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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언제 어떻게 무엇과 마실까?

와인, 언제 어떻게 무엇과 마실까?

황수진 2019년 7월 18일

미색의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한 중년 백인 남성이 금방 받은 식사를 한동안 응시합니다. 그러다 무언가 나름의 결심이 선듯, 적당히 불은 미역국을 훌훌 불어 원샷 해버립니다. 나물과 쌀밥이 남았습니다. 그 전에 작은 물고기 모양 플라스틱 용기에 든 참기름 뚜껑을 따서 맛을 봅니다. 고소한 향이 나쁘지 않은 듯합니다. 이어, 고추장 튜브를 입에 쭉 짜 넣습니다. 짜고 매운맛에 얼굴을 찡그리고 고개를 살짝 내젓더니, 이건 아니라는 듯, 옆에 두고 나물과 밥, 참기름을 제각각 따로 젓가락으로 먹기 시작합니다.

몇 년 전, 유럽에서 한국으로 가는 한국 국적기를 탔을 때였습니다. 아줌마 오지랖을 부리지 않아야지 다짐했지만, 역지사지로 생각하니, 조심스러운 도움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옆자리의 아저씨께 비빔밥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드립니다. 유레카! 아저씨의 얼굴에 화색이 돕니다. 미역국은 이미 홀랑 다 드셔버렸지만, 그렇게 남은 나물과 밥, 참기름과 고추장을 골고루 비벼서 즐겁게 식사를 하시는 모습에 저까지 행복해졌습니다.

프랑스 남부에서 제가 운영하던 한식 레스토랑에서는 와인 말고도 소주와 몇 가지 대중적인 한국 술을 팔았습니다.

“이건 언제 마시는 건가요? 식전주로? 아니면 식사와 함께? 아니면 식후주?”

색다른 한국 술을 잔으로 시켜 맛을 보면서 많은 프랑스인이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며 질문을 했습니다. 글쎄요, 한국에서 소주나 백세주, 매실주는 언제 마시나요?

“식전, 식중, 식후. 한국인들은 이 술을 반주로도, 전후로도, 언제든 마시고 싶을 때 마셔요.”

문화란, 그 안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는 공기처럼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타문화에서 온 외부인들에게는 낯설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와인은 우리 고유의 것이 아닌 서양에서 온 낯선 문화이지요. 게다가 양주처럼 비싸더라도 따놓고도 한동안은 꿍쳐두고 조금씩 마실 수 있는 게 아닌, 한번 열면 단기간에 비워야 하는 와인. 제대로 잘 마셨다 싶게 마시려면 대체 언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 번쯤 고민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와인, 소주처럼 마셔라.

얼마 전, 와인 관련 한국 서적을 찾다 눈에 확 띄는 제목의 책 한 권을 찾았습니다. 찾아보니, 프랑스에서 16년을 사신 와인 전문가분이 쓰신 책이더군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단 줄로 요약된 유쾌하고 명쾌한 그 책의 제목은 바로, “와인, 소주처럼 마셔라”였습니다.

“아니, 소주만큼이나 싼 와인 찾기가 어렵지 않은 유럽에서나 그렇게 마시지, 못해도 만 원대가 넘는 와인을 소주처럼 마시라니, 그럴 바엔 차라리 소주를 마시지 뭣 하러 와인을 마신대요?”

맞습니다. 와인을 소주처럼 마시라니, 와인은 그래도 유럽사람들처럼 좀 멋 나게 마셔야 제맛인데, 너무 품격 없어 보이는 거 아닌가요?

대표적인 와인 생산국으로, 와인이 문화와 생활의 일부분인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의 사람들은 와인을 언제 어떻게 마실까요. 제가 경험한 이곳의 많은 이들은 와인을 언제든 자신이 원할 때 마십니다(이백오십만 알코올중독인구는 제외하겠습니다.). 식전주나 반주, 혹은 식후주, 거기에 일하거나 운전할 일이 없는 휴일이나 휴가 기간에는 친구나 가족을 만나면 수다 떨면서 군것질 대신 한 잔. 한국인들이 깡으로, 새우깡이나 김치와 혹은 식사, 안주와 맥주 혹은 막걸리와 전천후로 소주를 즐기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와인잔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한국 와인 애호가분들이 이곳 사람들을 본다면 아마도 기겁을 하셨을 겁니다. 와인 애호가들이 생각하는 제대로 된 고급 와인잔이 없는 가정이 반 이상이고, 그나마 있는 와인잔도 작달막한 다리에 와인 시음에 전혀 알맞지 않은 형태가 다수입니다. 다리가 달린 유리 와인잔이 없거나 모자란 경우에는 물컵이나 심지어는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 와인을 따라 마시기도 합니다. 와인 전용 잔에 비해 후각적으로 음미하기는 조금 힘들지만, 마시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고, 어디까지나 일반인들에게 와인은 시음이나 분석이 아닌, 마시고 즐기기 위한 술일 뿐이니까요.

마리아주는 프랑스어가 아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동네 슈퍼에서 유일하게 고등학생에게 파는 술이 미사주용 와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야자를 마치고 늦은 밤, 침대 옆 서랍장에 숨겨둔 병을 나발로 불며 마시는 와인은 어쩜 그리도 맛나던지요! 그러고 들어간 대학, 그 시절 동생이 사놓은 일본 만화 신의 물방울이 참 재미있더군요. 이후 프랑스에 와 만화에서 배운 대로 마리아주라는 단어를 곧잘 쓰곤 했습니다. 그런데 제 주변의 프랑스인들 그 누구도 제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한참이 지나서야 이마를 ‘탁’ 쳤지요.

그렇습니다. 한국에서 와인과 음식의 궁합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이는 마리아주는 사실 프랑스어가 아닙니다. 단어 자체는 결혼, 결혼식을 뜻하는 프랑스어이지만, 프랑스에서는 이 단어를 한국과 같은 용도로 쓰지 않습니다. 대신, 아꼬르 메-방 Accords mets-vins 이라고 하지요. 영어로도 푸드 와인 페어링 Food wine pairing이라고 하지, 마리아주라는 단어는 쓰지 않습니다.

이 말은 어디서 왔을까요. 개인적 소견으로 마리아주라는 단어는 돈까츠나 에아콘처럼 외래어를 따와 신조어를 만들기 좋아하는 일본인들에 의해 생겨난 용어인 듯합니다. 그렇다면, 일본식 외래어 대신 우리말로 주-식 궁합이라고 불러보면 어떨까요?

프랑스인들의 생활 속 주-식 궁합

프랑스인들이 곧잘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Des goûts et des couleurs, on ne dispute pas.” 맛과 색은 논하지 않는다. 즉, 개인의 취향은 각자 고유의 것이므로, 내가 맞고 너는 틀리다 식으로 왈가왈부할 주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좋은 주-식 궁합은 개인마다 다 다릅니다. 나는 순대에 소금 찍어서 막걸리와 먹는데, 너는 순대를 막장에 찍어 소주와 먹으니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제가 만난 보르도 토박이, 삼십 년 경력의 노련한 소믈리에 크리스티앙 씨는 산도가 높은 화이트와인과 크림이 많이 들어간 요리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높은 와인의 산도가 레몬즙처럼, 크림의 단백질인 카세인 성분을 응고시켜 요구르트 같은 맛을 낸다고 말이죠. 그렇지만 다른 이들은 크림의 풍성함과 느끼함을 와인의 산도가 잡아준다고 합니다. 샴페인 남쪽에 있는 오브 Aube지방에는 대표적 음식인 앙두이에뜨 드 트루와 오 샤우르스 Andouillette de Troyes au Chaource (뒷간 냄새를 풍기는, 돼지 대장으로 만든 소시지를 지역 고유의 치즈 샤우르스와 크림과 함께 익혀낸 요리)가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이 요리를 산도가 높은 샴페인, 혹은 그 지방 밖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로제와인인 로제 드 리세Rosé de Riceys와 곁들여 먹습니다. 그 둘의 어울림은, 천국이 이웃에 이사를 온 듯한 맛을 냅니다. 만일 저 소믈리에가 오브 지방의 레스토랑에서 서비스했다면, 이 주-식 궁합에 대해 무어라 했을까요?

여느 나라 미식업 종사자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소믈리에, 쉐프들은 이상적인 와인-음식 궁합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합니다. 그렇지만, 프랑스인들의 대부분은 그냥 쿨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와인과 음식을 함께 마시고, 먹습니다. 많은 와인 전문가와 소믈리에들이 대부분 치즈와 레드와인은 어울리지 않으며, 오히려 화이트와인이 더 낫다고 침이 마르게 조언합니다만, 절대다수의 프랑스인들은“치즈엔 레드!”를 외치며 그들의 오래된 습관을 버리지 않습니다. 똥고집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입맛에 모범답안이 있나요?

말이 나온 김에, 오늘 저녁은 앙두이에뜨 오 샤우르스입니다. 냄새는 고약하지만, 맛은 섬세합니다.

한국식 와인 문화와 주-식 궁합을 찾아.

프랑스인들은 보통 식사와 함께 와인을 마십니다. 식사 외에 와인을 마시는 경우는, 견과류, 치즈, 짭조름한 과자나 감자 칩, 샤뀨트리charcuterie라고 하는 육류가공품들(건조 혹은 훈연한 소시지와 햄, 빠떼paté, 리에뜨rillette, 떼린terrine 등을 포함) 등 주로 짠맛이 나는 것들을 안주 삼아 먹지요. 소금의 짠맛, 기름의 풍부함이 와인의 떫은 타닌이나 날카로운 산도를 한층 부드럽게 합니다. 반대로 단맛이나, 신맛, 매운맛은 와인의 타닌과 산도, 쓴맛을 증폭시켜 와인이 공격적이고 불쾌하게 느껴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와인과 함께 곁들이는 음식들은 단맛, 신맛, 매운맛이 거의 없고 짠맛과 기름의 고소한 맛이 풍부합니다.

<단맛, 신맛, 매운맛은 와인과 매칭하기 좋지 않다>. 잠깐만요. 사실 이건 유럽인들 입맛에 맞춘 기준 아닙니까? 매운맛은 미각이 아닌 통각이라고 합니다. 에스쁠렛Esplette 고추를 재배해 먹는 바스크인을 제외한 토종 프랑스인들 다수는 매운 음식을 먹으면, 입안이 얼얼하고 아파서 안절 부절못합니다. 이런 이들이 달짝지근, 매운 데다 뜨겁기까지 한 김치찌개와 타닌과 산도가 모두 높은 꼬뜨 로띠Côte Rôtie같은 와인을 마신다면 입에서 불을 뿜으며 기절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아플 정도의 매운맛, 얼큰함을 즐기고, 자극적인 맛을 좋아하는 한국인은 오히려 그 조합이 더 매력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우리만의 입맛, 취향을 따라서 새로운 와인-음식 궁합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한국의 전통 궁합, 혹은 비슷한 성향의 음식이 프랑스나 와인을 많이 마시는 국가에 있다면, 거기서 힌트를 얻어 시도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합니다. 암모니아 성분이 코를 뻥 뚫는 그 기분이 상쾌한 삭힌 홍어에는 무엇이 좋을까요?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에는 숙성하면 암모니아성 고린내가 독한 에뿌아스Epoisse 치즈가 있습니다. 이 치즈에는 과일 향보다는 버터와 오크 향이 주가 되면서 힘이 있는 북부 부르고뉴 스타일의 샤르도네가 잘 어울립니다. 그렇담, 홍어에도 비슷한 와인을 한번 곁들여보면 어떨까요? 한편으로는 홍어 하면 막걸리니, 알코올 도수가 낮으면서 달짝지근하고 부드러운 스페인의 스파클링 모스카토 와인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네요.

과메기, 생선회, 수육, 족발, 빈대떡, 도토리묵, 두부김치, 해물파전, 육회……. 우리의 전통 안주에 어울리는 와인을 상상하고, 찾아서 실제로 맛보는 쏠쏠한 즐거움, 상상만 해도 신납니다. 봄철, 다정한 사람들과 함께 모여 찾아보는 한국식 주-식 궁합, 멋진 조합을 찾으시면 저에게도 살짝 알려주세요!

사진
구수한 뒷간 내가 인상적인 앙두이에뜨와 부드러운 샤우르스 치즈
오브 지방의 전통요리, 앙두이에뜨 드 트르와 오 샤우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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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진

와인은 제게 삶의 위안이자 즐거움입니다. 당신에겐 무엇인가요? 7년간 남프랑스에서 레스토랑 운영, WSET Diploma, 45여개국 방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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