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와인의 산업화 3탄. 1855 그랑 크뤼 클라세
와인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서서히 이루어짐에 따라, 이에 발맞춰 와인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19세기부터 세계의 와인을 소개하는 서적이 출간되었다는 점이다. 와인 전문가들이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진부한 와인 평가 방식을 탈피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사실 18세기 말까지만 해도 전문가들은 근대 와인을 평가절하하는 고대의 인습을 답습했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 사이는 신고전주의 건축과 예술이 인기를 끌었고, 고전 문학 비평에 열을 올리던 때였다. 이런 분위기를 생각해보면 와인 전문가들이 고대 와인을 잣대로 근대 와인을 평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문학의 경우 고전과 근대를 서로 비교하며 장단점을 토론할 수 있지만, 고대 와인은 마셔볼 수 없다는 점에서 의미 없는 시도였다. 고대 와인과 근대 와인의 비교 평가를 목적으로 1775년에 발간된 어느 서적은 고대 와인 소개에만 거의 모든 부분을 할애했다고 한다. 또한 근대적인 시각에서 와인을 조명했던 최초의 인물로 꼽히는 파브로니라는 사람조차도 그의 서적에서 고대인들의 평가를 인용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19세기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진보 정신이 와인 전문가들에게도 스며들었다. 이들은 2천 년 전에 생산된 와인의 맛을 상상하며 헛소리를 늘어놓기보다는 근대 와인을 진지한 자세로 파고들었다. 이 당시 와인 문학의 기틀을 다진 사람은 크게 두 명으로 꼽는다. 하나는 프랑스의 와인 상인이었던 줄리앙으로, 그가 1816년 발표한 서적에는 프랑스는 물론 유럽, 나아가 세계 각지의 주요 와인 생산지를 총 망라되어 있었다. 두 번째 인물은 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와인 작가인 사이러스 레딩이다. 1833년 그는 영국에서 <History and Description of Modern Wine>을 출간했다. 책에는 전 세계의 와인을 소개하는 한편, 와인을 다루는 데 필요한 여러 실용적인 정보가 함께 들어 있었다.
19세기에는 중산층이 확장되고 부르주아의 성장으로 상품을 대하는 시각이 바뀌게 됐다. 산업화에 따른 대량 생산 체계가 확립되었고, 또한 광고를 통해 소비문화가 잡히게 됐다. 1851년 런던에서 대박람회가, 1855년에는 파리에서 국제박람회가 열리는 등 기존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상품을 위한 의식들이 곳곳에서 선을 보였다. 런던의 대박람회와 파리 국제박람회의 차이점이 있다면 런던에서는 술의 전시가 없었던 반면, 파리에서는 꽤 조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파리 국제박람회 조직위원회는 그 자리를 프랑스가 자랑하는 위대한 와인을 선보이는 자리로 삼을 요량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전설적인 1855 그랑 크뤼 클라세가 탄생했다.
와인 애호가들에게 ‘1855년’은 단순히 기억해야 할 하나의 빈티지가 아니라, 신화에 가깝다. 철옹성처럼 (거의) 변화 없이 200년 역사를 흘러 온 1855 그랑 크뤼 클라세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짝 살펴보자. 당시 나폴레옹 3세의 요구로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 박람회는 황제의 직계 사촌인 제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조직위원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만국 박람회는 그 의미에 걸맞게 프랑스가 자랑하는 우수한 제품을 선전할 목적으로 개최되었고, 1851년 ‘크리스탈 팰리스’에서 만국 박람회를 개최한 영국에 프랑스가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행사이기도 했다.
제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인장이 새겨진 조직위원회 편지에는 프랑스 전역의 도지사들에게 지역의 활성화와 전시 품목을 선정하기 위한 지역위원회를 설립할 것을 명령하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이는 각 도가 전부 참가해야 하는 최초의 국가 규모의 박람회였다고 한다.
당시 지롱드의 도지사였던 피에르 드 멍크는 명령에 따라 지역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해서 지롱드의 산업에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명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보르도 산업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와이너리 소유주들의 이름이 가장 먼저 거론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들이 와인 메이커의 입장이 아닌 ‘지주’의 입장에서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테른의 뤼흐 살리스 남작의 경우, 샤또 디켐의 생산자로서 초대받은 것이 아니었다. 와인은 제조업에 속하지 못했고, 그는 명사의 자격으로 초대받았다. 당시 주최자들에게 와인은 우선 품목이 아니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블라이(보르도의 세부 와인 산지) 농업 회의소 회원들은 자신들의 와인이 박람회와 특별한 연관성이 없다고 판단해 대표자를 보내지 않았다. 이 선택으로 이 지역 와인은 오랜 시간 명성을 잃게 됐다. 지금도 메독이나 그라브, 생테밀리옹 등에 밀려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여하튼 지역 신문에 보도가 나간 직후인 1854년 11월 중순부터 보르도의 많은 소유주들은 박람회에 와인을 출품하는데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보르도에서 맹활약을 하던 네고시앙 나다니엘 존스톤은 소유주들이 직접 와인을 출품하는 건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보르도는 적어도 18세기부터 인정받고 있는 크뤼 와인들이 존재했고, 이는 생산자와 중개인 그리고 네고시앙간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에 자칫하면 산업 전반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참고로 여기서 중개인이란 소유주와 네고시앙의 중간자라 할 수 있다. 보르도에서는 저항할 수 없는 상업적 파워를 가지고 있는 그들은 와인을 시음하고 주 고객층인 네고시앙의 취향에 맞는 와인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존스톤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도위원회는 그가 속해 있던 보르도 상공회의소에 건의해 수 세기 전부터 만들어진 전문적인 등급 제도를 고려하면서 지롱드 와인을 프로모션 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그 요청에 보르도 상공회의소는 내부의 전문가 위원회에 이 사안을 위임했다. 전문가 위원회는 1842년부터 보르도 시장을 지냈던 로디 마르땡 뒤푸르 뒤베르지에가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뛰어난 시음 실력과 엄청난 와인 컬렉션으로 유명했던 그 또한 존스톤의 의견과 다르지 않았다. 요지는 보르도의 모든 와인을 평등하게 소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위원회는 보르도 와인 중개인 조합에 와인의 가격에서 등급까지 명시한 등급표를 작성할 것을 제안한다. 또한 크뤼 클라세의 경우 5등급까지만 명시할 것을 권고한다. 물론 그들에게 이 등급표를 만드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오랜 시간 다듬어져 내려온 그들만의 등급표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우선 보르도에는 1855년, 그 한참 이전부터 와인 등급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647년 식량이 부족해지자 쥐라드 드 보르도는 지역별로 와인의 최소가와 최고가를 정하기 시작했다. 가격이 결정된 지 몇십 년이 지난 후에는 마을 단위로 가격 결정 및 등급화가 생겼다. 그 당시 1등급 마을은 페삭 Pessac, 메리냑 Merignac, 2등급은 탈랑스 Talence, 루아냥 Loignan, 그랑디냥 Grandignan, 코데이랑 Caudeyran, 브글 Begle이었다고 한다. 1740년경 이 등급은 다시 규모가 큰 샤또의 의해 새로이 서열화되었다. 우수한 포도밭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뜻의 크뤼 개념이 등장했고, 각각의 소도시들은 1, 2등급, 더 나아가 3등급 크뤼들로 서열화를 시작했다.
그 후 몇 번에 걸쳐 크뤼 등급에 변화가 있은 후 1786년, 1등급으로 4개의 크뤼만이 인정받았는데, 바로 전설적인 명성의 마고, 라피트, 라뚜르, 오브리옹이다. 이 4곳의 1등급은 변화가 없었지만, 꼬 데스투르넬처럼 4등급에서 2등급으로 승급한 샤또들도 있었고, 되려 몇 등급이나 추락한 샤또도 있었다. 등급 변화의 이유는 새로운 빈티지들과 모든 와인들의 가격 기준이었던 1등급 크뤼의 가격을 정하기 위함이었다. 이때부터 와인의 가격에 소유자의 수완이 더해지기는 했지만, 주요인은 그 해 생산된 와인의 품질이라는 것은 과거에도 확실했다. 그리 우수하지 않은 빈티지의 1등급 와인은 좋은 빈티지의 2등급 와인보다 낮게 평가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1등급이 항상 강조되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시 1855년으로 돌아가 보자. 보르도 상공회의소는 와인의 샘플을 받아 등급표를 작성하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고, 등급표는 1855년 5월 1일 만국박람회의 개장일 며칠 전에 완성되었다. 하지만 5월 1일로 예정되었던 박람회는 5월 15일로 연기되었다.
박람회 개장이 연기되면서 보르도 상공회의소의 대표로 온 앙리 갈로는 받아 놓은 6병의 크뤼급 와인들에서 한 병씩만 전시할 수밖에 없었다. 1등급의 와인들이 당연히 가장 눈에 잘 띄는 자리에 전시되었다. 나머지 다섯 병을 위해서 그는 지하에 셀러를 파야 했다고 한다. 전시실의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더위를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등급이 없는 와인들은 진열장 뒤에 보관했다. 그 당시 주최 측은 와인들이 더위와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을 테다.
지롱드 위원회는 보르도 상공회의소의 보호 아래 145박스의 와인을 출품했다고 한다. 가장 훌륭한 와인들은 11번 그룹의 심사위원들만이 맛볼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들은 모두 파리 사람들이었다. 사실상 이 시음회가 와인의 맛을 평가하는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더군다나 평가는 와인 레이블이 공개된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크뤼급 와인들을 제외한 나머지 와인들은 경제 분야를 담당하고 있는 심사위원들이 시음했다고 전해진다.
심사단의 주 역할은 메달을 수여 하는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출품했던 보르도의 크뤼 와인들은 모두 상을 수여 받았다. 가격은 이미 중개인들이 만들어 놓은 등급을 정확하게 준수해 정해졌다. 1855년 11월 15일, 만국박람회 폐막식은 이 행사의 실패를 알릴 뿐이었다. 1851년 영국의 만국 박람회를 능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을 뿐 아니라 엄청난 적자를 봤다. 그러나 보르도 와인에 있어서만큼은 그들의 훌륭함을 세계에 보이기 위한 서막을 열었다.
이 등급제는 마치 대리석에 새겨진 조각처럼 변함없이, 하지만 점점 더 선명해져 갔다. 훗날 무똥 로칠드가 되는 샤또 무똥이 1973년 1등급으로 조정되기 전까지 단 한 곳의 샤또가 등급의 상향 조정을 시도했으며 겨우 5등급에 올랐다. 이는 바로 샤또 깡뜨메를르다. 주인인 까롤린 드 빌뇌브 뒤포르는 집념을 가지고 수십 년 전부터 자기의 와인이 당시 5등급을 받았던 크로아제 바쥬와 동등한 위치에서 가격이 결정되어 있었다고 입증했다. 중개인 조합은 그의 손을 들어주었고 결국 이 와인은 1855년 만들어진 크뤼 클라세 와인 등급이라는 난공불락의 성에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보르도와 함께 프랑스 와인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부르고뉴나 샹파뉴는 박람회 출품이 배제되었을까? 1854년 11월 7일 디종 상공회의소 회장은 꼬뜨 도르 지방위원회 회장의 요청으로 지롱드 위원회에 편지를 쓴다. 이 편지에서 부르고뉴와 샹파뉴도 파리에 와인을 출품하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대답은 명료했다. 굳이 모든 와인이 출품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보르도 사람들은 만장일치로 철저하게 보르도 와인만을 위한 전시를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