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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없는 ‘실험실 와인’의 시대

포도 없는 ‘실험실 와인’의 시대

임지연 2020년 8월 12일

와인이 인간 역사에 등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9000년 전이다. 가장 먼저 인간에 의해 재배가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포도나무 씨앗이 지금의 이란 북부 지역에서 발견됐는데, 당시를 시작으로 와인이 세계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대개의 문화와 유사한 ‘탑 다운 방식’이 적용됐다. 유럽 귀족 상류층과 당대의 유명 문학가, 예술가들에게 큰 사랑을 받으면서 와인은 인류의 발전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는 셈이다.

더욱이 지금보다 더 단맛이 귀하게 여겨졌던 시절에 적당한 알코올과 오묘한 신맛이 가미된 당도 높은 와인을 마다할 수 있는 이들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와인의 생산과정 중에 많은 자본과 노동력이 투입된다는 점에서 와인은 오랜 기간 동안 특권층의 전유물로 남아있었다. 특히 기후 영향을 많이 받는 와인의 주요 원료 포도의 생산량에 따라 오직 귀족층에만 최고급 와인이 허락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 왔을 것이다.

비교적 대중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디저트 와인의 생산은 실제로 20세기에 들어와서 처음 시작됐다. 하지만 시장에서 유통 중인 대중성이 짙은 와인의 경우, 그 품질이 가격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고가의 고급 와인의 대량 생산 및 저가 유통에 대한 열망은 여전히 뜨겁다. 그렇기에 여전히 ‘신의 눈물’이라고 불리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고급 와인에 대한 수요는 여전하다.

사진 출처: ‘Endless West’ 홈페이지

그런데, 최근 고급 와인의 맛을 그대로 재현한 비교적 저가의 와인이 등장했다. 여기에 더해 ‘착한 소비’라는 트렌드에 맞게 친환경적인 측면도 고려했다는 점이 화제다. 맛과 가격, 자연 친화성까지 만족시킨 와인은 다름 아닌 ‘분자 와인(Molecular Wine)’으로 불리는 실험실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일종이다.

마치 공정 무역 커피와 가학적인 동물의 실험 과정을 생략한 채 생산된 제품에 대한 열망이 실현된 ‘실험실 와인’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갖는 이들이 많다.

실험실 와인 또는 분자 와인으로 불리는 혁신적인 제품으로, 이름 그대로 자연친화적이며 과학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이는 기존의 ‘그린’ 와인과는 또 다른 차원의 제품이다. 지금껏 가장 자연친화적인 와인으로 알려지면서 이름 역시 ‘그린’ 와인으로 분류되었던 ‘친환경 와인’, ‘오가닉 와인’, ‘내추럴 와인’, ‘바이오다이나믹 와인’ 등의 4가지 상품과는 완전히 다른 상품이다. 이들 4개 제품은 모두 여전히 다양한 지역에서 다채로운 방식으로 생산된 포도를 주요 원료로 제조되는 엄연한 ‘와인’이라는 점에서 혁신적인 면은 큰 기대를 할 수 없었던 것들이다.

사진 출처: ‘Endless West’ 홈페이지

하지만 이번 기사에서 다루는 분자 와인은 그 생산 방식부터 기존의 것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마치 ‘씨 없는 수박’이 가장 먼저 생산됐을 당시의 충격처럼, 와인 생산 시 포도가 단 한 개도 첨가되지 않는다는 점은 혁신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 실제로 최근 미국 워싱턴포스트도 분자 와인의 ‘혁신적인 측면’에 주목하고, 분자 와인의 등장과 상용화는 시간문제일 뿐 많은 이들의 입맛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역량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특히 해당 유력 언론은 ‘분자 와인’의 대량 생산 가능성이 높아진 것과 관련해 ‘이제는 더 이상 대량의 포도를 생산할 농장의 필요성이 없어졌다’고 강조하고, ‘실험실에서 단시간 내에 생산이 가능하다는 점이 ‘혁신’이라는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린다’고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사진 출처: ‘Endless West’ 홈페이지

분자 와인에 대해 열광하는 주류 언론과 이 분야 전문가들은 자연재해와 기후의 영향으로부터 매우 자유로우며, 생산의 지속가능성은 말할 것도 없이 우수하다는 실험실 와인의 특성에 주목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 최근에는 그 가격까지 크게 낮췄다. 1병당 최소 6달러, 최대 11달러대에 구매할 수 있게 된 것인데, 맛은 기존의 고급 와인의 것과 동일하다는 평가다.

이처럼 유통 가격을 크게 낮출 수 있었던 것은 과거 와인 생산 시 소요됐던 농지 매입 및 운용 비용, 포도나무 재배 비용, 와인 제조 및 관리 비용 등의 문제를 실험실에서 단기간에 생산하면서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포도나무 한 그루가 자라기 위해서는 약 1톤 분량의 깨끗한 물이 소요됐었는데, 포도 열매 없이도 기존 와인 맛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게 되면서 분자 와인의 가격대가 크게 낮아진 것이다. 또, 이렇게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분자 와인의 경우, 생산 시 탄소 배출량을 현격히 감소시키는 등 오히려 자연친화적이라는 평가다. 특히 실험실 분자 와인은 매우 저렴한 가격대에 시장 상용화가 가능하다. 맛과 품질이 기존의 와인과 동일하다면 실험실 와인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이 업계의 평가다. 실험실에서 ‘뚝딱’ 완성되는 분자 와인의 가격은 기존의 200달러 수준의 고급 와인 대비 최고 14달러대에 유통이 가능하다. 그리고 생산 소요 시간은 단 15분에 불과하다.

사진 출처: ‘Endless West’ 홈페이지

실제로 최근 일명 ‘Ava Winery’로도 더 많이 알려진 ‘Endless West’는 최근 포도 열매 없이 단돈 20달러에 에탄올과 합성 화학물을 혼용해 대량의 와인 맛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분자 와인의 생산 성공을 통해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쌀이나 옥수수가 단 한 개도 첨가되지 않은 ‘사케’와 보리가 없이 제조되는 위스키가 현실적으로 가능해졌다고 설명했다.

Endless West에 소속된 와인 전문 연구원 Alec Lee 씨와 Josh Decolongon 씨 두 사람은 그들은 이들이 실험실에서 완성한 사케의 분자 구조가 옥수수와 쌀의 분자 효모 구성과 가장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주로 복숭아에서 추출한 효모 분자 성분을 활용했다. 물론 현행 미국 주류 음료 법규상 ‘와인’ 또는 ‘사케’라는 동일한 명칭의 라벨을 붙여 시장에 유통시킬 수 없는 형편이지만, 이들 연구팀은 빠른 시일 내에 분자 와인이 합법적으로 대중에 널리 알려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는 것.

특히 이들은 자신들이 주력 개발하고 있는 분자 와인의 향에 대해 이탈리아 북서부에서 생산되는 머스캣 포도로 만든 백포도주를 연상시킬 만큼 훌륭하다는 평가다. 전통적인 방식의 포도알 하나 첨가하지 않는 방식으로, 오로지 식물에서 얻은 식물성 효모로 완성한 와인에서 이탈리아 최고의 와인 맛을 구현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여전히 ‘분자 와인’은 기존의 ‘와인’이라는 정식 명칭 대신 각 연구소에서 소량으로 자체 생산한 상품에 대해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팔려나가고 있다.

사진 출처: 하버드대학 예술과학대학원 홈페이지

세계 최대 규모의 와이너리인 ‘이앤제이 갤로 와이너리(E&J Gallo Winery)’는 최근 자신들이 생산한 소량의 분자 와인 중 테스팅이 가능한 소량을 병에 담아서 판매해오고 있다. 해당 제품 역시 와인이라는 정식 이름 대신 ‘The baretoot’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작은 유리병에 든 소량의 ‘분자 와인’의 가격은 1병당 6달러대다.

이앤제이 갤로 와이너리의 대변인 Lea Solimine 씨는 최근 분자 와인 생산과 관련한 언론 인터뷰에서 “분자 와인이 대량으로 생산돼 대중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경우 환경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실제로 Lea Solimine 씨는 “기존 와인과 달리 분자 와인 생산 시 필요한 물과 땅의 비용이 줄어들 것이고, 제품 생산 시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크게 감소시킬 수 있을 것”이라면서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농업 방식에서 소요됐던 농약과 농약 잔류로 인한 식품 안전성 논란도 더 이상 고려하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같은 긍정적인 평가가 주류인 상황 속에서 일각에서는 분자 와인의 맛과 풍미가 기존의 고급 와인을 대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제기됐다.

사진 출처: ‘Endless West’ 홈페이지

미국의 와인 전문 저널리스트인 에스더 모블리(Esther Mobley) 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블로그를 통해 “광활한 토지와 깨끗한 물이 거의 필요하지 않으면서도 기존의 와인 생산 시 많은 근로자의 노동력이 소요됐던 문제도 고려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훌륭한 합성 분자 와인이 화두”라면서도 “과연 이것이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일인지 여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라고 했다.

에스더 모블리 씨는 이어 “와인의 매력은 실험실의 시험관에서 뚝딱하고 나올 수 있는 쉽게 모방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닐 것”이라면서 “지난해 맛본 빈티지 와인의 맛이 5년 후에는 완전히 다른 맛으로 발전돼 있는 것처럼 와인이라는 제품의 특성상 실험실에서 쉽게 따라 만들 수 있기는 매우 힘들 것”이라고 했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분자 와인을 주력 생산해오고 있는 Endless West 측은 ‘합성’ 분자 와인이라는 명칭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실험실에서 개발 중인 분자 와인은 기후 변화에 민감하지 않으면서도 완전한 친환경적인 측면을 고려한 상품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해당 업체 연구소 측은 “우리는 우리의 분자 와인을 가리켜 일각에서 제기하는 합성이라는 단어의 표현 방식을 반대”라면서 “우리가 사용하는 분자 와인의 경우 모든 것이 식물에서 추출된 순수한 분자 형태의 것으로 어떠한 화학 합성물을 증가 또는 인위적인 방식으로 조작해서 사용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순수한 분자를 가진 와인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거의 자연 상태의 것을 그대로 추출한 기존의 와인과 그 성분과 분자 배열이 유사하다”고 했다. 이어 “마치 일각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합성’분자 와인이라는 명칭은 분자 와인의 이미지를 ‘프랑켄슈타인의 와인’과 같은 괴물의 일종으로 만드는 우려가 있다”면서 “자연적으로 재배되는 모든 식물을 신뢰하는 이들이라면 우리가 만들어 내는 분자 와인에 대한 식품 안전성을 신뢰해도 좋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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