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의 시즌이 왔다.
와인 애호가라면 머릿속에 당장 “샤블리”라는 파블로프의 개 반응이 나올 것 같다. 내 기억으로 아주 오래전 압구정의 모 한식당에서 굴파티를 해마다 열었던 기억이 난다. 얼마나 굴을 많이 준비했던지 이틀 정도 연달아 석화를 통영에서 공수하면 파티 아침부터 담당자들은 주방에서 하루종일 굴을 깠다. 파티가 시작되면 굴 랠리가 시작된다. 테이블마다 그득그득 석화가 담기고 사람들은 옆사람 볼 새도 없이 굴을 먹는다. 껍질이 워낙 많이 나오기에 중앙에 커다란 굴껍질 회수 통을 만들 지경이었다. 기억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최대로 많이 먹은 이들은 약 100피스 이상을 먹었다고 했다. 증언에 따르면 “1년 먹을 굴을 오늘 다 먹었어요.”라든지 “아침까지 굴 냄새가 목구멍에서 올라오더군요”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에 와인은 아주 차갑게 칠링된 화이트가 주를 이루었는데, 생굴이 계속 나왔기 때문이다. 차갑게 칠링이 된 굴은 쉴새없이 입 안으로 들어가고, 그 뒤는 와인이 깨끗하게 정돈하였다. 그래서 나는 굴을 매우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지금껏 가져 왔다.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면 편하다던가, 문득 생각해보니 “내가 정말로 굴을 좋아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말이 떠올랐다. 지나온 여러 면면을 반추하여 살펴보면, 나는 굴파티에서도 굴을 많이 먹지 않았다. 석화가 먼저 나와도 굴껍질들이 행여나 들어 있을까 조심조심 먹었으며, 레몬즙이나 식초, 초고추장에 버무려 먹곤 했었다. “내가 굴의 참맛을 알고 먹었을까”하는 궁금증과 함께 “왜 굴은 레몬즙을 뿌려서 먹어야 할까”하는 의문도 들었다.
좀 더 깊이 생각하니 “굴은 향이 상당히 강한 음식”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의외로 굴은 향이 강하다. 얼마전 이를 실험하기 위해서 보통 화이트와인 한 잔에 석화 하나를 아무런 첨가 없이 입에 넣었다. 그리고 와인을 함께 입 안에 넣고 마셨다. 당연히 둘은 좋은 조화를 보여주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잔에 코를 대는 순간 강인한 굴의 향이 잔을 가득 채웠다. 신선한 굴이었기에 바다내음 가득한 느낌이 잔을 가득 채웠지만 왠지 알게 모르게 와인의 아로마는 완벽하게 지배를 당하여서 제 느낌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잔에 와인을 다시 채우고, 굴에는 레몬즙을 뿌려서 신 맛을 통제한 뒤 다시 실험해 보았다. 훨씬 나은 조합이 나면서 잔 속에서도 굴의 느낌이 상대적으로 적게 드러났다.
그렇지만 “왜 굴의 향을 식조로 억눌러가며” 먹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구심, 그리고 레드와인과는 맞을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은 게속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이런 궁금증에 화답이라도 하듯 얼마전 홍대앞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통영굴로 계절 코스 메뉴를 만들었다 하여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이탈리안 셰프가 온지 1년 남짓만에 상당히 안정되면서도 이탈리안 스타일로 요리가 나오는 레스토랑이다.
한국인 입맛에는 살짝 짜게 느껴지는 요인이 간혹 있을 수 있으나, 내 입맛에는 이 것이 오히려 제대로 된 이탈리안 스타일이고, 와인과는 환상적인 궁합을 보여주었다 생각한다. 그렇다면 요리 하나하나마다 와인 매칭에 대해서 생각 해 보자.
나폴리 스타일의 굴 피제타 – 피제타는 피자를 작게 만든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토마토소스와 치즈 위에 생굴이 다져져 올라가 있다. 다져진 굴은 바다내음 보다는 좀 더 뭉근한 육질의 느낌이 많이 등장한다. 약한 온도의 물에서 수비드로 살짝 데쳤다고 하는데 이 경우에는 바다 내음이 없기 때문에 좀 더 가벼운 화이트 와인과 맞을 수 있다. 오스트리아 그뤼너 벨트리너나 아르헨티나의 토론테스와 같이 화사한 아로마가 있는 와인들이 잘 어울릴 것 같다.
생굴과 레몬– 생굴+레몬+딜 이 조합에 샤블리는 화룡점정이다. 샤블리는 드라이하면서도 산도가 높은 것일수록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프리미에 크뤼나 그랑크뤼 샤블리를 생굴에 조합하고자 한다면 나는 말리고 싶다. 국내 수입된 샤블리라면 기본 품질들은 다 하므로, 가급적 최근 빈티지의 샤블리를 구해서 같이 즐겨본다면 좋을 것 같다.
말린 토마토, 베이컨의 매콤 소스와 따뜻한 굴 – 고정관념을 벗어나는 굴 요리다. 따뜻하게 만들어진 굴 요리는 풀보디한 느낌을 많이 전해준다. 뭉근한 굴국밥은 오히려 어지간한 곰탕보다 더 진득한 맛을 선사하는 것처럼, 탱탱한 굴이 주는 뭉근함과 은은함은 약간의 짭쪼름한 베이컨의 터치와 함께 재미있는 조합을 보여준다. 이 때 부터는 오히려 레드가 더 맞다. 느낌으로는 가벼운 미디엄 보디의 키안티가 제격이겠지만, 환상적 궁합을 보려면, 물론 돈 걱정이 없다면 클래식 스타일의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나 로쏘 디 몬탈치노가 제격일 것 같다.
굴 크림스프 – 셰프는 클램 차우더 형태를 생각해보았다고 한다. 크래커나 빵을 함께 찍어먹어도 좋을 음식이다. 추운 날씨에 이러한 수프 한 사발 먹으면 속이 든든할 것이다. 해장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 경우에는 와인과 함께 마셔보는 것도 좋지만, 와인을 스프에 살짝 섞어서 맛을 보아도 별미를 전해준다. 특히 이렇게 굴이 섞인 경우라면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오크 터치가 살짝 들어간 캘리포니아 샤르도네가 좋은 궁합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약간의 버터 토스트 느낌이 식감과 질감을 모두 다 잘 살려줄 것 같다.
굴, 마늘, 홍고추, 오일 스파게티– 섬세함과 힘과 짭조름함과 굴의 바다내음이 모두 다 잘 살아있다. 특히 생면파스타라서 더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스파게티 면에 굴의 바다내음이 잘 섞여 있어서 훌륭한 조합을 보여주었다. 약간의 짭쪼름함 덕분에 여기에는 피노 같은 섬세한 레드 와인이 잘 어울릴 것 같다. 좀 더 화사한 느낌이 많이 드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겠는데, 이 경우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최근 많이 등장하는 부르고뉴 스타일의 피노 누아르를 생각해볼 수 있다. 강력하게 추천하는 포도원은 도멘 드 라 코트(Domaine de la Cote)의 피노 누아르라면 기막힌 조합이 나리라 생각한다.
딜 소스와 굴 – 고기와 함께 먹을 수 있게 준비가 되었는데 딜 자체가 특유의 풍미가 있다. 이런 경우는 최상의 조합이 프리미에 크뤼 이상의 샤블리거나, 혹은 이탈리아 후리울리 지역의 후리울라노 품종 화이트도 좋은 조합을 보여주겠지만, 잘 익은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나 피에몬테 지역의 로에로 지역 네비올로도 멋진 궁합을 보여줄 것 같다. 국내 소량 수입되고 있는 마테오 코레지아(Matteo Correggia)의 네비올로(Nebbiolo) 품종 와인이나 혹은 바르베라(Barbera)도 약간 거칠겠지만 좋은 조합을 보여줄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쓰고 나니, 굴을 매칭하는 것도 어지간히 쉬운 조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굴의 바다 내음을 얼마만큼 살려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와인과 매칭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단순히 굴-샤블리라는 공식 이상의 보다 어려운 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 했으니, 오늘 저녁에는 어디 굴 얹혀진 파스타가 있나 없나 찾아보아야겠다. 행여 레몬즙 얹어 먹을 석화라도 좀 찾아보아야 겠다. 내가 굴을 진심으로 좋아하는지 아닌지 확인하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