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팀을 이루어 협업할 때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는 사람과 홀로 있어야 본연의 개성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사람. 와인 양조용 포도 역시 다른 품종과 블렌딩했을 때 단점이 보완되고 장점은 강조되는 것, 그리고 100%여야 더욱 매력적인 것으로 나뉜다. 전자가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 시라와 그르나슈라면 후자는 피노 누아다.
기르기 까다로워 비탄의 포도(heartbreak grape)라는 별명까지 지녔으니, 그 점도 독야청청 예술가 타입이라는 이미지에 잘 들어맞는다. 자라는 환경에 따라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 역시 이 새침한 품종의 매력. 오늘은 피노 누아의 고향 부르고뉴에서 출발해 미 서부와 뉴질랜드까지 대표 산지를 돌며 각자의 취향에 딱 맞는 피노 누아를 골라 보자.
섬세하고 복잡한 매력의 포도
껍질이 얇은 피노 누아는 비교적 서늘한 기후에서 잘 자란다. 그래서 산도가 높은 편이고, 다른 레드 품종에 비해 타닌이 적으며 와인의 색도 엷다. 주로 언급되는 아로마는 체리, 딸기, 라즈베리, 자두 등의 붉은 과실과 버섯. 여기까지만 들으면 다소 비실비실한 이미지가 연상되기도 한다.
끈적하고 파워풀한 와인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피노 누아가 잔에 서브되는 순간부터 내 타입이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상기했듯 피노 누아에도 다양한 스타일이 있고, 그 섬세한 매력에 한 번 빠지면 비실비실한 건 바로 우리의 통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테니까.
피노 누아의 고향
기원전 500년 전부터 골 족(Gauls)이 애음했다는 피노 누아에 관한 첫 번째 기록은 13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시조인 필립 르 아르디 공작은 소문난 피노 누아 애호가였다. 반면 오늘날 보졸레 누보를 만드는 품종으로 잘 알려진 가메는 유달리 미워했는데, ‘절대 용납할 수 없고 아주 불쾌하다’고 표현할 정도였다고. 키우기도 편하고 어릴 때부터 쉽게 마실 수 있어 잘 팔린다는 이유로 농부들이 자꾸 가메를 심자, 급기야는 가메를 모조리 뽑아버리고 피노 누아를 심으라고 명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14세기 말 프랑스 지역에서 가장 힘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던 필립 공을 등에 업고 피노 누아는 그렇게 명실상부한 부르고뉴의 대표 품종으로 자리 잡는다.
프랑스의 북동쪽에 위치한 부르고뉴는 기후가 서늘하고 배수가 잘되는 석회질 토양을 갖춰 섬세한 피노 누아가 자라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부르고뉴의 레드는 모두 100% 피노 누아로만 만들어지며, 버섯, 젖은 잎 등의 풍미와 높은 산미가 특징적이다. 숙성하기에 따라 가죽이나 게임(game)의 아로마가 느껴지기도 하고 내추럴 이스트가 더해 주는 얼씨한 느낌도 있다.
부르고뉴 밖에서는 피노 누아가 다른 품종과 블렌딩 되기도 한다. 본연의 붉은빛을 벗고 우아한 기포를 자랑하는 스파클링 와인으로 재탄생하는 것. 물론 피노 누아만으로 스파클링을 빚기도 하는데, 샹파뉴 그리고 부르고뉴를 비롯해 크레망(샴페인과 같은 방식으로 만드는 샹파뉴 외 지역의 스파클링 와인)을 생산하는 여러 지역에서는 ‘블랑 드 누아(Blanc de Noir)’의 ‘누아(Noir: 검은색)’를 주로 피노 누아에 맡기고 있다.
태평양 바닷바람이 키운 피노 누아
이제 북대서양을 건넌 뒤 북미 대륙을 횡단해 미 서부의 캘리포니아로 가보자. 부르고뉴와 명백한 스타일의 차이를 보여주는 이 지역의 피노 누아는 ‘캘리 피노’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인기가 좋다. 서늘한 곳에서 잘 자란다더니 어떻게 캘리포니아 피노 누아가 유명할 수 있냐고? 태평양에서 불어온 바닷바람이 태양의 열기를 식혀주는 남부 나파밸리와 소노마 카운티, 센트럴 코스트에서라면 가능하다. 아무리 그래도 연중 기온이 부르고뉴보다는 높으므로, 보다 과실향이 진하고 산도가 낮으며 알코올 도수가 높은 와인이 주로 생산된다. 오크 사용에 적극적인 생산자가 많아 바닐라, 올스파이스 등의 향신료 뉘앙스가 잘 느껴진다는 것 역시 캘리 피노의 특징이다.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 볼까? 피노 누아에 관해서라면 오리건도 캘리포니아 못지않은 명성을 지니고 있다. 다만 그 스타일은 확연히 다른데, 산도가 높고 얼씨한 캐릭터가 돋보이니 따지자면 부르고뉴 스타일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어떻게 바로 아래 있는 캘리포니아보다 멀고 먼 부르고뉴와 더 비슷할 수 있나 의아하겠지만 두 지역은 위도가 같고, 일교차가 크며 아침 안개가 자주 발생하는 점, 바닷속 퇴적층이 토양에 포함된 점 등 기후와 토양의 특성도 유사하다. 매년 7월 말에는 ‘인터내셔널 피노 누아 셀러브레이션’이라는 대규모 행사를 열 만큼 진지하고 적극적으로 피노 누아를 생산하는 지역이니 눈여겨 봐두자.
골라 마시는 재미, 뉴질랜드
이번엔 남반구 차례다. ‘뉴질랜드’ 하면 소비뇽 블랑부터 떠올리는 이들이 많겠지만, 피노 누아도 떠오르는 뉴질랜드의 인기 품종이다. 뉴질랜드에서 피노 누아가 처음 심어진 곳은 19세기 북섬의 혹스 베이(Hawkes Bay). 그러나 뉴질랜드에서 피노 누아가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이며, 현재 뉴질랜드의 유명 피노 누아 산지는 주로 남섬에 위치(센트럴 오타고, 말보로)하거나 북섬일지라도 혹스 베이보다 남쪽에 있다(와이라라파). 남쪽으로 갈수록 서늘해지는 남반구의 기후와 피노 누아의 품종적 특성이 이러한 분포를 만들어낸 것이다.
남섬에서도 남쪽에 위치한 센트럴 오타고는 만년설이 있을 만큼 추운데, 대신 일조량이 풍부해 복합미와 밸런스를 갖춘 와인을 탄생시킨다. 뉴질랜드에서 가장 잘 알려진 와인 산지일 말보로에서는 체리 아로마가 두드러지며 마시기 편하고 다양한 음식과 매치가 가능한 엔트리 레벨의 피노 누아가, 북섬의 와이라라파에서는 검은 과실, 초콜릿 등의 보다 리치한 풍미를 뽐내는 피노 누아가 생산된다. 이처럼 산지에 따라 그 개성이 다양하고 부르고뉴에 비하면 가격도 사랑스러우니, 뉴질랜드 피노 누아를 지역별로 모아 테이스팅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참, 미국과 뉴질랜드에서는 한 품종이 각각 75%, 85% 이상 블렌딩 되면 그 품종의 이름을 전면에 내걸 수 있다. 무조건 피노 누아 100%인 부르고뉴와 다른 점이니, 꼭 순수한 피노 누아만을 맛보고 싶다면 참고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