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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탄생 (22부)

22. 와인의 사회화 – 필록세라와 그 영향

19세기 후반 와인 산업은 생산과 소비량이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고급 와인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상승 곡선을 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필록세라(Phylloxera)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했던 전염병으로 페스트를 꼽는다면, 필록세라는 와인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악의 재앙이었다.

한 병의 와인이 탄생하기까지 수많은 고초와 난관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포도 재배자들에게 가장 민감한 문제이자 예기치 않게 골머리를 썩이는 일이 바로 포도나무에 전염되는 바이러스와 곰팡이 혹은 해충들이다. 특히 양조용 포도인 유럽의 비티스 비니페라(Vitis Vinifera)에는 수많은 적들이 있다. 그중 최악의 상대는 주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건너온 해충과 질병들인데, 그들과 접한 기간이 짧아 포도나무가 아직 자연적인 저항력을 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포도나무는 아무리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지만,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 / 사진 제공: 배두환

때는 19세기 중반, 식물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연구와 실험 혹은 재배를 위해 온갖 식물들이 배를 타고 대륙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이와 같은 무분별한 무역 거래가 기존의 토착 식물군에 초래하게 될 위험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고, 당연히 아무런 제재 조치도 시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유럽으로 건너온 식물 중에는 많은 숫자의 포도나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포도나무의 뿌리에 와인 역사에서 가장 절망적인 사건의 주범으로 인식되는 필록세라가 숨어 있었다.

필록세라의 암컷은 한 번에 수백 개의 알을 낳았기 때문에 바퀴벌레처럼 매우 빠르게, 급격히 개체 수가 늘어난다. 필록세라의 주식은 포도나무 뿌리의 수액이며, 그마저도 동이 나면 줄기와 잎으로 올라가서 남은 수액을 빨아 먹는다. 이들의 습격을 받은 포도나무는 뿌리에 혹이 생기고 수액이 말라 조직이 비틀어졌다. 종국에는 잎까지 누렇게 변해 종잇장처럼 떨어지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필록세라가 태평양이나 대서양을 건너 유럽에 상륙하게 된 것이 인간 때문이고, 유럽 대륙에서 그토록 광범위하게 퍼지게 된 것도 다름 아닌 인간 때문이라는 점이다. 바다를 건널 때는 배에 실려 있는 포도나무에서였고, 유럽 대륙에서는 인간의 장화나 연장에 뭍은 흙, 혹은 관개용수를 통해 널리 전파될 수 있었다.

포도나무의 필록세라 / 사진 출처: wikimedia

영국과 프랑스 남부 지방에서 감염 사례가 처음으로 보고된 때는 1863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로부터 10년이 채 안 되는 사이 프랑스 전역에서 말라 죽어가는 포도나무들이 속출했다. 다만 포도밭이 폐허로 변하는 속도는 포도나무의 건강과 토양의 성질 혹은 포도밭의 고도에 따라 달랐다. 다른 병충해에 시달린 적이 있는 포도나무는 다른 포도나무보다 일찍 쓰러졌지만 척박한 땅에서 자라는 포도나무는 훨씬 오랫동안 버텼다. 혹은 매우 드물지만 아예 감염되지 않은 포도밭들도 있긴 했다. 많은 곳들이 있지만, 시칠리아의 에트나 화산에 위치한 몇몇 포도밭이 프리필록세라로 관리되고 있는 것이 좋은 예다. 대개 이런 프리필록세라 포도밭의 특징은 매우 척박한 토양과 높은 고도를 꼽을 수 있는데, 물론 이 또한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여하튼 론 강 남부 지역과 보르도가 필록세라의 첫 희생양으로 기록된 것을 보면 감염 경로가 두 곳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이 몇몇 포도밭은 필록세라의 피해를 입지 않은 곳도 있다. 사진은 시칠리아의 테레 네레의 포도밭 / 사진 제공: 배두환

1868년 결성된 위원회는 곧바로 필록세라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당시 위원장은 포도뿌리혹벌레가 참나무 잎사귀에 혹을 만드는 진딧물임을 밝혀냈고, 이 진딧물이 포도나무에서 자라는 특별한 종일 경우 필록세라 “바스타트릭스” 즉 파괴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이름이 생길 당시에는 다소 극단적인 표현으로 들릴 수 있었겠지만, 필록세라는 이후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포도 재배업자들은 위원회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필록세라가 날씨나 토양 탓이라고 생각했고, 심지어 종교계에서는 신의 노여움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구약성서를 보면 계명을 어길 경우 포도나무를 없애겠다는 신의 경고가 가득하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프랑스의 출산율이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현저히 떨어졌었는데, 와인 생산량 추락을 다산과 연관 짓는 어이 없는 발상이 등장하기도 했다. 즉, 포도 농사의 실패가 불임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후 범국가적인 차원의 위원회가 조사에 착수한 뒤인 1869년이 되어서야 필록세라가 원인이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었지만, 이미 사태는 걷잡을 수가 없었다. 한 해 평균 60억 리터를 생산하던 프랑스 와인 생산량은 1880년대부터 절반인 30억 리터로 떨어졌다. 포도 면적도 3분의 1이 줄었고, 그나마도 원활하게 재배가 이루어지는 땅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필록세라를 풍자한 카툰 / 사진 출처: wikimedia

필록세라로 인해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산업이 무너지고 있었지만, 정부의 대처는 안일하기만 했다. 역사적 배경에서 원인을 찾자면, 1870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이듬해 파리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이중고를 겪었고, 정부는 포도나무 따위에 주의를 기울일 여력이 없었을 게다. 게다가 발등 앞에 떨어진 불을 진화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필록세라의 확산 속도는 마냥 더뎌 보였다. 1870년 프랑스 정부는 필록세라 퇴치법을 발견하는 이에게 2만 프랑을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4년 뒤에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무려 7배가 넘는 30만 프랑으로 포상금을 올렸다. 엄청난 액수 덕분에 유용한 것에서부터 황당무계한 것까지 수백 가지에 달하는 의견이 쏟아져 들어왔고, 그중 미국 품종의 뿌리에 유럽 품종을 접붙이는 방법이 등장했다.

오늘날 유럽에서 재배되는 많은 포도나무는 미국 품종의 대목에 접붙이기를 실행한 것이다. / 사진 제공: 배두환

자존심 강한 프랑스의 와인 생산자들은 접붙이기로 인해 미국 와인의 맛을 닮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우려를 제기하면서 미국 포도나무의 수입을 전면 금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와는 별개로 필록세라가 미국에서 넘어 온 것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발심도 매우 컸다. 하지만 정부는 1800년대 말, 프랑스의 와인 생산지를 크게 세 군데로 나눈 뒤 피해가 심각한 남부는 바로 접붙이기를, 피해가 심하지 않은 중부는 미국 품종의 반입을 금지하고 살충제를 뿌리도록, 피해가 거의 없는 북부는 아무런 조치도 시행하지 않았다. 결과는 참담했다. 한 포도밭이라도 정부의 지침을 따르지 않으면 그 일대 전체가 재감염의 위험에 놓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접붙이기할 여력이 없던 영세 포도 재배자들은 눈물을 머금고 파산해야 했다. 1881년 보르도에서 열린 국제회의는 접붙이기를 최상의 필록세라 퇴치법으로 선택했고, 이후에서야 대대적인 접붙이기가 실시되게 되었다. 자료에 의하면 1900년 프랑스 포도밭의 3분의 2가 미국 대목을 접붙이기 한 포도나무였다.

접붙이기를 위한 뿌리 / 사진 출처: wikimedia

약간의 과장을 섞어서 이야기한다면, 와인의 역사는 필록세라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필록세라 이후, 비단 프랑스만은 아니겠지만, 와인의 위조가 더욱 극성을 부렸다. 프랑스 와인 산업이 허덕이는 동안 와인의 가격은 무한정 치솟았고, 수입 건포도 등 다른 재료로 와인을 제조하는 방법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1880년에 발간된 <건포도로 와인 만드는 기술>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절판되어 쇄를 거듭했고, 건포도 와인은 1890년 프랑스 와인 소비량의 10분의 1을 차지했다고 한다.

와인을 유통하는 이들은 더욱 가관이었다. 네고시앙들은 와인의 양을 늘리기 위해 물을 섞거나 포도가 아닌 다른 재료를 써서 와인을 위조했고, 와인 무역상들은 유럽의 다른 나라와 북아프리카에서 수입한 와인에 프랑스 와인을 섞어서 유통했다. 1880년대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에서 수입된 수억 리터의 진한 레드 와인이 묽은 프랑스 와인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에서 수입된 양은 이보다 많았다고 한다. 한 마디로 원산지의 개념이 없던 시기였다.

원산지 보호법의 필요성은 필록세라 때문에 대두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사진 제공: 배두환

하지만 엎친 데 겹친 격으로 필록세라의 해결책이 등장한 뒤인 1890년부터 1920년 사이 프랑스의 평균 와인 생산량은 오히려 1ha당 1,350리터에서 3,860리터로 3배 가까이 뛰었다. 이는 곧 공급의 과잉과 가격의 하락으로 이어졌고 리터당 와인의 가격도 폭락했다. 결국 포도 농사만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던 영세 포도 재배업자들은 몸과 마음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대부분 땅을 등진 채 도시로 향했다.

이렇게 19세기가 20세기로 바뀔 무렵, 프랑스의 와인 생산자들은 과잉 생산, 가격 하락, 수출 시장 붕괴, 공공연한 위조 및 변조 행위, 4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네고시앙들은 고급 와인과 저급 와인의 블렌딩을 멈출 생각이 없었고, 필록세라가 창궐하던 시절에 기승을 부리던 위조 와인은 정직한 와인들의 공급이 원활해진 뒤에도 자취를 감추지 않았다. 결국 민생고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정부를 보고 좌절한 랑그독의 포도 재배업자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1907년 6월 19일 정부와의 충돌로 시위대 5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 소식을 들은 동조자들은 파리의 시청에 불을 질렀다. 다행히 정부의 양보로 폭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부는 1907년 6월 29일 서둘러 새로운 법률을 제정했고, 9월에는 와인을 “신선한 포도 혹은 신선한 포도즙을 발효 시켜 만든 술”로 규정하는 조항을 만들었다.

필록세라 때문에 가장 큰 고통을 받았던 프랑스 남부 / 사진 제공: 배두환

탄력을 받은 정부는 1908년부터 샴페인, 코냑, 아르마냑, 보르도와 같은 유명한 술을 생산할 수 있는 지역의 생산과 포도 재배에 법적인 제한을 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와인의 생산을 허가받지 못한 지역의 항의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고, 얼마 후 샹파뉴 지역에서 대규모 충돌이 일어났다. 당시 정부의 규제에 따르면 샴페인은 마른과 엔에서 재배된 포도로 만들어야 했다. 매우 중요한 와인 산지인 오브의 포도밭은 제외가 된 것이다. 이것은 오브의 주도인 트루아가 샹파뉴의 중심 도시였던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모욕적인 처사였다. 또한 오브의 베이스 와인이 마른의 양조장에서 블렌딩용으로 쓰였던 관행도 무시한 것이었다. 결국 오브의 양조업자는 1911년 폭동을 일으켰고 정부는 오브를 2차 생산지로 지정하는 선에서 백기를 들었다.

현재 프랑스 와인의 제조는 엄격히 정부의 법의 통제 아래서 이루어지고 있다. / 사진 제공: 배두환

한편 마른의 양조업자들은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와인을 섞어서 판매하는, 즉 위조 와인을 만드는 중개업자들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이들은 1910년 12월에서 1911년 4월 사이 위조 와인의 진원지로 의심되는 저장실을 차례로 습격하여 병들을 모조리 때려 부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못 쓰게 된 샴페인이 수십만 리터에 달했다. 다시 한번 군대가 파견되었지만, 다행히 심각한 무력 충돌 없이 관련 법률 제정으로 폭동은 가라앉게 된다. 필록세라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생업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투철했던 것이다.

필록세라가 휩쓸고 지나간 이후 포도 재배업자들과 와인 생산업자는 비로소 정부와 손을 잡고 와인 산업의 보호와 육성에 나섰고,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시행된 다양한 정책은 프랑스 와인 산업을 부흥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현재 프랑스의 농산물의 품질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는 INAO는 과거 생업을 지키기 위해 쓰러져 간 조상들의 피로 일궈낸 결과물이며, 현재는 전 세계 와인 생산국들의 모범이 되는 등 프랑스 와인 산업에 있어서 절대로 간과되어서는 안 될 기구로 거듭나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AOC 제도가 와인 메이커의 창의성을 저해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과거 프랑스가 겪었던 진통을 되새겨 본다면 매우 엄격한 규정들로 이루어져 있는 AOC의 존재 이유에 대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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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쟁이부부

선후배 사이였던 와인 매거진 기자 출신 남자, 소믈리에 출신 여자. 살아오며 경험한 와인의 절반을 함께 마셨고, 앞으로 만나게될 와인들은 항상 같이 마시게 될 동반자 관계. 평소엔 식당 주인, 때론 여행작가, 이따금 와인 강사, 이곳에선 와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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