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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목마르게 하는 소설 – 1. 에쿠니 가오리 «반짝반짝 빛나는»

나를 목마르게 하는 소설 – 1. 에쿠니 가오리 «반짝반짝 빛나는»

조나리 2020년 8월 5일

나는 자타 공인 길치다. 방향감각도 엉망이고 이 길이 어떻게 저 길과 이어지는지 도무지 그려내지 못한다. 얼마 전에는 방 정리를 하다가 고등학교 때 했던 적성검사 결과지를 발견했는데, 공간적 시각화 영역 백분위가 무려 12였다. (나보다 공간적 시각화가 안 되는 사람은 100명 중 11명뿐이라는 얘기다.)

해외 문학을 읽으면서 줄곧 가장 어려웠던 것 역시 작품이 묘사하는 공간—복잡한 골목길이나 건물의 구조, 성당의 내부—을 머릿속에 구현하는 일이었다. 특히 빅토르 위고처럼 묘사에 한 페이지 이상을 쓰는 작가의 작품은 대체 이게 언제 끝나나 책장을 미리 넘겨 확인하지 않고는 읽을 수가 없었다.

낯선 대상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었을까. 하지만 그 ‘낯섦’의 영역이 술과 음식으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셰리, 버번, 정어리, 청어, 버찌나 월귤 같은 생경한 이름들은 나를 매혹했다. 친절하게 맛과 향을 묘사해 주는 작품도 고마웠지만, 소설 속 인물들에게는 아주 일상적인 음식인 듯 간단히 이름만 언급하고 넘어가면 그건 그것대로 신비감과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하이디» 속 검은 빵에 집착하던 어린이 시기를 거쳐 청소년기에 접어든 이후, 내 호기심과 침샘을 가장 강렬히 자극한 것은 단연 이국적인 이름의 술들이었다. 알코올음료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인데, 주변의 어른들이 자주 마시는 맥주나 소주마저 아니라니. 금기에 희소성까지 더해져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어디서든 신분증 한번 꺼내지 않고 술을 마실 수 있게 된 지금도 텍스트로 구현된 술맛을 좇는 취향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글자 글자로 분해되어 코와 혀, 온몸으로 스며드는 소설 속 술의 맛, 그중 기억에 오래 남는 몇 가지를 차례로 소개해볼 생각이다. 첫 번째는 에쿠니 가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 속 민트 주레프다.

«반짝반짝 빛나는»은 알코올 중독에 정서불안 증세가 있는 아내 쇼코와 게이인 남편 무츠키의 이야기다. 둘은 서로의 사정을 알고 결혼했지만, 이들의 결혼 생활이 평탄하기만 할 리는 만무하다. 여기에 자유분방하고 약간 제멋대로인 무츠키의 애인 곤까지 합세하여 깨어질 듯 아슬아슬한 밸런스를 이룬 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는 조금 슬프면서도 사랑스럽다. (내가 이 책을 처음 본 것은 2000년대 초반으로, 다시 훑어보니 성 소수자에 대한 묘사가 낡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소설에서 가장 강렬하게 내 마음을 끌어당긴 건 인물들 간의 관계가 아니라 이국의 먹거리, 어른의 먹거리였다. 쇼코의 친구 미즈호가 화를 내며 버터 크래커 위에 얹어 아작아작 먹어 치운 정어리처럼 우리 집 식탁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음식이나, 파랗게 삶은 풋콩처럼 먹어봤음 직하나 정확히 어떤 상태의 콩인지 알 수 없었던 것, 모로조프의 코안트로 맛 슈크림처럼 굉장히 이국적인 이름을 가진 맛, 무엇보다 알코올 중독인 쇼코가 보여주는 다양한 술의 베리에이션—진과 퀸멜, 럼주를 몇 방울 떨어뜨린 홍차, 보리차인 체하는 위스키 그리고 아침에 마시는 샴페인 등—.

그리고 ‘민트 주레프’가 있다. 쇼코가 무츠키의 동료들과 곤을 집으로 초대했을 때, 바구니 한가득 채소들과 함께 대접했던 술이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무츠키와 동료들까지 꿀꺽꿀꺽 마시는 술, 불편할까 걱정했던 분위기를 유난히 밝고 명랑하게 만들어 준, 달콤한 맛이 나면서도 독한 술.

대학생이 된 뒤 이런저런 바에서 이 이름을 찾아보기도 하고, 인터넷에 검색도 해 보았지만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2007년쯤, 지금은 사라진 광화문 미로스페이스의 Bar 153에서 ‘샴페인 주레프’라는 칵테일을 발견하고 마셔본 것이 다였다. 생각이 날 때마다 검색어를 바꾸어 가며 찾아보다가 알게 된 것은 ‘민트 주레프’는 몰라도 ‘민트 줄렙’은 꽤나 잘 알려진 칵테일이라는 사실이었다. ‘Mint Julep’을 에쿠니 가오리가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했고, 그걸 그대로 옮겨 ‘민트 주레프’가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민트 줄렙은 켄터키 더비의 공식 칵테일이기도 하다. / 사진 출처: Forbes

드디어 실마리를 잡은 나는 ‘민트 줄렙’을 검색해 꽤 많은 정보를 찾아낼 수 있었다. 민트 줄렙은 버번위스키에 부순 얼음과 민트를 섞어 마시는 칵테일로, 미국 켄터키 주에서 열리는 경마대회인 ‘켄터키 더비’의 공식 음료이기도 하다. 버번위스키는 옥수수 함량이 51% 이상이며, 안을 태운 오크통에서 숙성한 미국 켄터키 주 버번 지방의 위스키를 일컫는다. 이 버번 특유의 묵직하고 달큼한 맛에 상쾌한 민트로 포인트를 주는 것이 민트 줄렙의 매력이다.

버번과 프레시 민트를 구해 민트 줄렙을 직접 만들어 먹어 본 뒤에는 무엇이 그렇게 쇼코와 무츠키, 곤 그리고 동료들을 즐겁게 만들었는지 알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당히 달달하면서도 상큼하고 시원해 평소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기분 좋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목구멍으로 넘기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알코올의 마법이니까.

‘주레프’에서 ‘줄렙’으로 검색어를 바꾼 뒤 알게 된 또 한 가지 사실은 이 술이 «위대한 개츠비»에도 등장한다는 것.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난 후에는 불편할 수밖에 없는 모임에 내놓을 음료로 쇼코가, 아니 에쿠니 가오리가 민트 줄렙을 고른 건 어쩌면 피츠제럴드의 이 소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진 출처: 영화 <위대한 개츠비>

닉과 조던, 톰과 데이지, 그리고 개츠비가 다 함께 플라자 호텔에서 민트 줄렙을 마시는 장면은 소설 전체를 통틀어 가장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부분이다. 데이지의 남편 톰은 집요하게 개츠비의 정체를 추궁하고, 개츠비는 톰에게 당신 아내가 줄곧 사랑해온 사람은 자신이라고 말한다. 데이지는 민트 줄렙을 만들어 주겠다고 말하며 긴장을 풀어보려 애쓰지만, 달콤하면서도 독한 술은 두 남자의 뒤틀린 속내에 불을 붙일 뿐이다. 결혼한 부부와 그중 한쪽의 연인, 그리고 그들의 지인이 함께한 자리에 곁들여지는 술이라는 점에서 두 소설 속 민트 줄렙은 같은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칵테일이 몰고 온 결과는 다르게 갈린다. 뜻밖의 기분 좋은 취기와 파국이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오 헨리의 단편 <하그레이브스의 가면>에도 민트 줄렙이 등장한다. 이 소설에서 민트 줄렙은 단순히 분위기를 만드는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퇴역한 남부군 장교 톨버트의 마지막 자존심을,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유일한 상대-연극배우 하그레이브스-를 향한 환대를 대변한다. 톨버트는 하그레이브스에게 민트 줄렙을 권하며 이렇게 말한다.

“자네가 근무지에서 맡은 바 직무가 고단하여서 시인들이 ‘지친 자연의 달콤한 회복제’라고 칭송할 만한 것을, 다시 말해 남부의 줄렙을 즐기고 싶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야.”

미국 남부 태생인 이 칵테일의 유전자를 잘 담고 있는 대사다. 페르시아의 ‘줄라브’를 기원으로 하는 민트 줄렙은 본디 약으로, 혹은 약을 먹은 뒤 입가심으로 애용되었다고 하니 ‘달콤한 회복제’라는 표현에도 일리가 있다. 물론 오늘날 칵테일을 약으로 먹는 사람은 없(기를 바란)다. 민트에 소화 불량이나 호흡기 질환을 완화하는 효능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러거나 저러거나 위스키가 들어간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으니까. 어색한 분위기를 가볍게 만드는 효과 정도는 기대해볼 만하다. 그러나 그 역시 장담할 수 없다. 내가 마시는 술이 «반짝반짝 빛나는»의 민트 줄렙일지, «위대한 개츠비»의 민트 줄렙일지는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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