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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탄생 (23부)

23. 와인의 사회화 2

필록세라와 제1, 2차 세계대전으로 수 차례 위기를 겪은 프랑스였지만, 포도 재배업자와 와인 생산업자가 드디어 정부와 손을 잡고 만신창이가 된 와인 산업의 보호와 육성을 시작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시행된 여러 정책들은 프랑스 와인 산업의 밑거름이 됐다. 위기를 기회를 만든 것. 이중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바로 AOC 제도의 등장이다. 아펠라시옹 도리진 콩트롤레(Appellation d’Origine Controlee) 즉, 원산지 통제 명칭의 약자인 AOC는 생산된 와인의 출처를 명확히 하는 제도로 오늘날 프랑스에서 생산되는 절반 이상의 와인들이 바로 이 제도를 따르고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샴페인처럼 특정 명칭 사용을 규제하는 제도는 존재하기는 했지만, 1919년부터 한층 엄격해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와인을 생산할 때 그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 지역에 대한 분쟁의 판결권이 법원에 주어졌고, 포도 품종이나 재배 방법 그리고 메이킹까지 세부적인 부분까지 규제 대상으로 지정됐다. 또한 와인 생산업자와 중개업자, 정부의 대표들로 구성된 조직화된 위원회가 탄생했고, 이 위원회는 1947년 국립 원산지 표기 협회(Nataional des Appellations d’Origine), 즉 INAO의 창설로 이어졌다.

AOC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소비자는 와인의 레이블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 / 사진 제공 : 배두환

한편 유럽이 전쟁과 필록세라의 참화를 극복하느라 애를 쓰는 동안 미국의 와인 생산업자들은 필록세라만큼 치명적인 위기를 맞이한다. 1920년, 의회가 ‘알코올성 음료’의 생산, 판매, 운송을 전국적으로 금지하는 금주법을 통과시킨 것이다. 제안자 하원의원의 이름을 딴 볼스테드 법(Volstead Act)은 알코올 농도가 0.5% 이상이면 불법으로 규정지었기 때문에, 대놓고 법에 ‘알코올 금지’라고 적어 놓은 것은 아니지만, 술에는 알코올이 들어갈 수 밖에 없으니 실질적으로는 모든 술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1920년 이 법은 미국 전역에서 시행되었다. 물론 와인 생산업자들까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됐는데, 기록에 따르면 미국의 와이너리가 1919년 한해 생산한 와인은 약 2억 리터에 달했지만, 1925년에는 무려 90% 이상 감소된 1,500만 리터에 그쳤다고 한다. 또한 술을 만들 때 쓰이는 다양한 곡물이나 포도와 같은 과일을 재배하는 농부들의 피해도 막심했다. 다만 와인의 경우 종교나 의약품, 향신료로 쓰이는 경우는 예외였는데, 이 덕분에 종교와 의약품으로 쓰이는 와인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여담이지만, 이 당시 성찬주를 만들었던 와이너리들이 현재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을 이끌고 있는 거물들이 많다. 대표적인 곳들이 베린저(Beringer), 보리우 빈야드(Beaulieu Vineyard)다.

금주법으로 버려지는 와인 / 사진 출처 : wikimedia

금주법은 결과적으로 보자면 완전한 실패였다. 법으로 금지가 되니 사람들은 그로 인한 술의 희소성에 집착해서 오히려 전보다 더 알코올을 찾게 됐고, 이를 불법적으로 유통하는 과정에서 범죄조직에게 막대한 자금력과 힘을 실어주는 상황에 처한다. 금주법 때문에 미국 정부 또한 막대한 자금 피해를 입게 됐는데, 금주법이 시행된 직후부터 미국 정부는 100억 달러가 넘는 주세를 거두지 못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미국에서의 금주법은 술을 만들거나 파는 것만 금지했을 뿐 술을 마시는 것 행위는 불법이 아니었기에, 금주법 시대 때 유람선들은 이러한 법의 허점을 파고들어서 미국 영해 밖에서 술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보리우 빈야드는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아 교회에서 성찬주를 만들어 제공할 수 있는 극소수의 와이너리 중 하나였다. / 사진 제공 : 배두환

시간이 지나면서, 금주법으로 인해 멕시코와 캐나다에서 술을 밀수하는 행위가 증가했고, 미국 현지에서도 암암리에 생산된 밀주가 넘쳐났다. 볼스테드 법에 따르면 비알코올성 음료인 과일 주스를 집 안에서 마실 목적으로 제조하는 행위는 불법이 아니었기 때문에 캘리포니아에서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던 와인의 양은 비록 실개천 정도로 줄긴 했지만, 포도 농가는 주스를 생산한다는 미명 아래 포도 재배를 계속했고 오히려 포도 생산량이 늘어나는 기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재배된 포도는 생식용으로, 주스로, 농축액으로, 혹은 건조품으로 미국 전역에 배달됐다. 예를 들어 건조시킨 덩어리를 보내는 택배에는 ‘물과 효모를 넣으면 발효가 시작되어 와인이 된다’는 경고 문구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를 순수하게 경고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렇게 은밀하게 대량 생산된 와인은 음식점, 클럽, 무허가 술집에 공급됐다.

금주법의 철폐 이후 캘리포니아의 와이너리는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다. / 사진 제공 : 배두환

1929년 10월에 대공황이 미국을 덮치면서 금주법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대공황 때문에 소비가 줄어 들면서 세수가 줄게 된 것. 미정부는 금주법을 폐지하면 주세를 징수할 수 있게 되고, 음지로 빠져든 양조업계를 다시 양지로 끌어올려 고용을 늘리면 경제에 활력이 돌 것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하지만 금주법은 수정헌법 18조로 규정된 조항이었고,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은 자기들이 의기양양하게 만든 법이었기 때문에 자존심 때문이라도 나서서 수정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침 민주당 소속인 루즈벨트가 금주법 폐지를 제1공약으로 내세우면서 엄청난 지지를 얻어 1932년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1933년 수정헌법 18조는 폐지되었다. 주 단위의 금주법은 그 후로도 남부 지방 위주로 상당 기간 존재했는데, 최종적으로 1966년 미시시피 주까지 금주법이 폐지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현대에 이르러 와인은 기호 식품으로 변화했다. / 사진 제공 : 배두환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와인은 필록세라, 금주법, 대공황, 세계 대전에 휩쓸리면서 갖가지 위기의 순간들을 관통했다. 이와 같은 오랜 시간 계속된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1950년대부터 와인을 우호적으로 보는 사회 분위기가 이어지면서 와인 산업은 번영과 안정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엄격한 원산지 표기 제도가 거의 모든 생산지에 도입이 되기 시작했고, 소비자들은 비로소 와인의 레이블의 진위 여부를 놓고 의심할 필요가 없어졌다. 전 세계 생산업자들은 나날이 까다로워지는 소비자의 입맛을 충족시키기 위해 고급 와인의 생산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인들은 와인을 물처럼 마신다는 것도 옛말 / 사진 제공 : 배두환

이 시기 유럽의 와인 산업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과거 와인의 주 생산국들의 부진이다. 와인의 종주국이라 일컫는 프랑스는 물론, 이탈리아 등 유럽 전체의 와인 소비량이 줄어들었다. 이는 소비자들의 눈높이에 맞춘 고급 와인의 생산이 늘어나면서 가격이 높아진 것이 주요한 원인이고, 이에 발맞춰 와인이라는 술이 기호 식품으로 바뀌게 된 것도 큰 이유다. 와인을 프랑스의 상징으로 생각했던 1900년대 중반의 애국자들이 와인 대신 물을 마시는 21세기 후손들을 본다면 아마도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1950년대 이후 수돗물의 질이 매우 좋아졌을 뿐 아니라, 생수의 시판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조사에 따르면 1950년대 후반에는 프랑스 인의 3분의 1이 식탁에서 물을 마셨지만, 지금은 4분의 3 이상이다. 또한 와인이 기호 식품으로 전락한 데에는 와인이 영양과 에너지의 공급해주는 식품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특히 음주와 작업 능률 간의 관계가 부정적으로 조사되면서 기호화는 더욱 가속화됐다.

와인이 건강에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적당량에 한해서다. / 사진 제공 : 배두환

와인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가 진행되면서 와인이 건강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술이라는 것이 밝혀졌는데, 이중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잘 알려진 프렌치 패러독스(French Paradox)다. 프렌치 패러독스는 프랑스인들이 미국인과 영국인 못지않게 고지방 식이를 하면서도 허혈성 심장병에 덜 걸리는 현상을 말한다. 1980년대부터 이와 관련된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특히 WHO의 모니카 프로젝트에 의해 뒷받침되어 그 원인이 레드 와인 때문이라고 보고되었다. 참고로 1982년부터 지금까지 진행 중인 모니카 프로젝트는 심장병의 위험인자들을 규명하기 위한 국제적인 조사사업으로 WHO가 주도하고 전세계 21개국이 참여하고 있는 연구 사업이다. 프렌치 패러독스가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가 된 것은 이러한 연구결과가 1991년 CBS의 인기 프로그램인 <60 Minutes>에 소개되면서부터다. 이 방송 이후 미국 내 와인 판매량이 4배 가까이 증가했다고 한다.

많은 변화를 거쳐 이제는 유기농 포도밭이 대세가 되었다. / 사진 제공 : 배두환

포도밭의 기계 사용이 증가한 것도 눈에 띄는 변화다. 트랙터가 발명된 것은 세계대전 중간이었으나, 유럽에서는 1960년대 이전까지도 사용하는 농부가 거의 없었다. 그들 입장에서 포도나무 사이를 트랙터가 누비기에는 너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롭게 등장한 스트래들 트랙터는 운전석이 높게 디자인 되어 있고, 양쪽 바퀴가 포도나무 사이를 두고 고랑을 이동할 수 있게 디자인되어 있어서 높은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기계화와 더불어 다양한 병충해 예방법과 품종 개량이 등장하면서 포도밭에서의 수확은 더욱 풍성해졌다. 품종 개량을 위해 노력한 역사는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급격한 성장을 이룬 20세기의 과학 기술로 말미암아 인류는 단시간에 병충해에 강하고 일정한 품질을 꾸준히 유지하는 품종을 만나게 됐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품종에서도 개량된 품종들이 꽤 많다. / 사진 제공 : 배두환

와인 소비 행태도 급격한 변화를 이루었다. 와인이 기호식품이 되고, 부유층들이 고급 와인에 높은 관심을 보이자, 고급 와인의 가격이 폭등했다. 이제 1등급 보르도 와인이나 이에 상응하는 특급 부르고뉴, 샴페인을 구입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로 좁아졌다. 1990년대 말, 1989년 산 샤또 오브리옹의 경매가는 평균 423달러였다. 소비자 가격은 물론 이보다 훨씬 높았고, 레스토랑에서는 2, 3배로 뛰었다. 또한 2000년 3월 소더비에서 경매로 팔린 샤또 페트뤼스는 12병이 24,150달러에 낙찰되기도 했다. 또한 유럽 와인의 아성에 도전하는 극소수의 캘리포니아 산 와인들도 한 병에 100달러를 호가하는 제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다음 시간에 파리의 심판 이야기와 몇 가지 이야기를 덧붙여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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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쟁이부부

선후배 사이였던 와인 매거진 기자 출신 남자, 소믈리에 출신 여자. 살아오며 경험한 와인의 절반을 함께 마셨고, 앞으로 만나게될 와인들은 항상 같이 마시게 될 동반자 관계. 평소엔 식당 주인, 때론 여행작가, 이따금 와인 강사, 이곳에선 와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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