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도 요즘 화두는 “지속가능한(sustainability)”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주변 이들에게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가 어떻게 8천 개씩 시음노트를 쓰느냐 하는 것이다. 방법을 가르쳐주자면 “욕심을 내지 않으면 된다”라는 것이다. 답은 간단한데, 어떻게 이를 실현할 것이냐 하는 것은 다른 주제에 해당될 것이라서, 이 글에서 이것을 좀 이야기하겠다. “욕심을 버리십시오”하는 불교 경전에나 나올법한 추상적 질문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얼마 전 글을 하나 읽었는데 “당신은 왜 마지막에 몰아서 일하는가”에 대한 주제였다. 이 글에서도 설명하는 것은 스스로가 너무 완벽하게 하려는 강박에 일을 손에 잡지 못하다가 마지막에 몰아서 하게 되는 것이라는 논리를 풀어 두었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틀린 것 같기도 하지만, 나는 이 경우에 많이 해당되는 것 같아서 이 역시 자유롭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경험을 많이 하는 것과 그것을 정리하며 데이터로 만드는 것은 다른 이야기라 생각된다.
주변에는 1만 종 이상의 와인을 시음해본 이들이 수두룩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듣기에도 와인 수입사나 해외 와인 테이스팅을 자주 가는 이들, 와인 모임을 자주 하는 이들의 경우 1년에 약 1,400종 이상 테이스팅 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 경우 10년이면 14,000종이 되니, 내가 가지고 있는 기록은 가볍게 뛰어넘는다. 예를 들어 나도 2016년 3월 프로바인에 간 당시 3일 동안 계속 돌아다니면서 약 250종의 와인을 테이스팅 했고 모두 기록하여 엑셀로 저장하였다. 직업이 아닌 경우도 이 정도이니, 직업으로 삼고 주변을 계속 돌아다닌다면 대단한 종류의 와인을 테이스팅 해볼 수 있다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일반 와인 애호가라 가정한다면 와인을 적게 시음하고 있는 것일까? 간단하게 생각해보자. 1주일에 1종의 와인을 마셨다고 생각한다면, 약 52주가 나오고, 10년이면 520종이 된다. 가볍게 와인을 마시는 애호가들이라 하더라도 한 달에 4종가량 마신다고 가정했을 때, 쌓아놓고 나면 큰 숫자가 된다. 한 번에 마시는 와인이 한 종류는 아니고 지인들과 모임을 하게 되면 종류가 늘어난다.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든지 많은 수의 와인 시음노트를 남길 수 있는 기본 토양은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기록으로 남겨두되, 규격화, 일반화시키는 것이다. 누구나 이를 쉽게 하지 못하기에 기록이 남지 않는 것이다. 메모지에 아마도 시음노트 한두 개는 남겨본 경험이 있을 것이고, 예쁜 몰스킨 와인 테이스팅 노트를 사서 거기에 마음먹고 쓰다가 그만둔 경험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한 두 개 쓰다가 귀찮다고, 생각보다 멋지지 않아서, 혹은 여러 이유로 그만 두었을 것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어떻게 하면 지속 가능하게 와인 시음노트를 쓸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테이스팅은 우리가 흔히 관능검사라고 하는 기준에 따라서 진행된다. 사방이 막힌 제한된 공간에 와인 잔은 ISO 표준 잔이 나오되 제한된 분량으로 나온다. 일반적인 큰 와인잔에 비해서 아로마를 풍부하게 느낄 수 없다. 대신 공정하게 와인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오로지 “평가”에 집중한다. 그래서 모든 와인을 뱉어버리게 된다. 즉, 인간의 몸이 측정 도구(센서)이지 마시는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룰을 와인이 잘 구비된 레스토랑 갔을 때도 지나치게 까다롭게 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주변 사람들도 피곤하겠지만, 깐깐함과 자신의 도도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공명심 사이에 발현되는 까다로운 행동은 자신의 집착과 욕심,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본다는 존중의 마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문제점이 있으면 논리적으로 지적하고 개선을 언급하되, 상대편에 대한 존중의 마음을 기본에 깔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와인에 대해서도 까다롭게 이야기 하고 집착하며, 테이스팅의 기준을 와인 자리에 가지고 오려 든다. 알게 되면 오히려 이러한 형식주의가 더 무서운 것임을 알게 되는데, 제일 무서운 것은 설익게 안 지식에 고정관념이 덧붙여지는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실 때는 마시되, 맛은 스스로 잘 기억해두고, 주변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면 자연스럽게 공부도 되고 내 머릿속에 와인의 시음노트가 생긴다.
“~~~ 이 와인은 카시스와 블랙커런트의 노트가 있으며, 피니시가 10초 이상으로 잘 익은 프렌치 오크의 터치가 은은하면서도 유려하게 전해진다. 이 생산자는 지난 10년간 일관된 양조 기법으로 안정감 있는 ~~~” 이러한 시음노트를 쓰려면 아로마를 이해해야 하며, 프렌치 오크의 특성과 미국 오크, 슬로베니안 오크의 특성을 알아야 하며, 양조기법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를 다 알아야 할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신의 물방울에 나오는 토미네 잇세 같은 비현실적인 감각을 따라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키워드를 붙이려 노력하고 여러 표현 방법을 쓰려 해도 잘 나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지향점, 즉, 너무 잘하려는 지향점, 완벽하려는 지향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잘하려고 하면 에너지를 빨리 쓰게 된다. 그만큼 빨리 지친다. 마라톤처럼 힘 배분을 꾸준히 해야 한다. 처음에는 미숙하더라도 쓴 뒤에 자신이 쓴 느낌을 다시 읽어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대개는 내가 쓴 글은 다시 읽지 않는다고 한다. 부끄러워서다. 그러나 그 두려움에 맞서서 자신의 글을 읽어보고, 부족한 자신의 글을 읽어야 한다. 그래야 조금씩 나아지게 된다.
간혹 “이 쓰레기 같은 와인은 평가 가치도 없어”하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볼 때도 있다. 이는 와인뿐만 아니라 평소의 마음가짐이 나는 위이며 다른 사람은 아래라는 마음속의 계급의식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고귀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에 대상이 되는 존재(와인)에 대해서 “쓰레기”라는 표현이 나오게 된다. 만약 그 와인을 개봉하기 전, 테이스팅 하기 전에도 기도하듯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면 적어도 업신여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면 그 존재를 좀 더 깊이 바라보게 된다. 감사하려면 언제나 아래의 마음, 낮은 시선이 필요하다. 장점을 보려면 아래에서 보아야 한다. 잘하려는 것 역시 욕심이다. 어느 정도의 욕심은 나를 살아있게 하지만 과한 욕심은 집착이다. 집착하면 마음에 독이 번져 나를 사로잡고, 바른 시각을 놓치게 한다. 시음노트를 쓴다는 것도 꼭 써야지 하는 집착을 하게 되면 잘 써지지 않는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장황하거나 전문가적인 시음노트를 쓰겠다고 생각해도 안 된다. 내가 받은 느낌을 있는 그대로 써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단어는 정제가 되고, 내가 자주 쓰는 표현들이 만들어져 나만의 개성 있는 시음노트가 완성된다. 100개를 썼을 때, 500개를 썼을 때, 1,000개를 썼을 때, 지나고 난 뒤에 자신의 시음노트를 돌아보면 그 깊은 감성을 느낄 수 있다. 그 모든 출발점은 감사하는 마음이자 나를 내려놓고, 대상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아마 이렇게 써두면 너무 철학적으로 보일 것 같아서, 다시 정리하여 시음노트 쓰는 팁을 줄까 한다. 지금부터는 실전이다.
정식 교육서를 읽으면 와인 자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방법을 잘 배울 수 있다. 최고의 책을 하나 추천하자면 지금은 절판되었지만, 바롬웍스에서 출간되었던 뱅상 가스니에의 “와인 테이스팅의 이해”와 “와인미학(방문송 외, 와인비전)”을 추천한다. 와인 테이스팅의 이해는 와인 시음의 A-Z 단계를 친절하고도 냉정한 관점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와인미학”은 이 글이 마시자 매거진에 소개되어서 추천하는 것이 아니고, 정말로 제대로 잘 쓰인 책이다. 유명한 책 경연대회에서도 음료 교육 서적 부문 대상을 받았으니,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다.
요즘은 누구나 다 와인 강사를 자처한다. 심지어는 나도 어디 가면 와인 강사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무엇이든 쉽게 가르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어디를 가나 “와인에 대한 전문 지식은 많은 전문가들이 계시므로 저는 그 설명을 하지 않고, 가벼운 주제로 가겠습니다”라고 운을 떼고 시작한다. 인증된 강사의 설명을 듣게 되면 좀 더 와인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을 할 수 있게 되고 지식을 단계적으로 알게 된다. WSET의 경우 위로 갈수록 지역별 전문가들이 있다. 샴페인 전문 강사, 부르고뉴 전문 강사, 이탈리아 전문 강사 등 지역별 특징을 이야기할 수 있는 강사 층이 있다. 그만큼 인증된 강사들의 지식수준은 우리 기준을 뛰어넘고, 그들은 그만큼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서로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명징하게 제공한다.
아로마는 누구나 다 통용할 수 있는 표준 어휘가 있다. 그러나 그 어휘들을 맹목적으로 따라 훈련하다 보면 나만의 느낌을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물론 와인 테이스팅에 대한 경험이 올라갈수록 표준화된 어휘를 활용하는 것이 좋지만, 처음부터 블랙커런트, 리코라이스같은 용어에 매몰될 이유는 없다. 마시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용어들에 익숙하게 된다. 처음에는 수박 맛, 참외 맛, 사과 맛, 배 맛 이렇게 해서 정리도 해 보고, 거봉 포도, 머루 포도, 오디, 복분자에도 익숙해져 보자. 다만 그 맛을 볼 때 집중하자. 의외로 우리는 각 과일의 맛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외국에 가도 여러 과일을 맛볼 때, 냄새를 맡아보는 습관을 지니자. 다음으로는 마트에 갔을 때 버섯 코너에 가면 버섯을 다양하게 향을 맡아보자. 의외로 버섯 아로마와 유사한 특징을 가진 경우도 많다. 계피, 잣, 호도 등 견과류 아로마도 맡아보자. 입에 들어갈 때와 코에 댈 때 그 향은 제각각이다. 시간이 갈수록 나만의 아로마 기준이 생긴다.
자, 이제 시음노트를 한 번 써볼 준비가 되었는가? 컴퓨터 키보드, 스마트폰의 자판, 비비노 같은 와인 앱, 무엇이라도 좋다. 내 손으로 슥슥 시음노트를 써보고 그 느낌을 공유하자. 시간이 갈수록 나만의 소중한 데이터가 될 것이고 그 가치는 오로지 나만의 것이니 이 얼마나 기쁘겠는가?