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술을 전 세계로 알리는 게 제 꿈입니다.”

청년들이 모이는 <꿈톡 토크쇼>에서 처음 만난 김택상 명인 / 사진 제공: 강주원

몇 년 전, 청년들이 모여 자신의 고민과 꿈을 말하는 토크쇼에서 청중 한 분이 일어나 마이크를 잡았다. 무엇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말하는 20대의 청년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 늦은 건 전혀 없어요. 제 나이에도 꿈을 꿉니다. 저는 우리나라 술을 전 세계로 알리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어요. 저도 꿈을 꿉니다. 절대 늦은 건 없어요.”

꿈을 꾸는데 늦은 나이는 없다는 말. 식상할 수 있는 그 말이 왜 그렇게 가슴에 와닿았을까. 그의 목소리에서, 그의 눈에서 진심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술을 빚는다던 그는 알고보니 그날 강연을 했던 내 지인의 지인이었고, 그게 인연이 되어 훗날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내 지인의 전시회에서 그가 전통주 시음회를 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지인의 작품을 보러 간 것이었지만, 그림보다 더 기억에 남는 건 그날 마셨던 술 맛이다.

우리에게 늦은 나이는 없다고 말씀하시던 그분은, 서울 무형문화재 8호로 지정된 ‘삼해소주’를 빚는 김택상 명인이다. 당시엔 전통주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지만, 그가 만든 삼해소주의 맛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뭐라 할까. 충격적이다.

삼해소주는 45도의 고도주이다. 하지만 정작 입 압에서는 풍미와 알코올의 질감이 서로 포근히 감싸 안으며 너무도 부드럽다. 높은 알코올은 보통 목넘김에서 식도를 뜨겁게 긁으며 내려가는데, 삼해소주는 그 뜨거움이 없다. 그리고 술이 목을 지나 가슴 정도 왔다고 느껴졌을 때, 술의 향과 맛이 가슴 전체에 퍼진다. 동시에 쌀과 누룩의 향과 맛이 가슴에서 뜨겁게 맴돈다. 바로 가슴에서 알코올의 뜨거움이 아닌 풍미의 강렬함이 눈을 뜬다. 구수하면서 달콤하다. 과일 향이 나는 듯, 꽃 향이 나는 듯. 딱히 한마디로 정리할 수가 없어 그저 ‘충격적’인 맛이라 표현할 뿐이다.

술 한 잔에 신세계를 경험한 나는, 당장에라도 삼해소주 한 병을 구매해 집으로 가져가고 싶었으나, 그날은 판매가 아니라 시음을 위한 행사였다. 더군다나 1인 1잔으로 시음이 제한 되어있어 아쉬운 마음을 가득 담아 훗날을 기약했다. 그리고 4년이 흘러 기억이 흩어질 때쯤, 강남의 ‘식품명인 체험홍보관’에서 삼해소주를 다시 만났다.

“어?! 대박. 여기 삼해소주 있다.”

종종 들르는 식품명인 체험홍보관에서 발견한 삼해소주. 식품명인 체험홍보관은 우리나라 명인들의 음식과 음료를 판매하는 곳인데, 가격은 저렴하고 맛은 더할 나위 없다. 그리고 전통주까지 판매 하니 더욱 애정이 간다.

그날도 체험관을 들러 차를 한 잔 시키고 전통주 쪽으로 발길을 옮겨 쭉 둘러보던 중, 삼해소주를 발견했다. 나는 기쁜 마음에 직원에게 시음을 부탁했고, 직원은 시음 잔에 삼해소주를 가득 따라주었다.

4년 만의 재회였다. 허나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그동안 나름 수많은 전통주를 접하고 마셔온 나였다. 과거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담담히 삼해소주의 향을 맡았다. 쌀과 누룩의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게 꽃의 향이 난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역시는 역시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한참 향을 맡다가 술을 홀짝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4년 전, 충격과 감동의 그 맛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졌다. 부드러운 목넘김과 가슴에서 느껴지는 풍미는 세상이 빠르게 변해도 고즈넉함과 따스함으로 변함없이 우리를 맞이하는 고궁을 떠올리게 했다. 그 자리에서 한 병을 다 비워버리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마음을 억누르고 정중하게 한 병을 구매했다.

살 수밖에 없었던 삼해소주. 정가는 25,000원 / 사진 제공: 강주원

몇 년 전, 삼해소주를 처음 접할 땐 몰랐다. 비교 대상이 없었기에 이게 이렇게나 맛있는 술이라는 걸 제대로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다른 전통주들과 비교를 해봐도 감히 이만한 전통주를 찾기는 힘들다. 부드러움은 두말할 것도 없다. ‘야,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라고 말하는 듯한 월등한 부드러움이다.

그렇게 부드럽게 넘어간 삼해소주는 한동안 가슴에 머문다. 가슴에 따뜻한 기운이 감돌면서 술의 향과 맛이 가슴에서 진하게 느껴진다. 4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술의 맛이 혀가 아닌 가슴에서 느껴진다. 누룩의 진한 향도 있으면서, 쌀의 고소한 맛도 있다. 다른 전통주처럼 ‘문배술은 배의 맛이 나요, 진도홍주는 약재의 맛이 강해요.’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미묘한 맛이다. 하지만 이거 정말 기가 막히게 맛있는 술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래, 이런저런 표현을 붙여서 뭐 해. 나는 그저 삼해소주는 ‘가슴으로 느끼는 술’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당최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삼해소주를 마시는 순간 가슴 깊이 공감할 것이다.

간이 강하지 않은 음식과 잘 어울리는 삼해소주. 간이 강하면 소주 고유의 맛을 덮어버린다 / 사진 제공: 강주원

삼해소주는 현재 강남에 위치한 <식품명인 홍보체험관>에서 구매할 수 있다. 다른 전통주에 비해 대량 생산 하고 있지 않아 소비자가 손쉽게 구하기는 어려운 술이다. 전통식품명인 제69호로 지정된 김택상 명인. 그는 삼해소주를 108일 동안 발효시킨 후 증류해서 만든다고 하는데, 그만큼 많은 시간이 들어가는 술이라 대량생산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삼해’라는 이름은 음력 정월 첫 돼지날인 ‘해’일에 밑술을 담그고 36일이 지난 그다음 돼지날에 두 번째 덧술을, 또 36일이 지난 다음 돼지날에 마지막 세 번째 덧술을 첨가해 총 세 번에 걸쳐 ‘해’일에 술을 담근다 하여 붙여졌다. 세 번 술을 담그고 108일 동안 발효를 했기 때문에 한 번만 담근 다른 술들과는 풍미의 깊이가 다르다. 또한 높은 알코올 도수로 증류하고 물로 희석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45도에 맞추어 증류한다. 물이 한 방울도 안 들어가 진하다는 뜻이다. 보통 진심은 가슴에 와 닿는다고 하지 않던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이 맛은 사실 김택상 명인의 삼해소주에 대한 진심의 맛이다. 삼해소주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일반 대중들의 손에 닿기 어렵다는 건 슬픈 일이지만, 명인의 장인 정신과 고집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기쁜 일이기도 하다.

실제 양조장은 파주에 있고 김택상 명인이 상주하며 술을 홍보하는 ‘삼해소주가’는 북촌한옥마을 쪽(종로구 창덕궁길 142)에 있다. 월 500병밖에 생산이 안 되지만 전통주의 맛과 문화를 널리 알리기 위해 그 누구보다 활발히 시음회 및 행사를 주최하고 있다. 언제든지 전화로 시음행사에 참여할 수 있으며, 시음을 넘어 술을 빚는 클래스도 참여할 수 있으니 ‘삼해소주가’로 문의하시길.

필자도 조만간 삼해소주가에 방문하려 한다. 그가 빚는 진심 가득한 술을 맛보기 위해, 그리고 그가 말하는 진심 가득한 꿈을 또 한 번 듣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