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 «내추럴 와인, 대체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에서는 내추럴 와인의 탄생 배경에 관해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최근 몇십 년간, 산업화, 현대화된 농업기술과 “팔리는” 스타일만을 좇는 시장 논리는 여러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와인의 대량생산과 대중화로 세계 어느 곳에서나 와인을 쉽게 즐길 수 있게 되었지만, 한편으로 수많은 와인들이 토양과 전통을 잇는 탯줄이 끊겨 정체성을 잃을 위험에 놓였습니다.
손에 손잡고, 세계가 하나가 되는 오늘날, 거스를 수 없는 추세가 된 표준화와 획일화. 이에 대항하는 내추럴 와인이란 대체 무엇이며, 이것으로 과연 와인의 진정한 가치를 지켜낼 수 있을까요?
식초를 그 돈 내고 사 먹으라고? – 내추럴 아니고 뇌출혈 와인
프랑스의 소규모 와인 생산자들은 직접 레스토랑이나 와인샵을 방문하여 와인을 홍보하고 판매하기도 합니다. 제가 프랑스 남부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중에도 그런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2012년, 한 와인 생산자가 내추럴 와인을 만든다며, 전화로 약속 잡기를 원했습니다. 약속 당일,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다음날 연락이 와서, 다시 약속을 잡기를 요청합니다. 두 번째 약속 날, 예정된 시간에서 이십 분이 넘어서야, 반백의 곱슬머리가 부스스한 오륙십대의 남성이 와인 가방을 들고 느긋한 걸음으로 나타납니다. 사정이 있겠지, 애써 치미는 부아를 삭힙니다. 사과라도 한마디 했다면 괜찮았을 텐데, 이 사람의 첫 마디에 멍해졌습니다. “뭐 한 십오분 정도 늦는 것쯤이야.” 심기가 불편해진 저를 아랑곳하지 않고 꺼낸 서너 병의 와인들. 첫 와인을 잔에 따라 향을 맡습니다.
이건 와인이 아니라 썩은 포도로 만든 식초에 가깝습니다. 포도를 으깨어 자연상태로 고대로 두면, 알코올 발효로 술이 되었다가 식초가 되어버립니다. 아세토박터(Acetobacter)라는 아세트산/초산(Acetic acid) 박테리아 때문입니다. 이건 오랑우탄이 만들었대도 믿을 만큼, 내추럴해도 너무 내추럴 입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머지 와인들도 시음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거, 휘발성산(Volatile acidity), 그것도 아세트산이 너무 강해서 못 마시겠네요. 와인에 결함이 있는 것 같아요. 죄송하지만, 저희 식당에서는 이 와인들을 팔 수 없습니다.”
“내추럴 와인이 그럴 수도 있지, 이게 바로 자연이 만든 와인이라고!”
내추럴 와인을 해석하자면 자연 와인이니, 자연적으로 생기는 현상은 그냥 감수하고 마시라는 걸까요? 그런 이들의 와인을 한두 번 접하다 보면, 내추럴 마시다 뇌출혈이 올 것 같이 화가 나기도 합니다. 식초를 그 돈 내고 사 먹느니, 차라리 홍초에 오래된 포도 주스와 소주를 섞어 마시는 게 낫겠습니다.
내추럴 와인과 연예인들의 민낯
제가 만난 생산자의 말대로, 과연 내추럴 와인 생산은 “자연이 하는 대로 두는” 것일까요? 갑자기 슈퍼에서 포도를 사 와서 즙을 내어 와인을 만들어 팔고픈 충동이 들지 않으십니까? 강북 AOC, 도멘 왕십리쯤으로 제목도 붙여보고요.
포도나무는 기본적으로 생장력이 왕성한 식물입니다. 적절히 조절해주지 않으면, 농도와 당도가 떨어지는 질 낮은 열매를 과다하게 생산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일정수준 이상의 병충해가 발생했음에도 알맞게 조처하지 않거나, 최적의 수확기를 놓치는 경우, 양호한 상태의 좋은 열매를 얻기 어렵습니다. 나쁜 포도로는 그 아무리 뛰어난 양조자라고 해도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없습니다.
설사 천운으로 내버려 둔 밭에서 양질의 포도를 얻는다고 해도, 그 포도가 “나를 잘 키워주셨으니 그 은혜를 갚아야겠다. 혼자 스스로 잎사귀랑 벌레들 솎아내고, 으깨져서 통에 들어가 발효해야지!” 하지는 않습니다. 포도가 제대로 발효 및 숙성할 수 있도록 신경 써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포도즙이 테루아를 표현하는 좋은 와인이 되기 위해서는 위의 아세토박터 같이 와인을 망치는 균이 아닌, 좋은 효모균들이 필요합니다. 이 적합한 균들이 제대로 발효를 시작하고 끝내기 위해서는 효모의 먹이가 되는 양분 및 산소가 있어야 하며, 온도도 적당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완벽하게 잘 익은, 건강하고 깨끗한 열매 및 위생관리가 잘된 양조장은 필수입니다.
설사 성공적으로 와인이 만들어졌다 해도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닙니다. 대부분의 내추럴 와인의 경우 항산화제 및 방부제 역할을 하는 아황산염(sulfite)을 아예 넣지 않거나, 극소량만을 넣습니다. 포도 재배 및 양조 중 문제나 실수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병입이 되어 유통, 숙성되는 과정에서 와인이 어떻게 변해 최종 소비자에게 전해질지, 변수가 너무도 많습니다.
얼마 전 유행한 연예인들의 민낯 사진들. 완벽해 보이는 그들의 민낯이 진정 무방비, 무관리의 결과물이라고 믿는 순진한 분, 계신가요? 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내추럴 와인이라 해도, 생산자의 개입 없이 홀로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와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설사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가 생각하는 와인과는 차이가 있겠지요. 어떤 경우건 최소한의 간섭은 불가피하며, 첨가물 및 개입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다년간에 걸친 철저한 관찰 및 관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화장으로 아름다워지는 건, 자연스러운 쌩얼로 아름답기보다 훨씬 쉽습니다. 자연스럽게 맛있는 내추럴 와인은 사실 현대적 농업 및 양조기법에 드는 땀과 노력의 배 이상을 투자해야 가능합니다.
내추럴 와인의 문제점
내추럴 와인에 비판적인 목소리 중 하나는, 내추럴 와인이라는 이름 아래 질이 떨어지거나 결함이 있는 와인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퇴근 후 양말 냄새 같은 고린내나 아랫목에 메주 띄우는 듯한 쉰내가 내추럴 와인의 특징이라 생각하는 분들을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지요. 대부분의 내추럴 와인 소비자들은 산업 상품화된 와인을 소비하는 이들보다 와인의 결점에 대해 너그러운 편입니다. 유감스럽지만, 유연한 소비자들과 유행을 악용하여, 전문성이나 철저한 장인정신 없이 대충 만든 와인을 웃돈 받고 비싸게 팔아보려는 기회주의자들이 일부 존재하는 듯합니다.
몇몇 기회주의적인 와인들을 제쳐두고도, 내추럴 와인 운동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충분히 이해 가능합니다. 아직도 연세가 있으신 프랑스분들 중에는 보르도나 부르고뉴, 론 등 주요 지방의 와인이 아니면 입에도 대지 않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근래 뛰어난 가격 대비 품질과 다양성으로 사랑받는 랑그독-루시용이나 여타 지역 와인들이 과거에는 줘도 안마실 수준이었다고 하시죠. 재배 및 양조기술의 발달로 지난 수십 년간 전반적인 와인 품질이 향상된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추럴 와인 생산자들은 발전의 긍정적 효과마저도 인공적이라는 이유로 배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윤이 최우선인 자본주의 논리에 대항하며, 진정한 와인의 고유함과 가치를 천명하는 내추럴 와인 생산자들의 고집과 자부심은 분명 존경받아야 마땅합니다. 현대과학의 편리함을 제쳐두고 보다 자연과 대지에 가까운 와인을 빚어내기 위해 몇 배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그들의 노고도요. 그렇지만, 많은 내추럴 와인 생산자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과 가치를 주장하는 만큼이나, 그들 외의 다른 생산방식과 와인에 대해 배타적입니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방법만이 유일하게 옳다는 독단적 태도가 내추럴 와인에 대한 거부감을 키우기 일쑤지요. 게다가 내추럴 와인이라는 용어 자체부터 그 밖의 와인은 인공적 와인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한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내추럴 와인이 무엇이오?
1990년대에 프랑스에서 시작된 내추럴 와인 운동. 그 시작은 아이러니하게도, 저명한 와인 과학자인 쥘 쇼베Jules Chauvet(1907~1989)였습니다. 쇼베씨는 보졸레의 와인 생산자이기도 했는데, 과학자에 걸맞게 여러 실험을 스스로 시행해본 결과 이미 80년대에 “토양이 식물을 지배하며, 토양의 건강을 해치는 현대농업기술에서 벗어나 다시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인공 재배 효모 및 아황산염 사용에도 회의적이었지요.
2018년의 내추럴 와인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불행히도, 아직 내추럴 와인이 무엇이다. 라는 공식적이고 법적 정의는 없습니다. 공무원 배짱일까요? 프랑스의 정부 관련 와인 기관에서는 내추럴 와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아예 내추럴 와인 자체를 부정하기까지도 합니다.
내추럴 와인을 만드는 이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일부는 포도재배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다 쓰면서 양조만 최소/비개입 주의로 하는가 하면, 일부는 밭에서, 양조장, 병입시까지 철저하게 인공첨가물 및 조작을 최소화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기도 합니다. 생산자 사이에도 이렇게 해석의 차이가 크니, 소비자들의 혼란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공적, 법적 정의를 내리기 위해 20여 년 전부터 논의가 계속되어 왔지만, 공공기관과의 의견조정은 제쳐두고라도, 자연 와인을 만드는 자유분방한 이들답게 생산자 간 합의에 이르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내추럴 와인 생산자 협회(Association des vins naturels, AVN)는 “그 어떤 순간에도 첨가물을 넣지 않은 와인”을 내추럴 와인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협회는 내추럴 와인 헌장을 발표하여, 협회원들이 와인 생산 시 이를 지켜줄 것을 강제합니다. 그렇지만 한편에서는 이 헌장의 실효성에 의문을 표하거나, 내추럴 와인에 맞지 않게 지나치게 강압적이고 독단적이라고 비판합니다. 그야말로 개판 오 분 전이 따로 없는데, 솥의 밥이 다 식기 전에 이놈의 아수라장이 좀 잠잠해질지 두고 볼 일입니다.
내추럴 와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직도 명확한 정의가 없는 내추럴 와인. 그렇지만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해서 존재를 부정하기에는 이미 시장에서 내추럴 와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도 큽니다. 소비의 중심은 제도권 내에서의 경제적, 사회적 성공을 중요시하였던 베이비붐 세대에서, 비제도권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환경과 같은 여러 사회문제에 큰 관심을 두는 밀레니얼 세대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내추럴 와인의 유행이 오늘내일 멈출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
우리는 내추럴 와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명쾌한 규정이 없는 이상, 내추럴 와인을“이다, 아니다”의 흑백논리로 보기보다는 스펙트럼처럼 연속적 개념으로 보는 것이 어떨는지요? 소비자 의식이 성장하고, 정보 공유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서 현대적 와인 생산자들조차도 이 경향을 무턱대고 무시할 수만은 없게 되었습니다. 시대의 흐름이라고 할까요?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결국 모든 와인들이 친환경적이고 자연주의적인 방식을 어느 정도는 수용할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내추럴 와인은 0 혹은 1이 아닌 그 정도에 따라 분류할 수 있을 듯합니다. 내추럴 와인과 사조를 같이 하지만, 이미 구체적인 정의와 생산기준을 갖춘 와인. 바이오다이내믹, 유기농, 지속 가능 농법으로 만든 와인과 아황산염 무첨가 와인이 그 예입니다. 바로 이들이 그 0과 1 사이에 들어갈 수 있겠네요.
이들 와인들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두루뭉실하기만 해 보이는 내추럴 와인 세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음 글에는 이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참고문헌
La Revue des Vins de France, https://www.larvf.com/,vin-naturel-avn-definition-officielle-olivier-cousin-alice-feiring-hutin,4477378.asp
L’Association des Vins Naturels, https://www.lesvinsnaturels.org/category/L-association/Engagement
마시자 매거진, https://mashija.com/비개입주의는-비양조가-아니다/
잰시스 로빈슨, https://www.jancisrobinson.com/articles/todays-wine-dichotomy
Goode, Jamie Wine Science. The Application of Science in Winemaking. Mitchell Beazley. London. 2014
Goode, J. & Harrop, S. Authentic Wine toward Natural and Sustainable Winemaking.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