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여름은 스페인 사람들에게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폭염이 짙은 계절로 기억된다. 지난 1961년 기상 관측이 시작된 이래 가장 뜨거운 스페인의 여름으로 기록됐기 때문인데, 지난해 여름 평균 기온은 1961년 대비 무려 2.2도 더 높은 나날들이 지속됐었다.
평균 기온의 상승은 사실 와이너리에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다. 기온 상승은 곧 포도가 예년보다 더 빨리 농익게 된다는 의미이고, 그 경우 이전과는 다른 알코올 함량으로 최고급 와인의 색과 향이 이전과 달리 약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과 일맥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수 세기 동안 견고했던 최고급 와인 생산지인 스페인 와이너리들에는 청천벽력과 같은 악재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최근 몇 년 사이 빠르게 뜨거워지고 있는 스페인의 자연환경에 대비해 날씨 변화에 저항력 있는 포도 농작물을 개발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긴박하게 진행 중이다.
특히 스페인 동북부에 위치한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히는 유명 와인 생산지인 라 리오하(La Rioja)의 날씨와 와인과의 상관성 등을 수년간 연구해오고 있는 라구엘 에런사이 박사는 스페인 라 리오하는 지난 1950부터 2018년까지 한겨울 최저 기온일 때는 0.9도, 한여름 최고 기온일 시기에는 0.7도 이상 기온이 상승한 상태라고 집계했다.
이런 뜨거운 계절이 계속되는 동안 세계에서 세 번째로 와인을 많이 생산하는 와인 대국 스페인은 예상치 못한 날씨와의 전쟁을 감당해야 하는 처지에 처하게 된 셈이다. 특히 이 지역은 스페인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와인 생산지이자 에브라 강 양쪽으로 길이 120km, 넓이 50km에 달하는 ‘템프라니요’라는 적포도 품종이 대량 생산되는 와인 재배지가 자리해 있다. 이 일대를 중심으로 해마다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이 몰려드는 와인 축제가 열릴 정도로 그 유명세는 대단하다.
하지만 최근 이 일대에 불어 닥친 기후 위기와 이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와인 생산력 저하, 저품질의 와인 등장 등 자칫 스페인의 고급 와인을 앞으로는 더 이상 맛보기 힘들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제기된 것도 사실이다.
스페인은 이탈리아, 프랑스에 이어 세계 3위의 굴지의 와인 생산국이자 포도 수출국으로는 매년 선두 자리를 지킬 정도로 와인 산업은 그야말로 스페인의 기반 산업이라고 불려 왔다. 지난해 기준 스페인 와인 산업의 가치는 무려 50억 유로에 달할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스페인에서 와인 생산을 목적으로 수확되는 포도의 수확 시기는 지난 10년 사이 2.4일 더 빨라졌고, 와인의 알코올 함량 역시 지난 1992~2019년 동안 10년마다 1.3도씩 오르는 추세다.
특히 지구 온난화와 같은 빠른 기후 변화는 스페인 북부 지역의 와인 산업에 큰 타격을 입혔다. 북부 지역은 스페인 인구의 단 0.7%에 불과한 주민들이 거주하고는 있지만, 스페인 전체 와인 생산량의 무려 21%가 이 일대에서 생산된다. 500여 곳의 와이너리가 연간 3억 5천만 병의 스페인 고유의 향과 맛을 담은 고급 와인을 생산해내고 있고, 이들이 생산한 일부 빈티지 와인의 가격은 1병당 무려 5천 유로를 호가할 정도로 최고급이라는 평가를 들어오고 있을 정도다.
그 덕분에 스페인 북부 지역의 와인 산업은 연간 약 15억 유로의 가치로 높은 평가를 받으며, 이 지역 경제의 20%를 견인하고 있다는 호평을 받아오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최근 라 리오하 로그로뇨 외곽에 자리 잡은 포도와인과학연구소(ICVVV)에서 진행 중인 포도 덩굴 잎에서 채취한 DNA를 활용, 기후 변화에 강한 최적의 포도 품종 개발에 이목이 집중된 것은 어쩌면 매우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호세 미구엘 마르티네스 사파테르 ICVV 국장은 “스페인에서 유일한 포도 품종 개발을 목적으로 설립된 연구소이자 전 세계적으로도 포도 나무의 분자를 정밀하게 분석하는 몇 안 되는 연구소 중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100년 이상의 오래된 포도나무 덩굴에서 채취한 DNA 염기서열을 분석해 기후 변화와 질병 등에 강한 분자 서열을 식별해오고 있다.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기후 문제에 대응해 이전보다 강한 적응력을 가진 포도 DNA 성분을 구별하려는 것이 연구의 목적이다.
현재 이 연구소에 투자되는 금액만 연간 600만 유로에 달한다. 고용된 직원의 수도 100명을 넘어설 정도로 대규모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지난해부터는 수년간 연구했던 기후 변화에 강한 포도 작물을 직접 재배해 와인 생산까지 이어지는 전 과정의 실험을 실시했다. 그 결과 기후 변화에 강한 포도 DNA만 채취해 만든 와인 역시 이전과 동일한 수준의 최고급 스페인 와인으로 탄생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또 다른 연구팀은 숙성 주기가 긴 포도 품종과 기존의 일반적인 품종을 혼합하는 새로운 품종 개발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연구소에서 북쪽으로 약 60km 떨어진 지역의 와이너리인 RODA에서는 미래의 기후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라 리오하에서 가장 기온이 낮은 지역 중 하나인 힐 셀로리고 일대에 새 포도밭을 구상, 농장 개발에 착수한 상태다.
RODA 연구 기술팀 소속의 농업 엔지니어 마리아 산톨라야는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는 향후 20~30년 후에 이 일대 기후가 시시각각 어떻게 변화하든 가장 최적의 포도를 생산, 와인을 제조하는 것”이라면서 “품종을 완전히 개량해야 할 가능성이 크지만 어떤 방법과 연구 수단을 동원하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