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와인의 부활 2 – 부르고뉴의 부상
중세 초기부터 후기까지 포도밭의 양상은 비슷했다. 초기부터 군림하던 교회와 수도원의 포도밭도 중요하긴 했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반인 소유의 포도밭이었다. 특히 소작농들이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헌신했던 포도밭들에서 얻어지는 포도와 그로 만들어진 와인들은 유럽 전역의 와인 생산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수도원의 포도밭에서는 상업용 와인을 생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은 예로 중세 시대를 풍미했던 부르고뉴의 시토 수도원은 귀족이나 왕족의 유산과 기부를 통해 얻게 된 포도밭이 수십 개에 달할 만큼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구사했지만, 남프랑스 같은 경우 시토회의 교리를 따르는 수도원들은 필요한 만큼만 와인을 만들었다. 부르고뉴의 시토 수도원처럼 규모가 큰 곳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상업용 와인 생산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소작농들이 재배한 포도밭이 없었더라면 중세 시대의 와인 생산과 무역이 그만한 규모로 발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수도원의 재산이 늘어난 것은 십자군 덕분이었다. 개인적으로 <킹덤 오브 헤븐>이라는 영화를 인상 깊게 감상하면서 십자군 전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어렴풋이나마 느꼈던 것 같다. 요약하자면 십자군 전쟁은 “1095년부터 1291년까지 간헐적으로 일어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레반트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일어난 전쟁”이다. 유럽에서 기독교가 번성하면서 신도들은 예수가 일생을 마쳤던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기나긴 순례의 길을 떠나곤 했는데, 이를 성지순례라고 한다. 다만 647년부터 예루살렘은 이슬람에 점령당했다. 본래 이슬람 군주들은 정치적 관점에서 순례자들을 박해한 기록이 전무하지만, 본래 이슬람 세력권은 유목민의 약탈이 일상화된 지역이라 약탈당한 순례자들이 굉장히 많았다. 때문에 비록 과장된 소문이기는 하지만, 기독교 순례자가 이슬람 세력에게 박해를 받는다는 소문이 슬금슬금 퍼지게 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1세기 수니파 이슬람 세계를 통일한 셀주크 제국은 순례자들이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는지 감이 없다 보니 초기에 순례자들을 박해했고, 이게 도화선이 돼서 서유럽인들은 분노로 끓어오르게 된다. 당시 교황이었던 우르반 2세가 성지를 이교도로부터 되찾기 위한 십자군을 제창한다. 이렇게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1096년부터 200여 년간 총 8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1차 십자군 때 예루살렘을 잠시 탈환했으나 다시 빼앗겼고, 붉은 수염 왕 프리드리히 1세, 사자심왕 리처드 1세, 존엄왕 필립 2세가 참전한 최강의 십자군으로 유명했던 제3차 십자군도 성지탈환에 실패하면서 예루살렘은 끝내 기독교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여하튼 2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전투에 나섰던 기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사후 평안을 위한 기도를 청하며 교회에 재산을 기부했다. 기록에 따르면 시토회의 교리에 따르던 수도원은 12세기 동안 포도밭을 하나 이상씩은 기부받았다고 한다. 또한 어느 수도원의 기록에는 1157년 미망인 레지나는 죽은 남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 달라며 3아르팡(16,523제곱미터)의 포도밭을 기부했다고 적혀 있다.
이전 편에서도 열심히 설명했지만, 수도원과 포도밭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시토회는 역사상 가장 포도밭과 밀접한 수도원이라고 할 수 있다. 시토회는 가톨릭교회의 ‘봉쇄’ 수도회 중 하나다. 시토회의 수도자들은 하얀색 수도복 위에 검은색 스카풀라레를 걸치는데, 이 때문에 이따금 백의의 수도자들이라고도 일컬어졌다. ‘봉쇄’라는 단어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시토회 생활의 포인트는 신앙, 기도, 금욕, 육체노동에 집중하는 것. 때문에 수작업과 자급자족으로 연명했기 때문에, 많은 유럽의 시토회 수도사들이 포도 재배에 몰입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갈 점은 수도회 명칭이 부르고뉴 디종 인근의 마을 시토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베네딕토회 수사 일부가 성 베네딕토의 규칙을 보다 엄격하게 따르기 위해 1098년 시토에 대수도원을 건립한 것이 시초다. 이후 승승장구한 시토회는 12세기 말엽까지 프랑스에서 뻗어 나가 서유럽은 물론 동유럽까지 진출했다. 시토회 수도사들이 포도 재배와 와인 생산에 정성을 쏟은 것은 이들이 무슨 일을 하든 완벽을 기했고, 신이 내린 선물인 포도와 와인을 돌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르고뉴에서 포도밭 하나로 시작된 시토 수도원의 재산은 코트 도르를 따라 본(Beaune), 포마르(Pommard), 뉘(Nuits), 코르통(Corton) 등 뛰어난 품질의 와인 생산지까지 늘어났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 포도밭들이 지금은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유산이다. 특히 1100년에서 1336년 사이 수도원이 부조(Vougeot)에서 사들이거나 선물로 받은 크고 작은 포도밭은 수십 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1336년 이 땅들을 잇자 50만 평에 달하는 부르고뉴 최대의 포도밭이 탄생했다. 이 포도밭은 다른 곳과 차별화하기 위해 돌담으로 둘러싸였고, 훗날 클로 드 부조(Clos de Vougeot)라 불리게 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시토 수도원이 처음부터 좋은 포도밭을 가지고 훌륭한 포도를 얻은 것이 아니다. 이들의 업적이 눈부시게 느껴지는 것은 이 당시의 포도 재배나 와인 메이킹 기술이 이렇다 할 발전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품질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중세의 와인 생산법은 다른 가공품이나 맥주 생산과 다를 바 없었다. 많은 와인 생산자들이 고대의 생산법에서 아주 약간 나은 정도의 기술로 1년이 채 못 가는 조악한 와인을 만들었다. 즉 와인 생산이란 선조들이 이어온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노동집약적 산업이었다.
하지만 시토 수도사들은 떼루아와 와인에 대해서 진지하게 연구했다. 구체적으로 땅을 다지는 방법, 가지치기하는 방법, 접붙이기하는 방법에 대해서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 결국 수도사들은 이 땅과 저 땅의 특성이 다른 것을 간파하고 서로 다른 땅에서 나온 와인들이 같은 품종이라도 해가 지나도 다른 향과 맛을 지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이 때문에 포도밭을 돌담으로 구분한 것이다. 즉 크뤼의 탄생인 셈이다.
이런 노력 덕분에 그들의 와인은 금세 유명해졌다. 사람들이 포도밭을 시토회에 헌납한 이유도 여기서 비롯되었으며, 이윽고 국가에서는 와인에 특혜를 내렸다. 기록에 따르면 1171년 교황 알렉산더 3세는 시토회에서 생산한 포도에 대해서 십일조를 면해주는가 하면 9년 후에는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파문을 각오하라는 말까지 덧붙였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프랑스 루이 7세는 이들 와인의 수송과 판매에 따르는 세금을 면제해 주기도 했다. 덕분에 시토회의 세력은 급속도로 확장됐고, 설립 50년 만에 수도원이 400개에 달했다. 물론 수도원이 있는 곳에서는 늘 포도와 와인이 탄생했다.
중세 시대 전체를 보면 와인 생산은 꾸준하게 증가했지만, 정치적으로도 늘 불안했고 끊이지 않는 전쟁 때문에 성장 곡선이 들쑥날쑥했다. 그중 가장 큰 폭으로 하락했던 시기는 흑사병의 창궐이다. 비단 와인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유럽은 말 그대로 암흑으로 변했다. 흑사병은 쥐에 기생하는 벼룩이 지닌 페스트균이 사람에게 전파되면서 유럽을 집어삼켰다. 흑사병이 극성을 부린 1348년과 1400년 사이 유럽 인구는 3분의 2로 줄어들었다. 노동집약적인 산업인 포도 재배와 와인 생산은 당연히 침체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부르고뉴의 경우 14세기 말부터 피노 누아 와인으로 명성을 쌓긴 했지만 이곳 또한 전염병과 전쟁의 영향을 심각하게 받았다. 부르고뉴에서 1360년대부터 재배하기 시작한 가메가 점차 영향력이 증가한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보졸레 지역의 와인들을 만들 때 사용되는 가메 누아는 피노 누아에 비해 질은 떨어지지만 장점이 있다. 이 품종은 환경에 대단히 민감한 피노 누아에 비해 재배하기 훨씬 쉬웠고, 수확 시기가 대체로 빠르기 때문에 늦은 서리나 여러 악재에 노출될 가능성이 적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수확량도 더 많았다.
하지만 가메의 확장은 피노 누아를 고집하던 주변 와이너리들의 반발을 샀다. 결정적으로 당시 부르고뉴 공작이었던 필립(philippe)은 가메는 지역의 법률과 풍습에 위배되는 유해한 품종이라고 선전하면서 뿌리 뽑으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결국 부르고뉴의 와인 무역은 흑사병의 여파로 휘청거렸고 필립 공 때문에 가메의 재배까지 등한시되면서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덕분에 피노 누아가 부르고뉴를 상징하는 레드 품종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물론 가메는 여전히 남아 있다. 보졸레 와인의 대표 품종으로 활약하고 있음은 물론, 피노 누아와 블렌딩해서 파스투그랭이라는 와인도 탄생시킨다.
이 당시 와인을 제아무리 잘 만든다고 해도 운송에 문제가 있다면 그 지역은 발전할 수 없었다. 보르도가 가장 먼저 우위를 점한 이유도 항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다 할 수로가 없던 부르고뉴는 어떻게 발전할 수 있었을까? 부르고뉴 특히 코트 도르의 본 와인은 품질로 이 약점을 극복해 낸 이례적인 경우였다. 본 와인이 근방 최대의 와인 소비 시장이었던 파리에 도착하려면 우선 욘 강까지 마차로 이동을 한 뒤 다시 배로 옮겨 실은 후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하지만 본 와인의 가치를 알아차린 파리의 와인 애호가들은 운송 비용뿐 아니라 다른 프랑스 와인보다 높게 책정된 세금까지 기꺼이 부담했다. 파리 당국이 본 와인에 부과한 세금은 파리 인근 와인의 4배였다. 참고로 그 당시에는 파리 근처에도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만들었다.
15세기까지는 부르고뉴 와인으로 불리지 않았던 본 와인이지만 이 제품이 최고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와인 전문가는 없었다. 본 와인은 부유한 권력층 사이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더욱 명성이 높아졌고 1300년대부터는 프랑스 왕의 식탁에도 올랐다. 디종 시장은 샤를 9세의 영접을 앞두고 본으로 특사를 보내 와인을 사 오게 했다. “폐하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와인을 선물해야 한다”는 일념에서였다. 본 와인은 아비뇽에 거처를 마련한 교황청에서도 인기였다.
여담이지만, 아비뇽도 결국 정치, 종교적인 이유로 와인이 유명해진 사례다. 14세기 로마 교회는 ‘대분열’을 겪으면서 두 명의 교황을 탄생시켰다. 이 중 한 명은 로마에 남고 다른 한 명은 프랑스 론 지역 남부의 아비뇽에 거처를 마련했다. 이로 인해 론 강 일대가 새로운 와인 소비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교황은 물론 휘하 사제들이 모두 와인을 즐겼기 때문이다. 덕분에 론 강 일대의 포도밭은 급속도로 증가했고 이 지역은 훗날 ‘샤또뇌프뒤파프’ 와인으로 유명해졌다. 참고로 이 의미가 ‘교황의 새로운 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