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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탄생 (2부)

2. 고대 그리스의 와인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이 나름의 와인 문화를 꽃피우고 있을 무렵, 유럽에서도 서서히 문명의 태동이 시작된다. 시작은 크레타 섬이다. 유럽 문명의 시작이 그리스 문명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정확히는 크레타 섬에서 발달한 미노아 문명 Minoan Civilization이다. 그런데 왜 지중해의 수많은 섬 중에서 크레타였을까? 첫째, 비옥한 땅. 둘째, 지리적 이점 때문이다.

크레타 섬의 고대 미노아 문명의 유적 크노소스Knossos / 사진 출처: By Lapplaender – 자작, CC BY-SA 3.0 de,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5880095

우선 크레타 섬은 지중해의 다른 섬들과 비교해서 큰 편이다. 물론 지중해 최대의 섬인 시칠리아나 그다음인 사르데냐보다는 작지만, 충분히 비옥한 평야가 발달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졌다. 사시사철 온난한 지중해성 기후의 은총을 받아 평야에서 재배한 곡식, 올리브, 포도는 질이 매우 좋았다. 이 때문에 이를 통한 무역이 가능했다. 대상은 물론 오리엔트 문화권(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었다. 미노아 왕국은 애초부터 해상력이 국력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부단히 해군력을 키워나갔다. 기원전 1700년 전성기 시절의 미노아 왕국은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지중해의 교역을 거의 독점했다고 한다. 올리브유와 와인을 화려한 항아리에 담아 이집트, 시리아 등지로 수출하면서 엄청난 부를 쌓았다. 이 돈으로 화려한 궁전을 지었고, 도기, 금속, 조각, 그림 등의 문화도 발달하게 된다.

아서 존 에반스 / 사진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ir_Arthur_John_Evans.jpg

미노아 문명을 발굴했던 고고학자인 아더 존 에반스 Arthur John Evans는 1900년, 크레타의 수도 헤라크 레이온의 남쪽 5km 지점에서 먼 옛날 강성했던 미노아 문명의 실재를 이윽고 확인하게 된다. 그가 찾아낸 궁전은 4층 규모에 방이 무려 천 개가 넘었고, 심지어 궁전 내부에 유럽 최초의 포장도로가 깔려 있었다고 한다. 또한 수도 설비, 하수도 시설까지 완벽하게 설치된 것은 물론, 수세식 화장실과 호화로운 목욕탕도 있었다. 그럼 와인 셀러는? 정확히 와인만 보관했을 리가 없어서 와인 셀러라 부를 수는 없지만, 지하에서 커다란 항아리가 보관된 창고를 발견했다. 만약 이 항아리에 와인을 모두 채운다면 무려 19,000갤런(1갤런은 약 4리터)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렇게 발달했던 미노아 왕국은 (아직도 추측에 불과하지만) 지진으로 인해 순식간에 멸망했다. 미노아 왕국의 발전된 문화는 미케네 문명이 이어받았고, 이들 문명도 기원전 1100년에는 도리아인들에 의해 종말을 고했다. 이후 약 350년간의 캄캄한 암흑시대를 거친 후에야 나타난 문명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리스 문명이다. 기원전 8세기부터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필두로 도시 국가인 폴리스가 형성되었고, 스스로를 헬레네인이라 칭하며 지중해의 새로운 패권자로 등극하게 된다. 이 그리스 문명에서 꽃피운 여러 가지 것들이 있는데 와인도 그 중 하나다.

고대 그리스 시대. 물과 와인을 섞기 위한 테라코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사진 제공: 배두환

기록에 따르면 초기 그리스의 밭에는 올리브나 포도 그리고 다른 농작물을 섞어서 재배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포도만 재배하는 포도밭이 늘어났다고 한다. 물론 과실로 먹는 비중도 컸겠지만, 잘 알고 있듯이 고대 그리스인들은 와인 마시는 걸 참 좋아했다. 오죽하면 심포지엄 Symposium이라는 단어가 생겼을까. 지금은 심포지엄이 ‘특정한 문제에 대하여 두 사람 이상의 전문가가 서로 다른 각도에서 의견을 발표하고 참석자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의 토론회’라는 뜻이지만, 본래 고대 그리스어로 ‘향연 Συμπόσιον’에서 유래했다. 즉, 먹고 마신다는 뜻이다. 물론 와인을.
포도밭의 위치도 당연히 폴리스를 주변으로 생겨났다가 기원전 5세기 즈음에는 주변 섬들로 확장하게 된다. 그때 정말 맛 좋은 와인으로 정평이 나 있던 것들이 타소스 Thasos, 레스보르 Lesbos, 키오스 Chios(셋 다 섬이다) 와인이었다고 한다. 이때는 당연히 육로보다는 해상으로 와인을 운반하기가 쉬웠기 때문에 포도밭은 대부분 해안가에 위치해 있었는데, 타소스의 한 포도밭은 그 면적이 약 30ha(그러니까 29만 제곱킬로미터 정도)에 달했다고 한다.

청동기 시대 사람들도 지금처럼 포도로 와인을 만들어 마셨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사진 제공: 배두환

그리스인들은 수확을 좀 편하게 하기 위해서 나무보다는 격자시렁이나 막대를 포도 덩굴의 버팀목으로 삼는 등, 관습처럼 내려오던 포도 재배 방식에 혁신을 꾀했다. 심지어 당시 포도나무의 가지치기를 담당하는 것이 이미 직업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하지만 반대의 의미에서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이들이 천재지변으로부터 포도밭을 보호하기 위해 했던 미신적인 행동에 있다. 두 남자가 몸을 반으로 가른 회색 수탉을 들고 포도밭의 주변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뛰어가다 만나는 자리에 그 닭을 묻는 의식이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참으로 미개했다 싶기도 하지만,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정말 진지하고 중요했던 의식이었던 것 같다.

시칠리아 섬의 화산과 포도밭. 시칠리아의 와인 문화는 고대 그리스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 사진 제공: 배두환

와인 역사에 있어서 그리스인들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기술과 문화의 전파에 있다. 이미 당시에 와인은 올리브, 곡류와 함께 3대 주요 농산물로 자리를 잡았고, 훌륭한 무역품이라 부를만했다. 그리스인들은 와인 문화가 전혀 발달하지 않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남부에 와인 문화의 씨를 전파했다. 실제로 시칠리아섬의 와인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시작은 그리스인이다. 이전 시칠리아 편에서도 언급했지만, 시칠리아에 그리스인들이 정착한 시기는 BC 8세기경이었고, BC 6세기에는 마그나 그라에키아(이탈리아 남부 그리스 식민도시의 총칭)의 일부가 되었다. 이때부터 시칠리아 와인 문화가 꽃피우기 시작했다. 시칠리아에 그리스 고유의 토착 품종이 재배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고대 에트루리안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동굴. 사진은 몬테풀치아노 마을의 데 리치 De Ricci 와이너리의 지하 셀러 / 사진 제공: 배두환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긴다. 왜 이탈리아 북부는 그리스 식민지가 되지 않았을까? 그건 바로 이미 이탈리아 중북부에서 확고히 자리를 확립하고 있던 에트루리아인 때문이다. 이들 민족의 유래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아마도 아시아 쪽에서 건너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하튼 에트루리아인들은 잔인하고 향락적인 민족이었다고 한다. ‘향락’이라는 단어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그들에게 와인은 필수품이자, 중요한 사업 수단이기도 했다. 그리스인들이 이탈리아 남부에 포도를 재배하고 있을 때, 이미 이들은 알프스 너머 부르고뉴까지 와인을 수출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와인 문화는 프랑스 남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사진은 프로방스의 와이너리 / 사진 제공: 배두환

다시 돌아와서 그리스. 이들의 와인 수출은 (당연하지만) 주로 선박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뱃길이 험했기 때문에 지금도 지중해 바닥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암포라가 묻혀 있다. 이 중에서 한 해양 고고학자가 인양한 선박에는 무려 10,000개나 되는 암포라가 실려 있었다고 한다. 이걸 리터로 환산하면 300,000리터. 병으로 따지면 약 사십만 병이나 되는 용량이다. 또한 이 당시 그리스에서 갈리아로 와인을 수출하기 위해 필수로 거쳐야 했던 항구 마살리아(지금의 마르세이유)에는 해마다 약 천만 리터 정도의 와인이 거쳐 갔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양이다.

그럼 고대 그리스의 와인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고, 어떤 맛이었을까? 필자가 참고하는 서적인 로드 필립스의 <와인의 역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 카토에 의해, “겨우내 술을 마시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와인의 제조법
“단지에 포도즙 10콰드랜털(quadrantal, 고대 로마에서 쓰인 도량형), 식초 2콰드랜털, 끓인 포도즙 2콰드랜털, 물 50콰드랜털을 넣는다. 여기에 묵힌 소금물 64섹스타리우스(오늘날의 0,53리터)를 부어서 뚜껑을 덮고 10일을 기다린 뒤 밀봉한다. 이 와인은 하지까지 상하지 않는다고 하며 하지까지 다 마시지 못한 와인은 독한 식초로 활용하면 좋다.”

여기서 추정할 수 있지만, 이 당시의 와인은 포도 하나만을 가지고 만든 것을 지칭하지는 않았다. 위의 재료들은 사실 양반이다. 심지어 밀가루, 대리석 가루를 섞기도 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당시에는 이처럼 여러 재료를 함께 넣어서 만든 지금의 칵테일 같은 것도 와인이라고 불렀다.

현대의 와인은 더욱 정교하지만, 만드는 원리는 고대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 사진 제공: 배두환

고대 그리스에서 와인을 만드는 방법은 이전 글에서 소개한 이집트의 와인 생산 방식과 다르지 않다. 포도를 수확해 발로 밟든 무거운 것으로 누르든 즙을 짜내 발효시킨다. 이건 불변의 진리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당시에는 납 그릇에 와인을 넣고 끓이면 단맛이 강해지기 때문에 이를 선호한다고 전해진다. 과학적으로 납은 혀의 미뢰를 자극해 단맛을 낸다. 납이 인체에 유해한 성분인 것을 몰랐던 과거에는 납이 아마 단맛을 내는 신비로운 물질이 아니었을까.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고대에 이 납 중독으로 사망한 이들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상류층이라면 더더욱 더.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고대 로마에도 납의 유해성을 경고한 이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경고는 가볍게 무시되었고, 이후 2천 년 후까지 그릇이나 유약제로 납이 널리 사용되었다.

(다음은 고대 로마의 와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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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쟁이부부

선후배 사이였던 와인 매거진 기자 출신 남자, 소믈리에 출신 여자. 살아오며 경험한 와인의 절반을 함께 마셨고, 앞으로 만나게될 와인들은 항상 같이 마시게 될 동반자 관계. 평소엔 식당 주인, 때론 여행작가, 이따금 와인 강사, 이곳에선 와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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