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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탄생 (4부)

4. 로마의 멸망, 프랑크 왕국의 등장과 와인의 부흥

1세기. 유럽의 와인 생산지는 북으로 영국, 서로 포르투갈, 동으로 폴란드까지,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제례 의식에서 특별 대우를 받은 와인은,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채택함에 따라 순풍에 돛을 단 듯 거침없이 퍼져 나갔다. 물론 종교적 배경이 서민들의 와인 소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겠지만, 와인의 인기가 이런 이유에서만 비롯되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유럽에서 포도밭의 확산은 와인이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동시에, 더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와인 자체의 상업성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종교와 와인은 긴밀하게 관계하면서 퇴보와 발전을 거듭했다. / 사진 제공: 배두환

이처럼 한 번도 퇴보 없이 오로지 전진만을 향해 가던 와인 산업은 게르만족의 침략으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살짝 위기에 처한다.
게르만족은 본래 북유럽 발트해 연안 쪽에 살았는데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자 조금씩 남으로 내려와 결국 로마 제국까지 이르게 된다. 한편, 4세기 말 동방에서 유럽으로 이동한 훈족이 게르만족을 완력으로 밀어내자, 게르만인들은 그들을 피해 본격적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역사 시간에 열심히 배운,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다. 당시 로마제국은 삼두 정치를 거쳐 서로마와 동로마 제국으로 나뉘어 있었고, 현재 이탈리아의 로마를 중심으로 세워진 서로마제국은 방비가 매우 허술했다고 한다. 결국 엄청난 수의 게르만족의 침략을 막아낼 수 없었고 장렬히 멸망하게 된다.

독일은 리슬링 와인의 본고장이지만, 맥주의 명성을 따라갈 수는 없다. 대단한 맥주 사랑의 과거 게르만족의 영향이 없다고 볼 수 없다. / 사진 제공: 배두환

여하튼 게르만족은 초기에는 와인의 ‘와’자도 몰랐던 엄청난 맥주 애호가였다. 다양한 역사서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그들을 야만족이라 부르며 무시하기 일쑤였고, 이런 인식 때문에 와인이 그들에 의해 퇴보했다는 근거 없는 사실이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이 와인을 몰랐고 싫어해서 억제 정책을 펼쳤다기보다, 거대한 와인 소비 집단이었던 로마 제국의 해체로 인한 충격이 와인 무역에 영향을 미쳤다는 편이 더 신빙성 있다. 제국의 중심지였던 로마가 급격히 붕괴하면서 와인의 수요가 눈에 띄게 감소하였고, 이는 이탈리아의 수많은 포도밭에서 생산되는 와인이 주인을 잃었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로마 제국 멸망역사 연구의 최고봉으로 학자들이 평가하는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

18세기에 <로마 제국 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를 집필한 역사가 기본(Gibbon)은 당시 상황을 책에 자세히 기술했다. 저술에 따르면 고대 게르만 인들은 “맥주라는 독한 술에 심각하게 중독되어 있다”고 서술하며, “보리의 추출물을 와인처럼 ‘썩힌’ 맥주는 취해야 직성이 풀리는 게르만인들에게 알맞은 술”이라고 비하했다. 또한 그런 미개한 민족인 게르만 인이 고급 와인을 마주치자마자 반해 버렸다고도 이야기한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게르만 인들이 서유럽을 침략했던 이유 중 하나가 와인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세 이후로 종교의 힘을 등에 업고 포도밭은 엄청난 확장을 이룬다. / 사진 제공: 배두환

다양한 민족이 유럽을 놓고 치열한 경쟁 구도를 보이던 그 시기에도 취하는 음료의 원천인 포도밭은 건재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오히려 확장되기도 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야만족(게르만, 고트족 혹은 색슨족)들 역시 와인 생산은 장려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예를 들어 서고트족의 법전에는 포도밭을 손상시키면 중형에 처한다는 문구가 나와 있다고 한다. 여러 역사적 근거를 살펴볼 때 로마를 대신해 등장한 유럽의 정복자들은 포도밭 보호에 만전을 기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게르만족의 부르군트 왕국은 후에 부르고뉴의 어원이 됐다. 사진은 부르고뉴의 포도밭 / 사진 제공: 배두환

게르만족은 로마를 먹어 치우고 서유럽을 집어삼키면서 여러 국가를 만들었다. 게르만족이 세운 왕국들을 열거해보면 앵글로 색슨 7 왕국, 프랑크 왕국, 부르군트 왕국, 서고트 왕국, 동고트왕국, 랑고바르드 왕국, 반달 왕국이다. 이름이 낯익은 것들도 꽤 있을 것이다. 지금의 이탈리아 북부의 밀라노를 주도로 하는 롬바르디아 주가 랑고바르드 왕국의 이름에서 유래되었고, 부르군트 왕국은 동 게르만의 부르군트족이 세운 왕국으로 오늘날 프랑스의 부르고뉴 지방의 어원이 바로 부르군트다. 또한 서고트 왕국은 오늘날 스페인과 포르투갈, 동고트 왕국은 지금의 이탈리아와 헝가리, 크로아티아가 포함된 지역이다.

클로비스 1세의 무덤. 사진 출처: wikimedia

게르만족이 세운 왕국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프랑크 왕국은 끝까지 살아남아 유럽 최대의 왕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마치 로마 제국이 유럽을 장악했던 것처럼. 프랑크 왕국이 발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게르만족의 다른 왕국들과 다르게, 서유럽의 중심에 위치해 왕국 간의 이동 거리가 짧았고, 안에서 밖으로 서서히 영역을 확장해가는 방식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와의 유대관계도 한몫했다. 프랑크 왕국의 초대왕 클로비스 Clovis 1세는 매우 현명하게 그리스도교로 개종해서 로마인들과 로마교황의 지지를 받게 된다. 그의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은 와인 산업 발전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어느 사회학자는 카롤링거 왕조 시대를 두고 ‘와인에 집착한 시대’라고 불렀다.

카롤링거 왕조의 가계도. 사진 출처: wikimedia

잠시 역사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카롤링거 왕조 이전, 메로빙거 왕조가 프랑크 왕국을 지배했다. 그때 카롤링거 가문은 왕국의 궁재를 담당하는 가문이었다. 궁재란 왕궁의 토지와 재산을 관리하는 감독관 역할을 하는 이들을 말한다. 하지만 메로빙거의 마지막 왕 힐데리히 3세를 카롤링거 가문의 피핀이 구테타를 일으켜 폐위시키고 자신이 스스로 왕위에 올라 카롤링거 왕조를 세우게 된다. 피핀은 로마의 교황과 공고한 유대관계를 만들었다. 일일이 관리하기도 벅찬 대제국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종교를 통해 보다 견고하게 다진 셈이다. 피핀은 자신의 정복지인 이탈리아 중부의 라벤나 지방 일대를 교황에게 선물했고, 바로 이것이 교황령의 시작이다.
이렇게 교황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온 카롤링거 왕조는 피핀의 아들인 프랑크 왕국의 2대왕 샤를마뉴에 와서는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보내게 된다. 샤를마뉴는 서유럽 전역을 정치적, 종교적으로 통일시키고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칭호를 얻게 된다. 768년 샤를마뉴 재위 초기에는 동생 카를만과 공동으로 통치를 했는데 771년에 동생이 죽자 단독 통치자가 된다. 샤를마뉴가 재위한 46년간 프랑크 왕국은 가장 크게 확장되면서 유럽의 패자로 등극했다.

샤를마뉴 대제의 황제 대관식. 사진 출처: wikimedia

와인 애호가라면 이 ‘샤를마뉴’라는 단어가 너무나도 익숙할 것이다. 바로 프랑스 부르고뉴 화이트 와인의 제왕이자 그랑 크뤼인 ‘코르통 샤를마뉴 Corton Charlemagne’가 그의 이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샤를마뉴 대제는 엄청난 와인 애호가였다. 그는 와인 생산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독일의 라인 지역에 처음으로 포도를 심고, 바로 부르고뉴의 코르통 언덕의 포도밭을 솔리유 수도원에 하사해 와인을 만들게 한 것이 바로 그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로마력을 대신해 새로운 역법을 만들면서 10월을 빈두메 마노트 즉, ‘와인을 만드는 달’이라고 불렀다. 샤를마뉴의 와인 사랑 때문에 샤를마뉴 대제가 와인을 엄청 마셔댔을 거라 추측하겠지만, 식사 자리에서도 와인을 세잔 이상 마시지 않는 절제미를 보여줬다고 한다.

랭스 대성당 / 사진 제공: 배두환

카롤링거 왕조는 보건 위생을 위해 와인 생산 과정을 철저히 관리하도록 지시했는데 여기에는 포도를 발로 밟아서 즙을 내면 안 된다는 조항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다들 아시다시피) 이 조항은 잘 지켜지지 않았고 수백 년간 포도를 발로 밟아 즙을 짜는 관행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큰 혜택을 받은 와인 산지가 바로 샹파뉴다. 7세기 들어 에페르네를 비롯한 유명 수도원들이 이 지역에 등장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포도밭이 광범위하게 생겨났다. 200년 후에는 포도밭이 워낙 많아서 지역별로 구분이 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샹파뉴 와인의 위상이 한껏 높아진 것은 816년 랭스에서 샤를마뉴 대제의 아들인 루트비히(Ludwig)의 대관식이 거행되면서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귀족들이 랭스의 와인을 마시고는 극찬을 했던 것. 이후 랭스가 프랑크 국왕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지방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샹파뉴 와인은 기품을 상징하게 됐다.

중세 수도원은 와인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이렇듯 카롤링거 왕조에 의해 정치권이 안정을 찾자 장거리 무역이 재개되었고, 와인 산업은 다시 부흥을 맞이했다. 그리고 1000년경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특히 교회는 포도 재배를 유지하고 전파한 주역이라 할 수 있다. 영성체만 하더라도 와인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는 어차피 답은 정해진 결론이긴 하다. 일부 교회에서는 날마다 와인을 마시는 것이 정례화되어 있었는데, 바로 베네딕투스 수도회가 좋은 예다.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는 “와인은 수도사에게 어울리는 음료가 아니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는 수도사들이 많은 만큼, 취하지 않을 정도만 마시도록 허용하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한 사람당 하루에 1헤르미나(약 230cc) 정도면 충분하다”라고도 했다. 당시 병에 걸린 수도사는 수도원장의 재량으로 와인의 양을 늘릴 수 있었다고 한다.

수도사들은 훌륭한 포도 재배자이자 와인메이커였다.

어찌 됐든 수도원에 딸린 포도밭의 규모는 상당했다. 파리 인근의 생 제르맹 데 프레 수도원은 814년을 기준으로 198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경작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이 중 3~4제곱킬로미터가 포도밭이었다고 한다. 이 포도밭들은 수도사와 소작농이 관리했는데, 수도원에 돌아가는 와인은 매년 약 640,000리터에 달했다고 한다. 이 수치를 보면 당시 와인 산업의 규모를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중세에 쓰던 포도 압착기

그러면 수도원이 포도밭의 규모를 이렇게까지 키운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수도원에서 와인을 쓸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여행을 하다 수도원에 잠시 머무는 사람들은 와인을 대접받는 것을 매우 당연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수도원장이 연회를 열 때도 와인은 필수품이었고, 수도사와 수녀들의 몫도 당연히 챙겨야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실상 종교적인 목적으로 소비하는 와인은 극히 일부분이었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영성체에 와인은 필수였다. 다만 중세 초기에는 이 영성체를 거의 열지 않았다는 것. 최소한으로 정해진 1년에 세 번도 지키지 않는 교회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영성체 때 와인을 마시는 사람을 사제로 한정했고, 평신도들은 빵만 주었다. 와인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받으려면 빵과 와인을 모두 먹어야 한다는 이단의 교리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결국 당시 대부분의 수도사는 종교적인 의미와는 아무 상관 없이 좋아서 와인을 마신 셈이다.

중세 수도사들은 포도 재배와 와인메이킹 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이유가 무엇이든 이들 덕분에 와인은 발전하게 됐다. 그들은 포도 재배에 여러 과학적인 방법을 도입해 실험했다. 레드 와인은 계란 흰자로, 화이트 와인은 부레풀로 정제하는 방법도 터득했다. 또한 와인을 만들면서 나오는 여러 부산물을 다채로운 용도로 활용했다. 철 지난 와인은 비네거로 만들어 썼고, 와인을 만들고 남은 포도는 치즈를 숙성시킬 때 활용하기도 했다. 포도 씨로는 향신료나 비누를 만들었다. 잎은 사료로, 나무는 땔감으로. 그야말로 포도 재배와 와인 생산은 버릴 게 하나 없는 매력적인 것임에 확실했다.
그 때문에 포도 재배와 와인 생산은 수도원과 교회에 힘입어 유럽 각지로 엄청나게 퍼져 나갔다. 그리스도교를 믿는 곳이면 어디나 교회나 수도원이 생겼고 이들은 마실 와인을 만들기 위해 포도를 재배했다. 만약 지금처럼 자동차나, 비행기, 철도가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이 당시에는 와인을 운송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에 그럴 거면 그냥 내가 포도를 재배하고 만들어 마시겠다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독일 서부는 포도밭이 6세기부터 증가해 300년 뒤에는 팔츠에서 83개, 바덴 23개, 뷔르템베르그 18개 마을에서 와인을 생산하게 됐다. 모두 현재 독일의 주요 와인 생산지다.
하지만 역사에는 늘 명암이 있어왔다. 이렇게 부흥하던 와인은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는데 바로 이슬람 문화의 등장이다.

(다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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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쟁이부부

선후배 사이였던 와인 매거진 기자 출신 남자, 소믈리에 출신 여자. 살아오며 경험한 와인의 절반을 함께 마셨고, 앞으로 만나게될 와인들은 항상 같이 마시게 될 동반자 관계. 평소엔 식당 주인, 때론 여행작가, 이따금 와인 강사, 이곳에선 와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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