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가면 첫날 혹은 둘째 날쯤 항상 여행지의 바에 간다. 국내든 해외든 마찬가지다. 내가 바텐더에 술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바는 모두에게 좋은 곳이다. 특히나 여행지의 바에서는 얻을 것이 아주 많다. 바텐더는 현지의 최신 정보를 잘 알고 있다. 적어도 당신의 가방에 있는, 4년 전에 출판된 ‘최신판’ 여행 가이드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바에 앉아 있는 손님들도 마찬가지다. 매일 보는 옆자리 단골손님에 작은 권태를 느끼고 있던 그들은 외지인인 당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을 것이다. 다른 여행객을 만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비-영어권 국가에서 바의 스태프들이나 손님들은 상대적으로 영어에 익숙할 확률이 높다(뭐, 내가 일하는 바도 마찬가지고, 한국도 마찬가지다). 나는 바르셀로나의 어느 바에서 보스턴의 공무원 술꾼을 만나, 보스턴의 맥주 역사에 대한 일장 연설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보스턴 라거라고 팔아먹는 사무엘 아담스는 더 이상 진정한 보스턴의 맥주라고 할 수 없어. 공장도 자본도 다 보스턴을 떠났는데 무슨 보스턴 맥주야. 하푼이야말로 보스턴의 맥주지’라고 말했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포르투에서 상당히 훌륭한 바텐더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의 취미는 독서였다. 근처에 놀러 갈만한 곳을 추천해달라고 하자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난 여기 너무 오래 살아서 다 그저 그래. 내가 좋아하는 곳이라면 음, 도서관 정도?’ 물론 도서관은 좋은 곳이지만 굳이 여행지에서 도서관을 구경하고 싶지는 않다. 긴자의 어느 유명한 바에서는 옆자리에 앉은 만취한 누님의 습격을 받았다. 그녀는 내게 다짜고짜 ‘한국 여자와 일본 여자 중에 누가 더 예쁘냐?’고 묻고, 홀로 그 주제를 이어나갔다. 앞에는 영어에 익숙하지 못한 바텐더가 있고, 다른 옆에는 아무리 봐도 야쿠자 아니면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전속 배우 외의 직업 말고 다른 일을 하기 힘들어 보이는 외모를 한 아저씨가 앉아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럼에도 바는 재미있는 곳이다. 대체로. 좋은 술이 있고, 좋은 사람들이 있고. 아무튼.
여름휴가로 운남에 다녀왔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삼국지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비교적 친숙하겠지만(남만의 야만왕, 맹획의 <남만>이 바로 운남이다),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별로 친숙하지 않은 도시일 것이다. 나도 사실 잘 모른다. 그저 오랜 친구이자 채권자가 홍토지에 매혹되었고, 나를 운남 여행의 짐꾼으로 점찍었다. 운남은 놀라운 곳이었다. 자연은 어마어마했다. 남한 면적의 네 배 정도 되는 땅에 거대한 산과 호수가 이어진다. 호숫가의 지명 옆에 ‘바다 해’자가 들어가는 곳들이 꽤 있을 정도로. 중국, 시골, 산골짜기에서 오는 물가도 행복했다. 동네의 평범한 백반집에서 밥이 한 끼에 천 원 정도 한다. 노점에서 파는 과일이 한 바구니에 삼사백 원 정도. 음식은 맛있다. 딱히 물자가 풍부한 동네가 아니기에 어떤 ‘미학’을 가지고 음식을 만든다기보다는 ‘풍족하지 않은 재료에 산의 향신료/허브를 잔뜩 부어 만든다’는 느낌의 음식이었는데, 뭔가 그 철학이 한국적이고 방향성도 꽤나 한국적인 느낌이었다. 차이라면, 모든 음식에서 신 맛이 강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레몬이나 라임의 상큼한 신맛이 아니라, 과숙된 복숭아나 자두에서 나는 어딘가 축축하고 음험한 신맛이 난다. 쌀국수에서 찜닭에 이르기까지, 이 동네의 유명한 음식은 조금씩 이런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운남성의 성도인 쿤밍/곤명 시 주변의 대자연을 구경하며 나는 ‘어디 갈 만한 바가 없나’를 검색했다. 가방 속에 들어 있는, 4년 전에 출판된 여행 책자는 틀린 내용 투성이고(그나마 그게 가장 ‘최신판’ 중국 서남부 여행 가이드였다), 인터넷에도 별 정보가 없다. 아직 ‘중국인을 위한’ 관광지 정도이기에, 한글 자료도 영문 자료도 별로 없는 편이다(여행 일주일동안 나는 한국인을 딱 한번 보았다. 보통의 여행지에 가면 하루 한번 꼴로 한국인을 보게 되는데). 영어가 가능하다는 호텔의 스태프가 할 줄 아는 영어는 ‘아임 쏘리’가 전부였다. 다른 때와 달리 조금의 불안감이 있기는 했다. 어차피 자연을 보러 온 것인데, 바텐더나 지역의 술꾼들이 주변의 관광지에 관심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높은 확률로 그들은 그냥 자기가 아는 좋은 뒷산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마치 포르투의 바텐더가 도서관을 여행지로 꼽아준 것처럼. 둘째로, 이 동네는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 바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거라는 기대를 하긴 힘들었다.
그래도 기어코 바를 찾아 가게 되었다. 맥주가 문제였다. 이 동네는 어느 가게를 가던 지역 맥주 세 종류만 판다. 문제라면 세 맥주가 불평등하게 각자의 방식으로 맛이 없다는 거였다(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운남 여행기를 매체에 기고한 어느 기자도 이 동네 맥주를 욕했다). 더 큰 문제는 이 동네는 이 맥주를 노지로 마신다는 것이다. 노지, 제주 스타일, 그러니까 상온으로 마신다는 거다. 그리고 운남은 꽤 더운 동네다. 삼국지를 보면 병사들이 막 더워서 쓰러지고 전염병이 돌고 이런 동네다. 이천 년쯤 지났다고 해서 지역의 날씨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바에 가야 한다. 좋은 술을 마시고 싶다. 칵테일에는 얼음을 넣어 주겠지.
어렵게 찾아 간 바의 벽을 두르고 있는 수조에서 상어가 헤엄치고 있었다. 과연 대륙의 스케일이다. 가격은 서울 기준으로 조금 싼 편, 그러니까 한 잔에 만오천원 전후였다. 밥이 한끼에 천원인 동네니까 상당히 비싼 축에 들 것이다. 예상대로, 그리고 아쉽게도 바텐더는 영어를 전혀 못했다. 하지만 메뉴판이 상당히 친절했다. 시그내쳐 칵테일을 두 잔 시켰다. 상당히 맛있었다. 또 두 잔을 시켰다. 또 맛있었다.
문제는 다만 맛있다는 게 아니었다. 네 잔의 시그내처 칵테일에 굉장히 특이한 ‘흐름’이 존재했는다. 내가 세계의 칵테일을 다 꿰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직업상 조금 더 잘 아는 편이다. 칵테일에는 지역적인, 시대적인 흐름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에는 어떤 맥락이 존재한다. 메인 바텐더로 일하기 위해 10년은 수련해야 했다는 일본의 칵테일과, 패밀리 레스토랑과 플레어 바를 통해 칵테일 문화가 확장된 한국의 칵테일은 다르다. 금주법 시대에 ‘믿을 수 없는 품질의 밀주를 편하게 마시기 위한 칵테일’과, 황금 시대의 ‘편안한 파티를 위한 칵테일’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바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이런 기대를 했다. ‘이 동네는 과일이 싸고, 향신료가 많고, 보이차로 유명한 동네니까, 이 동네를 대표하는 칵테일은 이런 재료를 멋지게 활용하겠지. 중국 술을 쓸 지도 모르겠고. 그런 맥락적 흐름이 존재하겠지.’
아니었다. 그들은 내가 쓰는 재료와, 내가 아는 바텐더들이 쓰는 재료와 같은 재료를 썼다. 한 칵테일이 유독 맛있어서 나는 재료를 물어보았다. 기본적으로 신맛이 강했다. 시트러스의 가벼운 상큼한 신맛이 아니라, 선이 굉장히 굵은 신맛이었다. 그리고 쓴맛이 나기 직전에 딱 멈춘 향기로운, 알 수 없는 식물적인 뉘앙스가 신맛을 보완해준다. 나는 자두와 차를 사용했으리라 생각했다. 아니었다. 바텐더는 술에 들어간 재료를 모두 보여주었다. 보드카, 라임/크랜베리 쥬스, 사과 리큐르, 서양배 리큐르(이것의 적절한 활용이 식물적인 맛을 낸 듯 하다), 그레나딘 시럽 등 한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이 전부였다. 그들은 이런 재료로 ‘신맛을 중심으로 하는 멋진 밸런스’의 칵테일을 만들고, 우리는 이런 재료로 다른 맛을 중심으로 하는 멋진 밸런스의 칵테일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나는 한국에서 저런 스타일의 칵테일을 접해 본 적이 없다. 왜일까.
현지에서, 혹은 국내의 소위 ‘고급 레스토랑’에서 제대로 된 외국 음식을 처음 먹어봤을 때, 내가 자주 느끼는 감정은 ‘맛있는데 신맛이 강하네. 특이하군’이었다. 왜일까. 아마도 서울에서 태어나 삼십 년 넘게 서울에 살며 신 맛에 익숙해질 ‘경험’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한국 요리에서 소위 ‘전통 요리’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 신 맛이 강한 음식은 별로 없다. 초무침? 초무침은 대체로 달고 짜지, 시지 않다. 신김치? 맵고 시다. 식초 기반의 향신료? 시큼한 맛을 내기 위해서 사용되기보다는 주로 원 재료의 비린 맛을 누르기 위해 사용된다. ‘신맛’이 긍정적인 차원에서 전면에 오는 음식이라고는 전통 발효주 정도가 아닐까 한다. 음식의 수용자에서 생산자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신 맛에 익숙하지 않다. 그리고 상상력은 익숙한 일상에서 나온다.
물론 신맛이 ‘우리가 추구해야 되는 위대한 맛’은 아니다. 그것은 그냥 맛의 일부일 뿐이다. 하지만 맛의 일부가 많이 누락된 맛의 체계는 조금 아쉬운 일일 것이다. 물론 우리가 모든 맛을 궁극으로 추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채로운 맛은 인생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프리미엄’ 칭호를 달고 나오는 최근의 발효주들의 공통된 경향 중 하나는 ‘멋진 신맛’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장에서 성공을 해나가고 있다. 나는 이것이 굉장히 고무적인 징조라고 생각한다. 혹은 그저 ‘사람들이 신맛에 조금 더 익숙해져 간다’는 사실의 징후일 뿐인지도 모른다. 어느 경우든 좋은 일이다. 우리는 조금 더 다채로운 맛을 즐길 수 있게 될 테니까. 그러한 익숙함을 통해 더 많은 맛을 상상하고 즐길 수 있을 테니까. 바텐더들이 손끝으로 툭 누르면 뭉개질 정도의 자두 맛의 긍정적인 부분을 살린 칵테일을 부담 없이 손님에게 추천하고, 술꾼들이 이런 술을 여러 곳에서 즐길 수 있는 날도 언젠가는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