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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좋아하는 와인을 찾지 못하신 당신에게.

아직 좋아하는 와인을 찾지 못하신 당신에게.

황수진 2019년 8월 8일

이른 아침, 힘겹게 올라탄 지하철. 빡빡하게 들어선 승객만큼이나 범벅이 된 온갖 향들이 멍한 머리를 후려칩니다. 거기에 독감에라도 걸린 것인지 아니면 샤워기가 고장인지, 향수를 병째 뒤집어 쓴듯한 사람, 고등어구이에 김치, 청국장의 옹골찬 아침밥에 양치질은 까먹은듯한 이가 주변에 한 두 명이라도 있다면, 입덧하는 마냥 속이 울렁거립니다.

한 미국 대학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오감 중 잃어도 좋을 감각으로 후각이 1위였다고 합니다. 대도시에서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후각은 어쩌면 가장 곤혹스러운 감각일지도 모릅니다. 늦은 저녁, 소주에 숯불, 고기 양념, 파무침, 생마늘에다 땀에 전 체취까지 뒤엉킨 퇴근길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도무지 코를 계속 달고 다녀야 하는 것인가, 회의감이 듭니다. 차로 출퇴근을 한다고 한들, 앞뒤로 둘러싼 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배기가스에 코가 메워 숨쉬기가 힘듭니다.

대규모 공장식 농업으로 생산된 슈퍼마켓의 채소나 과일들은 그 고유의 향을 잃어버린 지 오래고, 꽃집의 꽃다발마저도 향이 신기루 같습니다. 음식이 향을 잃으니 설탕과 자극적인 조미료가 그 자리를 꿰차고 앉고, 집안 공기는 발암물질이 포함된 페*리즈가 꽃과 나무를 대신합니다.

푸른 싹 하나 버티고 자랄 틈 없는 콘크리트 벽에 둘러싸여 밤하늘 별도 뵈지 않는 삶. 살면서 후각 덕분에 행복감을 느낀 적이 언제인가 떠올려보면, 불쾌했던 경험들이 외려 더 많습니다. 인간 아닌 풀과 나무, 꽃으로 가득 찬 자연의 향기는 갈수록 멀어집니다. 가장 원시적이고 강력한 감각이라는 후각도 퇴화합니다.

와인에서 무슨 향이 나긴 납디까?

대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수많은 우리에게 후각적 즐거움이란 좋아하는 사람의 향수나 공복에 보글보글 끓는 라면 냄새 정도일까요. 게다가 OECD 회원국 중 근무시간 2위의 빡빡한 삶을 사는 한국 직장인. 이런 생활에 어울리는 술은 앞뒤 볼 것 없이 탁 털어 넣고 신속 정확, 얼큰하게 취해 하루를 끝낼 수 있는 소주나 폭탄주, 보드카가 더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온몸이 노곤한 늦은 저녁, 내내 죽이려 애썼던 감각을 억지로 끌어모아 와인에 코를 담그는 수준으로 유리잔에 머리를 박고 집중해봅니다. 그렇지만 나는 향이라고는 “와인향” 정도로 밖엔 묘사가 안 됩니다. 레드와인은 레드와인향, 화이트와인은 화이트와인향. 건강에 좋다고 마셔보려는 와인이 곤욕스럽기만 합니다.

보르도 메독 지역에서 생산된 이 레드와인은 강한 블랙커런트 향과 삼나무, 타르, 시가, 송로버섯, 부엽토 향에 타닌은 벨벳과도 같이 부드럽다.

누가 쓴 시음기를 읽자니 이건 뭐 안드로메다에서 우주복 없이 헤엄치는 기분입니다. 블랙베리, 블랙커런트, 구스베리, 패션프루트, 구아바, 제비꽃, 린덴, 허니서클, 아니스, 육두구, 정향, 팔각…. 해외여행서 몇 번 먹어본 열대과일은 어렴풋이 알 것도 같고, 향신료 이름도 중국요리 먹을 때 들어본 것 같지만, 이들이 어떤 향을 내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코앞의 옆 동네, 프랑스와 영국도 와인을 표현하는 용어가 달라

국제적으로 와인 시음기에 쓰이는 용어는 대부분 영국 혹은 프랑스에서 왔습니다. 그 때문에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에서 쓰는 와인용어 또한 그 영향을 많이 받았지요.

조각배로 노 저어 왕복이 가능할 만큼 가까운 이 두 나라 사이에도 와인을 묘사하는 표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차이가 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물며, 저 넓고 넓은 유라시아 대륙을 사이에 둔 우리나라와 이 유럽 국가들은 오죽할까요? 사계절이 뚜렷하고 온난기후대에 속하는 북반구 국가들이라는 공통점에도,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 된다는 말처럼 이 두 나라와 한국의 자연은 비슷한 듯 아주 다릅니다.

영국에서 곧잘 쓰는 용어인 페어드롭 Peardrop, 구스베리 Gooseberry는 프랑스에서 잘 쓰지 않습니다. 프랑스에는 배, 바나나 향이 나는 영국식 페어드롭이란 사탕이 없고, 구스베리도 북부지역을 제외하면 드뭅니다. 구스베리는 가시 있는 관목에서 나는 반투명 초록빛의 엄지손톱만 한 열매인데, 주로 소비뇽 블랑을 묘사할 때 자주 씁니다. 프랑스어로는 그호제이 아 마크호 Groseille àmaquereau, 고등어 레드커런트라는 얄궂은 이름을 가지고 있어 더 잘 쓰이지 않는지도 모르겠네요.

오크 향이 강하지 않은 피노 누아를 말할 때 영국인들은 크리스마스 푸딩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빨갛고 검은 베리 종류와 감귤류의 즙, 당밀에 때때로 브랜디를 첨가하여 만드는 영국, 아일랜드의 크리스마스 전통 메뉴인 이 디저트를 아는 프랑스인들은 드뭅니다. 자연스럽게, 프랑스에서는 크리스마스 푸딩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지요.

한편, 프랑스에서 자주 쓰이는 장 Zan, 블랙커런트 새싹 Bourgeon de cassis은 영국에서 잘 쓰이지 않습니다. 장은 감초 맛의 딱딱한 젤리로, 영국에서는 리커리쉬 Liquorish로 알려져 있지만 와인용어로는 좀처럼 쓰지 않는 듯합니다.

바스크, 피레네 지역을 제외한 미디 Midi 라고 불리는 프랑스 남부지역에서 온 단어인 가히그 Garrigues란 표현도 영어에선 잘 쓰지 않지요. 가히그는 지중해성 기후로 인해 고온건조한 여름철, 바짝 마른 석회성 토양에 뙤약볕에 올라오는 로즈메리, 타임, 샐비어 등의 향을 표현하는 용어입니다. 국가의 상징이 우산인, 강우량 높은 영국에서는 좀처럼 상상할 수 없는 향이겠지요.

마구간과 코끼리 똥냄새 사이.

프랑스에서 십 년 넘게 거주하며, 프랑스 전통요리를 배우고, 시장을 보고, 이곳의 식재료에 맞춰 한식을 하면서 이제야 그 많은 와인 용어들이 가리키는 향에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한동안 맡지 않으면 기억에서 지워지고 마는 향들이 적지 않습니다. 마치 나이가 들어 배운 외국어처럼, 다 커서 맡기 시작한 향들은 머릿속에서 쉽게 증발하는 것 같습니다.

입맛이 토종인 제가 아마 한국에서만 살았다면 글로 배운 와인의 향들은 그저 “다른 이들이 그러니까 그렇겠지”, 하고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말”일 뿐, 제가 실제로 느끼는 ”향”이 되기는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험이나 공적 시음기에는 프랑스나 영국 기준의 와인 용어를 사용하지만, 개인적 기록에는 저만의 한국적 표현을 넣어보곤 합니다.

프랑스나 영국사람들이 말하는 농장, 마구간, 젖은 안장 내음은 레드와인과 수제 맥주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브렛 Brett 향입니다. 대도시에서 자라고, 일류기업의 수십억 호의를 받지 못한 저에게는 아직도 낯선 향입니다. 그 대신, 저는 어렸을 적 가던 동물원의 코끼리 똥냄새가 떠오릅니다.

샴페인이나 고급 스파클링 와인에서는 효모 접촉이라는 양조방식으로 인해 빵, 브리오슈, 토스트, 비스킷 등의 향이 납니다. 그런데 프랑스나 영국에서 곧잘 말하는 빵의 향은 달지 않고, 소금간만 된 바게트 같은 빵의 향입니다. 한국 제과점의 향은 달짝지근한 브리오슈에 가깝고요. 저는 좋은샴페인 향을 맡으면 곧잘 고소한 인절미 콩고물이 생각납니다. 프랑스인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국 사람만의 토종감성이지 않을까요.

와인으로 추억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다.

몇 달 전 읽은 한 와인 책에서 마음에 쏙 드는 단어를 하나 배웠습니다. Petrichor. 바싹 마른 땅에 비가 내릴 때 나는 달큼하고 향기로운 흙내로 번역이 됩니다. 초여름 강한 햇볕에 먼지 나던 모래 운동장에 갑자기 후두두 굵은 빗방울이 쏟아져 내려, 운동장 한쪽에 던져뒀던 가방을 낚아채 친구들과 집으로 뛰어가며 맡았던 그 향. 와인에서 아홉 살의 그 향을 되찾을 수 있다니, 반갑지 않나요?

각박한 삶에 귀찮기만 하던 후각이 다른 오감을 제치고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 바로 와인을 마실 때입니다. 온갖 알 수 없는 외국어로 와인을 묘사하는 사람에게 기죽을 필요 없습니다. 몇십 년간 수련된 전문가들에게도 와인의 향을 인지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입니다. 코를 살살 달래고 와인을 술술 흔들어 열어 후각의 즐거움을 느껴보세요. 그리고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와인의 향이 우리 속에 있던 추억들을 깨워 꺼내어 오도록 마음을 놓아주세요.

초등학교 때의 연필 깎이 내음, 갈비 먹고 나오며 집어먹던 박하사탕과 계피사탕, 첫사랑과 늦은 가을비에 젖은 낙엽 위를 걷던 순간의 숲의 향기, 초겨울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체온의 온기와 함께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젖은 양모 스웨터 냄새…. 타임머신을 타듯 와인 한잔이 우리를 과거 그 어떤 날로 되돌려 놓는 마법을 경험해보세요.

“나는 아직 어떤 와인을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어.”

그러시다면, 와인을 마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눈을 감고 향에 취해보세요. 그러다 보면 당신의 아름다운 추억을 되살려주는 고마운 와인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 향이 몸속까지 아련하게 퍼지는 행복함을 느끼셨다면, 아마도 그 와인이 당신이 좋아하게 될 첫 와인이지 않을까요.

사진
Antoine Planche, 런던 시내/이과수 폭포

참조
The Science Times. 2016. https://goo.gl/UV6DAL
N.Burton & J.Flewellen. 2014. The Concise Guide to Wine & Blind Tasting. UK. Acheron
Press.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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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진

와인은 제게 삶의 위안이자 즐거움입니다. 당신에겐 무엇인가요? 7년간 남프랑스에서 레스토랑 운영, WSET Diploma, 45여개국 방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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