혹시 그 매칭이 실패할까 산미가 공격적인 소비뇽 블랑을 보험 삼아 준비하기도 했다). 과메기에는 어리고, 거친 까베르네 소비뇽이 어울린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비단 와인뿐이겠냐만 우리는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매일매일 조금씩 진보한다. 그러나 익숙한 생각, 익숙한 생활 습관은 우리를 익숙한 것에만 머물게도 하고, 자기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게도 한다. 종종 평소와 다른 환경은 나의 정체를 깨우치게 하는 신선한 자극이 된다. DAWA에서의 경험이 나의 밥상 와인이 어떤 변화를 이루어낼지 매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