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걷는 듯한 여름의 무더위가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습니다. 한낮의 더위는 조금 힘들지언정, 무거운 여름 밤공기를 헤치고 목으로 넘기는 한 모금은 짜릿하기 마련입니다. 마시자매거진 여러분들이 떠올리는 이 한 모금은 어떤 술인가요? 와인이나 맥주를 떠올리셨다면, 오늘은 방향을 조금 더 틀어보겠습니다.
목을 시원하게 긁는 듯한 산미를 가진 술, ‘람빅 비어’가 바로 오늘의 한 모금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하셨던 술이 아니라는 이유로 실망하시면 안 됩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람빅 비어는 우리가 사랑해마지않는 포도도 품어내는 대범한 맥주니까요.
벨기에의 고집이 담긴 술, 람빅
보통의 맥주는 원하는 맛을 내기 위해 완벽하게 배양된 효모를 사용하지만, 람빅은 조금 다릅니다. 대기 중에서 떠돌아다니는 자연 그 자체 상태의 효모를 이용해 발효 과정을 거치죠. 자연 발효인 만큼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산패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큰 노력을 쏟아야 하고, 무려 3년이라는 기간에 걸쳐 배럴에서 숙성된 후 완성됩니다. 이렇게 완성된 람빅은 요즈음의 내추럴 와인에서도 맡을 수 있는 특유의 쿰쿰한 발효취를 느낄 수 있으며, 엄청난 산미가 그 특징입니다.
이처럼 에일이나 라거 같은 여타 다른 맥주들과 구분되는 여러 특성으로 인해 ‘람빅’이라는 이름은 브뤼셀 지방의 고유한 것으로 인식되어왔습니다. 실제로 1839년에는 ‘람빅’이라는 이름을 브뤼셀 인근 지역에서 양조한 맥주에만 붙일 수 있다는 법이 제정되었고, 1860년까지 이 법은 브뤼셀로부터 2마일 떨어진 주변 지역까지 ‘람빅’ 양조장으로 인정해주는 것으로 변경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당시만 해도 람빅이 흔히 제조되는 술은 아니었고, 해당 법 또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법은 아니었는데요. 1990년대 들어서야 람빅이 가지는 전통적인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연합을 결성했고, 1997년 EU로부터 Traditionally Specialty Guaranteed (TSG) Label 의 지위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프랑스 샹파뉴 지방에서 만들어지는 스파클링 와인에만 샴페인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듯이, 람빅 또한 원산지 명칭 보호 및 지리적 표시에 대한 보호를 받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는 술
만들어지는 방법이 까다로운 술이지만, 재미있게도 람빅은 변형이 많은 술입니다. 특히나 그중에서도 과일을 배합해서 만들어낸 프루트 람빅의 경우 어떤 과일을 넣느냐에 따라 그 종류가 정말 다양한데요. 이 중 와인과 굉장히 닮아있는 람빅이 있습니다. 바로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Cantillon 양조장에서 만들어내는 Saint Lamvinus와 Vignerrone입니다. 두 람빅 모두 이름과 레이블로부터 포도가 들어갔음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죠.
Lamvinus에서는 람빅의 Lam과 라틴어로 와인을 뜻하는 Vinus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Lamvinus는 보르도의 꼬뜨 드 브루(Côtes de Bourg)에서 직접 공수해온 포도를 람빅 배럴에 함께 넣어 숙성시키기 때문입니다. 와인을 직접적으로 넣는 것은 아니지만, 보르도 와인 제조에 쓰이는 품종과 함께 몇 달간 숙성된다는 부분이 흥미롭죠. 실제로 칸티옹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생 람비누스가 와인과 맥주 세계 사이의 연결을 의미한다고 소개하고 있기도 합니다. 물론 포도 공수만 해도 쉽지 않은 일이기에 생산량이 적은 편이라는 점은 자연스러운 부분이겠습니다.
Vignerrone은 람비누스와는 달리 이탈리아의 청포도, 무스카트를 사용합니다. 최대한으로 익은 포도를 사용하기 때문에 10월에 들어서 수확한 포도를 골라 16~18개월 정도의 람빅과 함께 숙성시킨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람빅은 정말 다양한 종류의 과실, 또는 다른 재료와의 배합이 가능합니다. 실제로 칸티옹에서는 2년가량 숙성된 람빅에 엘더베리꽃을 담가 만든 마모슈(Mamouche)나 꼬냑 배럴에서 숙성된 람빅인 50°N – 4°E라는 종류도 생산하고 있죠. 칸티옹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양조장에서도 다양한 배합의 람빅을 통해 색다른 매력과 그 대중성을 높이는 데에 많이 기여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것을 만들고 지켜가나
수요가 많지는 않지만 꾸준한 이 벨기에 전통 맥주는 그 전통성을 보존하기 위해 나름의 방법을 찾았습니다. 1997년 Horal(Hoge Raad voor Ambachtelijke Lambikbieren, 전통 람빅 맥주 위원회)이라는 이름으로 람빅 양조장들이 모여 컨소시엄을 결성한 것입니다. 람빅을 널리 알리고 보존하기 위해 그들은 람빅 페스티벌인 Toer de Geuze(투르드 괴즈)를 여는 것은 물론, Traditionally Specialty Guaranteed (TSG) Label을 얻어 원산지 보호를 받게 되는 데 큰 역할을 했죠.
이런 Horal 위원회의 시작은 3 Fonteinen과 Boon, De Cam, De Troch, Lindemans, Timmermans 양조장을 주축으로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2021년 현재는 3 Fonteinen과 Girardin 양조장은 위원회를 떠난 채, 9개의 양조장으로 구성되어 여전히 람빅의 전통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위에서 다루었던 칸티옹의 경우는 꽤 큰 람빅 생산자임에도 불구하고 Horal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Horal에 들어가면 위원회에서 규정하고 있는 특정 용어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문제였죠.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Horal에 소속되어있는 양조장 중 일부가 전통적인 람빅 방식이 아닌, 당이나 인공 감미료를 이용한 람빅을 주요 포트폴리오로 져가는 곳들이 있다는 것이 또 다른 문제였죠.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는 칸티옹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양조장과 결을 같이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즐기는 람빅
벨기에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노력이 멋진 람빅은 국내에서도 일부 양조장들의 결과물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Boon, Cantillon, 3Fonteinen의 제품들과 설탕이 첨가된 Lindermans, Timmermans의 좀 더 접근성 높은 람빅이 현재 한국에서도 유통되고 있습니다. 유통되는 양이 많지 않아 해당 람빅을 취급하는 곳들을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조금 있지만, 그런 만큼 발견한 날에는 한 번 도전해 보시기를 독자 여러분께 추천해 드립니다. 오랜 기간의 전통을 고수하고자 노력해온 먼 나라 양조장들이 만들어낸 결과물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여러분들의 더운 여름밤을 위로해줄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