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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탄생 (5부)

5. 이슬람 문화의 등장, 와인의 암흑기

7세기 이후 포도 재배와 와인 생산의 미래는 위기를 맞게 되는데, 바로 이슬람 문화의 등장이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는 알코올을 제조하고 소비하는 것 일체를 금지했고, 그 때문에 이슬람교를 믿는 곳에서 맥주와 와인 생산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마호메트는 알코올 제조와 소비를 금지하게 되었나? 아니, 애초에 마호메트란 누구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슬람에 대해 약간의 탐구를 해야 한다.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쿠란 / 사진 출처: wikimedia

아랍의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중동, 그리스, 로마, 이란, 인도 문화를 흡수해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것을 이슬람 문화라고 한다. 여기서 핵심은 마호메트다. 마호메트는 달리 무함마드라고도 한다. 그는 이슬람교를 만든 아랍의 예언자로서 아랍의 메카에서 출생했다. 참고로 메카는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의 히자즈 지역에 있는 마카 주의 주도이자 이슬람의 성지인데, 지금의 무슬림 신도들은 하루에 다섯 번씩 마호메트가 태어난 메카를 향해 기도하며, 일생에 한 번은 꼭 메카를 순례한다고 한다.

1787년 오스만 시기 제작된 메카의 지도 / 사진 출처: wikimedia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가난한 삶을 살았던 마호메트는 나이 25세에 부유한 미망인이자 메카의 거상이었던 카디자와 혼인하면서 40살까지 부족함 없이 부유한 삶을 누렸다. 그러다 40세가 되던 610년 바위가 자기에게 인사한다는 등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급기야 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을 만나 신의 계시를 받으면서 이슬람교를 창시, 3년 뒤인 613년부터 공개적인 포교 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수많은 박해를 받았으나, 메디나로 이주해 세력을 불렸고, 혈투 끝에 630년 메카를 정복하게 된다.
마호메트는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하고 죽었다. 당시 마호메트가 중심에 있었던 ‘움마’라 부르는 이슬람 공동체는 부족 간 회의를 통해 ‘칼리프’ 즉, 이슬람 제국의 최고 통치자를 선출하게 된다. 칼리프는 아랍어로 ‘할리파’라고 하는데 이는 ‘계승자’, ‘대리자’라는 뜻을 지닌다. 칼리프 제도는 마호메트 사후 흩어진 이슬람 세력을 다시 끌어모으기 위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첫째 칼리프는 마호메트의 오랜 친구였던 아부 바르크였는데, 사실 그는 마호메트의 장인이다. 살아생전 마호메트는 무려 10명의 아내를 두었고, 그중 한 명이 아부 바르크의 둘째 딸 아이샤였다. 둘이 결혼할 당시 아이샤의 나이는 불과 6살이었다고 한다.

이슬람 제국의 영토 / 사진 출처: wikimedia

여하튼 칼리프가 대를 이어가면서 이슬람 세력의 세력도 점차 확장하게 되었고, ‘제국’이라는 단어가 붙을 만큼 광대한 세력을 자랑하게 된다. 661년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는 중국 당나라 국경까지 정복했고, 인도 구자라트, 파키스탄과 프랑스 남부,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이 이슬람 제국의 영향에 놓였으니, 실로 중세 최대의 제국이라 불릴 만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슬람 제국은 영토를 확장하면서 정복지의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지 않고, 불사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종교도 인정해주었다. 다만 세금을 거둬들였고, 이마저도 이슬람교로 개정하면 동등한 대우를 해줄 것을 약속했다고 한다. 이런 부분이 이슬람 제국이 수월하게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로 꼽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가 발생한다. 통치권 내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세금이 줄어들면서 경제가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 이런 혼란 속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1258년 아바스 왕조가 멸망하면서 칼리프 시대는 종말을 맞는다. 이슬람 제국이라는 말도 동시에 사라지게 되었다.

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은 무함마드(14세기 그림) / 사진 출처: wikimedia

이슬람 제국이 존재하던 그 시기, 와인이 최초로 번영을 누렸던 곳은 물론, 스페인과 포르투갈처럼 포도 재배가 늦긴 했지만 와인이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곳까지 알코올을 금하는 종교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이슬람교에서 금주를 강조한 이유는 술 때문에 벌어지는 폭력 행위 때문이다. 마호메트가 23년간 신에게 받은 계시를 기록한 쿠란(혹은 코란)에 따르면, 와인은 기분을 들뜨게 하고 건강에 좋은 음료라고 되어 있지만, 다음과 같이 부정적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신도들이여, 와인과 도박과 우상과 점은 사탄이 만들어 낸 가증스러운 습관이다. 너희들은 이와 같은 습관을 멀리해야 번영을 누릴 수 있다. 사탄은 와인과 도박을 통해 너희들의 마음속에 원한과 증오를 불어넣고 알라와 기도문을 잊게 만든다”

일화에 따르면 마호메트가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와인을 마신 하객들이 서로를 끌어안고 행복한 분위기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마호메트는 이를 보고 와인에 축복을 내렸다. 하지만 다음날 그곳을 찾았더니 술에 취한 하객들이 싸움을 벌여서 사방이 시체와 피투성이였다. 마호메트는 축복을 저주로 바꾸고 신도들에게 금주령을 내렸다. 마호메트는 포도즙을 만들거나 저장하는 용기의 종류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와인 생산을 막았다. 구체적으로 호리병, 송진을 칠한 토기, 속을 파낸 야자나무 그릇을 금지했고 가죽 주머니만 허락했다고 한다. 사실 용기가 무엇이 문제겠는가? 와인은 그저 발효될 조건만 맞으면 만들 수 있거늘. 그 때문에 와인 생산이 완벽하게 차단될 수가 없었다.

중동 지역에서 주식에 가까울 정도로 널리 먹는 대추야자 / 사진 출처: wikimedia

재미있는 사실은 마호메트의 부인들도 그를 위해 나비드(Nabidh)라는 음료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나비드는 대추야자나 말린 포도를 가죽 주머니에 넣고 물을 부어서 만드는 건데, 마호메트는 아침에 만든 나비드는 저녁에, 저녁에 만든 나비드는 다음날 아침에 마셨다고 한다. 이론상 반드시 가죽 주머니 안에서 발효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기에, 그조차도 아침, 저녁으로 알코올을 섭취한 셈이다.

이탈리아지만 중동의 분위기가 풍기는 시칠리아 섬 / 사진 제공: 배두환

물론 마호메트의 금주령이 발효 즉시 모든 지역에서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다. 한 번 맛 들인 알코올을 쉽게 끊을 수 없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그리고 이슬람 제국 내의 모든 곳에서 금주령이 내려진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이슬람교의 발상지와 가까우면 조치가 엄격했고, 멀면 멀수록 전통을 많은 부분 유지할 수 있었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시칠리아, 사르데냐, 크레타 같은 곳은 와인 생산이 불법이긴 했지만, 와인의 존재까지 완벽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스페인에서는 금주 조치를 색다르게 해석해서 음주를 허용하기도 했다. 즉, 코란에서 금지한 술은 포도로 빚은 와인이기 때문에 대추야자로 만든 건 마셔도 된다는 주장을 펼쳤던 것. 이런 논리는 대추야자 와인이 괜찮다면, 포도 와인도 대추야자 와인보다 도수가 낮으면 괜찮다는 논리까지 뻗어 나갔다고 한다.
각 지방에서 금주 조치가 어떻게 진행이 됐고 그걸 어디까지 받아들였는지 세세히 알 수는 없지만, 명확한 것은 이슬람 제국의 팽창이 포도 재배와 와인 생산에 브레이크를 걸었다는 사실이다. 기록에 따르면 칼리프 우스만은 지금의 스페인 발렌시아 지방의 포도밭 2/3를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나머지 포도밭은 식용 포도와 건포도 용이었다. 또한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와인 문화가 자취를 감추게 된 것도 이슬람 문화가 남긴 흔적이다.

(다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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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쟁이부부

선후배 사이였던 와인 매거진 기자 출신 남자, 소믈리에 출신 여자. 살아오며 경험한 와인의 절반을 함께 마셨고, 앞으로 만나게될 와인들은 항상 같이 마시게 될 동반자 관계. 평소엔 식당 주인, 때론 여행작가, 이따금 와인 강사, 이곳에선 와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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