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에도 떼루아가 있다는 사실을 아나요? 떼루아란 보통 와인 업계에서 통용되는 개념으로 알려져 있지만 맥주에도 떼루아가 있습니다. 떼루아(Terroir)란 토양, 기후, 날씨 패턴, 곤충 공격의 결과 등 지역 환경이 식물의 풍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맥주의 재료를 알면 맥주의 떼루아도 알 수 있습니다. 맥주의 정의를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엿기름가루를 물과 함께 가열하여 당화한 후 홉을 넣어 향과 쓴맛이 나게 한 뒤 발효하여 만든다’라고 나옵니다. 여기에 맥주를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재료 보리(엿기름가루), 홉, 효모(발효), 물이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재료는 독일의 맥주순수령에 의해 보호받았으며, 역사적으로도 최소한의 가치로 인정받은 필수 재료입니다. 이 모든 재료는 떼루아의 영향을 받습니다. 각각의 재료가 어떻게 떼루아의 영향을 받는지는 각각의 재료들이 어떤 마법을 부려 맥주로 변신하는 지를 이해해야 알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맥주의 양조 과정을 살펴보고 가겠습니다.
물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재료는 보리입니다. 하지만 보리는 알코올을 만드는데 필요한 당분이 없고 전분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보리에 싹을 틔우고 건조해 맥아(엿기름)를 만듭니다. 맥아는 전분을 당분으로 만드는 효소를 함유하고 있는데, 맥아를 물과 함께 끓이면 당분이 새어 나와 달콤한 맥아즙(워트, wort)이 됩니다.
이제 맥주에 향과 쓴맛, 그리고 풍미를 내기 위해 맥아즙에 홉을 넣고 조금 더 끓입니다. 끓인 맥아즙을 빠르게 식힌 후 효모를 투입하고 일정 기간 효모가 활동할 수 있는 온도에서 발효시킵니다. 그럼 효모가 활동을 하면서 당분을 먹어치우고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를 배출합니다. 이것을 일정기간 동안 숙성하여 안정화를 거친 후 마시는 것이 맥주입니다.
현대의 맥주에서 떼루아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 것은 물입니다. 물론 과거의 물은 맥주의 스타일을 만들어 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가령 기네스는 더블린 리피강의 물을 사용해 미네랄이 풍부하고 혼탁한 기네스를 만들었으며, 필스너는 체코 필젠 지방의 연수를 사용해 맑고 청량한 필스너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물의 떼루아가 맥주의 맛에 영향을 주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이제는 물의 성분을 화학적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고, 필터링 기술을 사용해 미네랄의 양을 조정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의 어느 공장에서나 동일한 품질의 기네스 스타우트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이유입니다. 맥주의 맛에 물의 떼루아가 영향을 미쳤다면, 그것은 물이 그 지역의 몰트와 홉의 재배에 영향을 미친 정도입니다.
떼루아가 효모에 영향을 준다면 그것은 에일 효모나 라거 효모가 아닌 야생 효모입니다. 파스퇴르는 ‘와인연구’라는 책을 출간하여 효모의 역할을 처음으로 증명하였습니다. 칼스버그의 에밀 크리스티안 한센은 라거 맥주 제조과정에서 효모를 순수하게 배양하는데 성공하여 효모 배양법을 무료로 제공하였습니다. 결국 현대의 맥주는 발효를 주도하는 효모를 인공적으로 배양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떼루아의 영향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떼루아가 효모에 영향을 끼친다면 배양된 효모가 아닌 자연 중에 있는 효모를 말합니다. 일명 자연 발효에 의한 와일드 비어는 효모의 떼루아가 존재합니다. 야생 효모나 박테리아로 발효를 하면 주위의 환경, 공기, 온도, 심지어 양조장의 자재 같은 것들이 맥주의 맛에 영향을 줍니다. 벨기에의 람빅이나 플랑드르 지방의 레드 에일이 그 지역을 벗어나 양조하기 힘든 이유입니다.
보리에도 떼루아가 있습니다. 와인, 커피, 홉의 떼루아만큼 주목받지 못해도 최근 보리의 떼루아에 대한 연구는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고대의 야생 보리는 지금보다 훨씬 떼루아가 있었지만, 현대의 보리는 맥주에 적합한 품종만 선별적으로 재배하여 떼루아가 맥주의 풍미에 차이를 주는 것은 훨씬 줄어들었습니다. 게다가 수확한 보리를 직접 사용하지 않고 보리에 싹을 틔워 건조하여 사용합니다. 이러한 과정으로 인해 맥주의 색깔과 풍미, 텍스쳐가 만들어집니다. 보리의 떼루아는 로스팅 과정을 통해 영향력이 감소됩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동일한 품종의 보리라도 재배되는 기후에 따라 떼루아가 있고, 맥주 소비자들이 이 차이를 인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습한 지역에서 자란 보리는 보리의 껍질이 물을 쏟은 것처럼 어두워지고 얼룩이 지는데, 맥아 과정을 거쳐도 이러한 특성은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미묘한 차이는 맥주의 색상뿐만 아니라 감각적인 차이까지 이끌어 냅니다. 일부의 브루어리는 원하는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 지역의 몰트를 사용하여 맥주의 풍미에 변화를 주곤 합니다. 이들은 전통적인 몰트뿐만 아니라 떼루아가 확실한 몰트를 얻기 위해 크래프트 몰트스터(몰트를 제조하는 곳)를 찾아 헤맵니다.
떼루아가 맥주의 풍미에 가장 영향을 끼치는 재료는 홉입니다. 홉은 맥주에서 맥주의 쓴맛, 아로마, 풍미, 항균제, 안정제 등 거의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치는 식물입니다. 홉은 대마과의 사촌 격인 삼과의 덩굴식물로 주로 암꽃을 사용합니다. 홉의 화합물 중 알파산은 맥주에 쓴맛을 제공하고, 홉의 에센스 오일은 맥주에 아로마와 풍미를 제공합니다. 일명 우리가 ‘호피’하다라고 부르는 풍미입니다. 홉이 이러한 화합물을 생산하는 이유는 박테리아나 곰팡이 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 기제라고 추측됩니다.
홉은 습한 온대 기후에서 잘 자라며 주로 북위 48도 근처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홉은 토양을 매우 선호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떼루아가 홉이 자라는 환경의 차이를 만들고, 환경의 차이에 따른 홉의 성장은 홉의 풍미에 영향을 미칩니다. 홉 품종은 이렇게 지역에 따라 다른 다양한 캐릭터를 가지게 되는 것이며, 결국 우리가 맥주를 즐긴다는 것은 홉 품종에 따른 차이를 즐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유럽을 대표하는 체코의 사츠(Saaz) 홉은 은은한 풀향과 쌉싸름한 쓴맛이 납니다. 필스너 우르켈의 맛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의 홉은 대체로 품질 개량을 통해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여 시트러스 과일이나 열대 과일의 풍미를 가진 것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홉을 그대로 키운다고 해도 한국의 토양과 기후는 다르게 때문에 그 풍미 또한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저는 한국에서 키운 캐스케이드 홉(꽃향과 시트러스 과일 향이 나는 미국의 홉)으로 양조한 맥주를 마셔 본 적이 있는데 미국보다 오히려 유럽의 느낌이 났습니다.
종합해 보자면 맥주에서 떼루아의 영향을 받는 재료는 홉, 보리, 야생 효모입니다. 최근의 잇따른 연구 결과는 지구의 온도와 강수량 변화가 식물이나 미생물의 생화학에 영향을 끼쳐 맥주의 맛이 변할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러한 기후 변화는 맥주의 가격도 상승시킬 것이라고 합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 기후변화가 맥주에 어떤 영향을 주는 지 설명해 보겠습니다.
1. 따뜻한 기온은 야생 효모의 활동을 막아 람빅의 맛과 생산량을 변화시킵니다.
앞서 맥주의 양조 과정에서 뜨거운 맥아즙을 빠르기 식히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람빅은 맥아즙을 쿨쉽(coolship)이라 부르는 넓고 평평하고 얇은 오픈 발효조에서 급격히 냉각시킵니다. 자연 상태에 노출된 쿨쉽이라는 운동장에서 동네에서 ‘축구’ 좀 하던 야생 효모들과 기타 미생물들이 그들의 떼루아를 있는 힘껏 발휘해 람빅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빠르게 일어나지 않으면 원치 않는 ‘훌리건’ 미생물들이 난동을 피어 맥주를 오염시킵니다.
일반적으로 쿨쉽에 맥아즙을 식히는 작업은 밤 시간대 영하 8도와 영상 8도 사이의 온도에서 진행됩니다.
람빅을 전문으로 하는 칸띠용(cantillon)의 전통적인 양조 시즌은 10월부터 4월까지입니다. 하지만 따뜻한 기온은 양조 시즌을 점점 줄어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20세기 초 일 년 중 양조일수가 165일 정도였지만 그 수가 점점 줄어들어 최근에는 140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겨울이 짧고 여름이 길어짐에 따라 맥주의 생산량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2015년에는 과도한 기온으로 많은 맥주를 버려야 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람빅은 나무 배럴에 넣어서 나무에 서식하는 미생물에 노출해야 하는데 그 적정 온도가 섭씨 25도 이하입니다. 그 이상의 온도에서 원치 않는 박테리아가 맥주를 상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의 절대적인 이유는 지구의 온도 변화입니다. 아직까지 자연 발효 맥주의 양조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벨기에 북부의 플랑드르입니다. 플랑드르 환경부의 보고서에 의하면 지난 180년간 이 지역에서 급격한 기온 상승이 있었다고 합니다. 벨기에의 연평균 기온은 19세기 초반부터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1830년의 평균 기온보다 현재는 섭씨 2.3도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강우량은 10년에 평균 5mm 증가했으며, 겨울에 강우량이 더 많고, 여름에는 적었다는 사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가장 따뜻한 해가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모두 벨기에의 기후가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앞으로 전통적인 방식의 람빅은 점점 보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전통적인 양조 방법을 벗어나 새로운 양조 방법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쿨쉽으로 맥주를 시키지 않고 인공적으로 식힌다면 야생 효모 떼루아의 도움도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맥주의 맛도 달라질 것이고 맥주의 생산량 또한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
2. 따뜻한 밤은 홉 화합물의 떼루아에 영향을 미칩니다.
지구의 온도 변화는 홉, 보리, 밀 등 식물의 떼루아에 영향을 미치는데, 이렇게 재료 자체의 풍미에 미치는 영향은 결국 맥주의 맛도 바꿉니다. 온도의 변화는 얼마만큼 변하는지 뿐만 아니라 언제 변하는지도 풍미에 영향을 끼친다고 합니다. 따뜻한 밤은 홉처럼 열에 민감한 꽃 조직이 발달하는 식물에 큰 손상을 줄 수 있습니다. 식물은 자신만의 시계를 사용하여 낮과 밤을 다르게 활동합니다. 재깍재깍 돌아가는 시계가 없는 식물은 하루의 온도 차이를 이용하여 시계의 역할을 대신합니다. 이러한 내부 생체 시계가 식물의 바이오 리듬을 일정하게 유지시켜 주는 것입니다.
식물은 낮에는 해충 등의 공격자와 싸우고 밤에는 경계를 해제하여 자원을 절약합니다. 마치 메이저리그 류현진 선수가 강타자 앞에서는 있는 힘을 다해 던지다가, 하위타선에서는 힘을 빼고 던치는 것과 같습니다. 지구의 온도는 전반적으로 올라갔고 밤이 더욱 따뜻해져 낮과 밤의 차이가 줄어들었습니다. 밤의 온도가 높아지면서 해충의 활동 시간이 늘어나고 식물의 질병이 늘어났습니다. 낮에 힘을 쓰던 곰팡이나 박테리아 성 해충이 식물을 공격할 인저리 타임(정규 경기 시간이 종료된 이후에 심판의 재량으로 부여하는 추가 시간)을 얻은 것입니다.
밤이 따뜻해져 낮과 밤의 차이가 줄어든 것은 마치 해외로 나간 여행자처럼 시간의 감각을 잃어버려 신체의 감각이 둔해지는 현상과도 같습니다. 시차 적응에 실패한 식물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홉의 스트레스는 결국 홉 화합물의 변화와 함량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변화는 홉의 구성 요소인 알파산과 에센스 오일의 변화로 이어져 맥주의 쓴맛과 풍미, 홉의 항균성에 영향을 끼칩니다. 결국 홉은 기후 변화에 취약한 식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 체코 사츠 지방의 홉 재배 사례 보고서에 의하면, 1891년부터 2016년까지 홉 재배 지역의 평균 기온은 2도 이상 올랐으며, 홉의 개화 시기는 한 달 정도 빨라졌다고 합니다. 홉 생산량은 농경 기술의 발달로 과거보다 늘어났지만, 홉의 평균 알파산 함량은 1954년 5%대에서 2006년에는 2%대로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3. 기후 변화로 보리의 수확량이 떨어져 맥주의 가격이 올라갑니다.
가뭄과 극심한 기온 변화로 보리의 수확량이 떨어져 맥주의 가격이 두 배가 될 거라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보리는 일반적으로 다른 작물에 비해 수월하게 재배되는 걸로 인식되지만, 맥주용으로 재배되는 보리는 특정한 품질 변수를 충족해야 맥주의 풍미를 더해주기 때문에 너무 뜨겁거나 물이 부족할 경우 맥아를 충분히 추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연구팀은 두 가지 시나리오를 상정하여 보리 수확량을 예측해봤습니다. 낙관전인 기후변화 시나리오는 가뭄과 폭염이 일 년에 약 4% 발생하는 경우이고, 최악의 경우는 일 년에 31% 발생하는 경우입니다. 낙관적인 시나리오에서는 전 세계 수확량이 3% 감소하였고, 최악의 시나리오에서는 17% 감소하였습니다. 그 결과 가장 심각한 기후 변화 동안 맥주 가격이 2배가 되고 전 세계 맥주 소비량이 16%(약 290억 리터) 정도 감소할 것이라고 예측하였습니다. 이는 미국의 연간 총 맥주 소비량과 맘먹는 규모입니다. 낙관적인 시나리오에도 맥주 소비는 4% 감소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가뭄이나 열에 강한 보리 품종이 개발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기후변화에 대한 위험을 줄이는 것이라고 논문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맥주 애호가로서 기후변화가 우리의 건강한 음주 생활을 바꾸는 현실이 애석합니다. 나 자신이 앞으로 지속할 수 있는 음주 생활을 하려면 기후 변화에 대한 위험을 인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오늘은 지구를 위해 건배를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