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와인의 산업화 2탄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의 등장과 몰락은 와인의 산업화를 이끌어 냈다. 이와 같은 환경에 바통을 이어받은 19세기 유럽의 와인 산업은 꾸준한 성장세를 보였다. 많은 지역에서 와인 생산량이 증가했고, 뚜렷한 소비자의 기호가 생긴 한편, 와인 이외의 주류가 시장을 비집고 들어오기도 하면서 다채로운 음주 문화가 확산됐다.
여기서 매우 주목할만한 변화는 18세기 말부터 과학자들이 와인의 화학적, 생물학적 수수께끼를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전까지 와인의 발효나 숙성과 관련해서는 대중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기껏해야 와인을 만들면서 공기와 접촉이 되면 변질한다는 정도였는데, 사실 이 정도의 기초 지식은 고대인들도 알고 있던 것이다. 이 와중에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유황을 나무통 내부에 발라 와인의 변질을 늦춘다든지 혹은 와인에 주정을 첨가해서 변질을 막는다는 정도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올리브 오일을 와인 위에 띄워서 산화를 차단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상황에서 판도를 크게 바꾼 두 과학자가 있는데, 바로 라부아지에와 파스퇴르다.
18세기가 거의 저물어 가던 무렵, 발효에 관한 중요한 연구 결과가 나왔다.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기 직전, 과학자 라부아지에가 발효를 화학 작용으로 규정하는 저서를 발표한 것이다.
라부아지에는 매우 흥미로운 인생을 살다 간 사람이다. 그는 법률가 아버지, 재력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엘리트 코스의 교육을 받았으며, 불과 20대 중반에 세금 관리 조합의 조합원으로 일하며 젊은 나이에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 당시 세금관리조합의 징세원은 공무원이 아닌 민간업자였다. 그들은 재정난에 허덕였던 국왕에게 돈을 빌려주는 대신 일정 지역, 일정 기간에 대한 세금 징수권을 받아냈다. 세금을 얼마나 거두느냐는 거의 자유재량이었고, 일반적으로 이들이 거두는 세금은 국왕 직할지에 비교해서 2배가 넘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악덕 징세원들로, 이들이 프랑스 혁명의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담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천국에 가지 못하는 두 직업 중 하나로 이들을 꼽았다. 나머지 하나는 창녀였다.
라부아지에는 담배 위원회에 소속되어서 지역의 감찰관으로 일을 시작했고, 승진의 승진을 거듭하면서 꽤 높은 직책까지 올라갔다. 라부아지에의 이력이 매우 화려한데,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이사, 농업위원회의 위원, 은행 이사, 오를레앙 주 의회 위원, 화약 국장 등, 공직자로서도 꽤 높은 위치에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후 본인의 부를 기반 삼아서 사비로 연구실을 만들고 실험장비와 약품들을 사들여 화학 연구를 했다. 그가 한 실험 중에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 스케일이 있는데, 바로 다이아몬드 실험이다. 그는 다이아몬드가 탄소의 결정체임을 입증하기 위해 거대한 렌즈를 주문하고, 그 렌즈를 지탱하기 위해 이층 버스만 한 구조물을 설치해서 다이아몬드를 태워버렸다고 한다.
라부아지에의 연구 기반은 질량 보존의 법칙이다. 그는 물질에 화학반응이 일어나면 일어나기 전과 일어난 후의 질량이 항상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러 물질에 화학작용을 일으켜서 분해한 다음 질량을 재고 합성시켜서 같은 질량을 가지는지 연구했다. 이게 당시 와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하는 근거가 됐다. 라부아지에는 정제한 설탕을 가지고 알코올 발효를 했고, 발효 전과 발효 후의 질량 차이가 비슷하다는 결론을 냈다. 이후 포도즙을 가지고 당분이 알코올로 바뀌는 과정에서 질량 차이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는 결론까지 냈다. 당이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로 분해되는 현상을 알코올 발효라고 설명한 사람이 바로 라부아지에다.
라부아지에는 1794년 51세의 나이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악덕 징세원들이 프랑스 혁명 기간에 제일 먼저 처형대에서 몰살당하기 시작한 것도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라부아지에는 그중에서도 악질로 이름을 날렸기 때문에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참고로 라부아지에의 죽음을 애도했던 과학자 조제프 루이 라그랑주는 당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의 머리를 치는 데는 4분도 걸리지 않았으나, 그와 같은 머리를 다시 만드는 데에는 100년이 걸려도 부족할 것이다.”
라부아지에의 업적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게 된 것은 그의 헌신적인 아내 마리 덕분이다. 둘이 결혼할 당시 라부아지에가 28살, 마리는 13살로, 정략결혼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금슬은 매우 좋았다고 한다. 마리는 남편의 사형을 반대하는데 가담하지 않은 남편의 친구, 동료들과는 평생 연을 끊었다고 한다. 그녀 또한 혁명 정부에 의해 죽을 위기에 처했었지만,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고 무죄 판결을 받아 두 달 만에 풀려났다. 다만 라부아지에의 유죄는 뒤집어지지 않아 결국 부당이득으로 취득한 재산은 전부 몰수됐고, 그가 남긴 기록과 자료만 마리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마리는 이걸 평생에 걸쳐 세상에 알렸다. 나중에 라부아지에의 유해도 다시 찾아서 제대로 장례식을 치렀는데 이때 3천 명이 넘는 사람들, 특히 많은 화학자들이 참석했다고 한다.
아내 덕분에 세상에 알려진 라부아지에는, 정해진 용량으로 실험한 최초의 선구자이자, 현대 화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악덕 징세원으로 당시 지옥에 살던 국민들의 고혈을 쥐어짰던 인물인 것도 맞다. 라부아지에는 과학자이자 범죄자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 프랑스의 또 다른 위대한 과학자가 있다. 세균학의 아버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를 뽑을 때 항상 언급되는 사람이자, 프랑스 국민들이 존경하는 과학자. 수많은 수식어를 달고 있는 위대한 인물인 루이 파스퇴르는 생물학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구축했으며, 그 덕분에 비로소 생물학이 다른 기초 과학처럼 엄밀하게 현대적인 과학으로 거듭났다고 할 수 있다. 와인에서 발효를 일으키는 것이 효모임을 입증하면서 와인 발효 과학에서 기념비적인 발자취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무두장이였고,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였다. 앞서 소개한 라부아지에와 비교해서 완벽히 다른 시작이다. 다만 그의 부모는 교육열이 대단했다. 파스퇴르는 파리의 고등사범학교를 입학해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후에 중학교 물리 선생으로 임명되었으나, 교수들의 권유로 스트라스부르 대학에 남아 학위 공부를 계속했다고 한다. 만약 그가 대학에 남지 않고 물리 선생으로 살았다면 생물학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파스퇴르의 업적은 이루 말할 것도 없이 많지만, 와인에 관해서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현재까지도 뱅 드 파이유나 뱅 존과 같은 독특한 와인을 생산하는 쥐라 지방 출신답게 와인에 대해 다양한 관심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쥐라 지방 와인을 유별나게 홍보하는 면도 있었다는데, 수많은 실험을 할 때마다 쥐라 와인을 썼기 때문이다. 여하튼 와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와인 업계에서 와인이 사람에게 해롭다고 할 때마다 “와인은 건강에 가장 좋고 가장 위생적인 음료”라며 애정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했던 명언 중 와인과 관련한 것이 있다.
“와인 한 병에 책보다 많은 철학이 담겨 있다.”
파스퇴르가 와인 연구에 쏟은 시간은 1850년대 후반에서 1860년대 초반까지 약 4년 정도의 시간에 불과하지만, 그의 연구는 프랑스는 물론 여러 국가의 와인 생산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역할을 했다. 가장 빛나는 업적은 발효가 단순한 화학 작용이 아니라 생물학적 변화의 소산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질병에 박테리아가 미치는 영향, 또한 전염병 예방 분야를 연구한 대가답게 효모가 포도의 당분과 조우했을 때 발효가 시작되고 와인이 식초화 되는 것은 박테리아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라부아지에가 발효는 화학 현상이라고 주장한 지 200년이 지났지만, 그의 대단한 영향력 덕분에 파스퇴르 이전의 대부분의 화학자들은 발효가 화학 현상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가 릴 대학에서 근무할 때 근교의 와인 생산업자들이 와인의 변질 때문에 매년 손해를 입자 이를 해결해달라는 청원을 받아들이고 연구에 몰두했다. 이 연구 과정에서 발효에는 효모라는 미생물이 관여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파스퇴르의 논문이 나오기 200년 전에도 현미경을 발명한 네덜란드의 레벤후크가 효모의 존재를 알아냈지만, 그때는 현미경으로 관찰 가능한 미생물이 존재한다는 정도만 밝혀낸 것이다. 이후 150년간 효모에 대한 연구가 없다가 1835년 프랑스의 샤를 카니아를 드 라투르와 독일의 슈반이라는 두 과학자가 맥주 발효 통에 남아있는 찌꺼기를 관찰하면서 효모가 번식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시 50여 년간 연구가 뚝 끊기다가 1857년에 파스퇴르를 통해 효모를 통한 발효 현상이 연구된 것이다.
파스퇴르가 한 연구의 골자는 산소의 역할이다. 그의 실험 결과에 따르면 발효는 산소가 없는 환경에서도 잘 이루어졌고, 산소와 접촉하면 박테리아가 번식하면서 초산으로 변하는 것을 발견했다. 와인과 맥주, 그리고 우유의 부패에 특별한 세균이 관여한다는 것을 알아냈고, 60~100도의 저온에서 가열하면 대부분의 세균이 죽는다는, 이른바 ‘저온살균법’을 개발했다. 이는 파스퇴르의 이름을 따 ‘파스퇴르 공법'(pasteurization)이라고 하며, 저온살균법이 아니라 그냥 살균된 것도 ‘파스퇴르화'(pasteurized)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파스퇴르와 같은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토대를 마련하는 역할에 그쳤을 뿐 19세기 와인 제조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영세 농민이 대부분이었던 유럽의 와인 생산업자들은 과학적인 지식 없이도 가능한 전통적인 방식을 고집했다. 단순한 화학 작용이건 생물학적 변화의 소산이건 해마다 계속되는 것이 발효였고 이렇게 해서 생산되는 와인의 수명은 수십 년이 아니라 1년이 목표인 것이 그때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유명 와인 저서인 <샤프탈의 방식으로 와인을 제조하는 방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생산업자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전달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포도밭 대부분이 소규모였고 이들의 주인인 농민은 대부분 문맹이었던 것도 큰 문제였다. 게다가 소작농이 책에 있는 내용을 적용하기에는 재정적인 부담이 컸다. 설사 비용이 들지 않는 기술이라고 하더라도 위험 부담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설사 형편없는 와인이라는 평가를 받더라도 꾸준히 생산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생계 수단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거장인 발자크의 소설 <잃어버린 환상>에는 이 당시의 농민들의 태도가 여실히 드러나는데 다음과 같다.
“높으신 양반들 – 후작 나으리, 백작 나으리, 무슨 무슨 나으리들 – 말로는 내가 만드는 게 와인이 아니라 쓰레기라는군. 교육은 받아서 무엇에 쓰겠나? 이럴 때 써야지. 자네, 내 말을 듣고 생각해 보게. 이런 나으리들은 1에이커당 와인을 7배럴 혹은 8배럴 생산해서 1배럴당 60프랑을 받고 판다네. 그러니까 풍년이 들면 1에이커당 400프랑을 버는 셈이지. 나는 20배럴을 만들어서 30프랑을 받고 파니까 총수입이 600프랑이라네. 그럼 어느 쪽이 멍청한 사람이겠나? 품질? 품질이 나한테 무슨 소용인가? 품질은 후작 나으리, 백작 나으리들이나 따르라고 하게. 나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니까.”
당시 프랑스 와인 산업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